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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분석에서 ‘흔적(trace)’이라는 말이 강박관념이나 무슨 주술처럼 되풀이되는 것은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를 비롯한 정신분석학자들이 현재에 그늘을 드리우는 과거의 영향력과 파장에 주목한 결과다. 그런데 과거는 개인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역사를 비롯한 다른 것들에도 있다. 당연히, 역사도 흔적을 남긴다.

역사의 흔적은 폭력의 형태를 띠는 경우가 많다.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 1892~1940)의 말처럼 역사가 “문화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야만의 기록”이기에 흔적이 남는 건 불가피한 일인지 모른다. 물리적, 심리적 폭력을 기반으로 하는 식민주의 역사도 폭력의 흔적을 뒤에 남긴다는 점에서는 예외일 수 없다. 아니, 어쩌면 다른 어떤 역사보다 식민주의 역사는 더 “야만의 기록”이어서 그 흔적이 선명한 건지도 모른다. 식민주의 역사는 압박과 수탈의 대상인 국가나 민족에게는 정신외상(트라우마)으로 작용한다. 이른바 집단적인 정신외상인 것이다. 가해자(식민주의자)들은 이해하지 못할지 모르지만 피해자(피식민주의자)들은 식민주의에서 연유한 정신외상을 극복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를 체험을 통해서 안다. 식민주의를 경험한 제3세계권의 나라들에서 국가주의나 민족주의가 여타의 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압도하는 것은 식민주의 폭력의 흔적 때문일 것이다.

국가나 민족이 지상명제일 수는 없지만 식민주의가 종식되어도 그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는 상황이니 국가 및 민족 이데올로기가 여타의 것에 선행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제3세계에서는 일정한 국가(민족)주의가 기본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이야기나 개인적인 경험을 얘기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집단 자체의 경험을 힘들게 이야기하는 것을 포함할 수밖에 없다”는 프레드릭 제임슨(Fredric Jameson)의 발언은 타당한 면이 없지 않다. 이는 제3세계에서는 아무리 개인적인 얘기라 하더라도 개인의 차원에 머물지 않고 집단의 차원으로 넘어갈 만큼 식민주의가 남긴 상처와 후유증이 엄청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물론 아이자즈 아마드(Aijaz Ahmad) 같은 학자가 지적한 바와 같이 다양한 문화와 역사와 이야기들이 존재하는데, 그런 것들을 하나의 틀 속으로 밀어 넣는 것은 지나친 일반화의 오류로 이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오류나 위험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제임슨의 발언은 식민주의를 경험한 사람들이나 민족이나 국가가 식민주의의 여파에 고통당하고 있는 현실을, 그리고 모든 것이 그것으로 수렴되는 애석한 현실을 정확하게 짚어내고 있다는 의미에서 의미심장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식민주의 역사가 외형적으로 종식되었다고 해도 그 폭력의 역사가 끝없이 현재에 그늘을 드리우고 있으니 개인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일 수가 없는 것이다.

많은 경우, 현재의 폭력은 과거의 폭력을 형태와 대상만 달리하여 반복하고 재현한다. 식민주의의 종식이 독재나 영토분쟁, 혹은 인종분규로 이어지지 않은 예를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폭력은 일회성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처럼 흔적을 남김으로써 또 다른 폭력의 온상이 된다.

소말리아의 바이도아에서 태어난 누르딘 파라(Nuruddin Farah)가 발표한 일련의 소설들은 대부분, 이런 맥락에서 보면 크게 무리는 아닐 듯 싶다. 1986년에 발표된 그의 대표작 『지도Maps』는 특히 그렇다. ‘지도’라는 제목부터가 그러하다. 보통의 경우, 지도는 우리가 흔히 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중립적인 데이터에 입각한 것이어서 특이할 만한 것이 없을지 모르지만 이 소설에서는 지도가 유럽식민주의의 입맛에 따라 임의로 만들어지고 조정된 것으로 제시되고 있기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소설이 2차 세계대전 이후에 연합군에 의해 에티오피아에 이양된 오가덴 지역의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지도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 유럽식민주의는 자기들의 이익에 따라 아프리카에 국가의 경계선을 도입했고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그것을 조정했다. 아프리카의 지도를 보면 수십, 수백 킬로미터가 직선으로 되어있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유럽식민주의자들이 얼마나 자의적으로 경계선을 설정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되는 오가덴도 마찬가지였다. 소말리아는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식민 지배를 받다가 1960년에 독립이 되었지만(사실은 전면적인 독립이 아니라 영국령과 프랑스령이 합해져 독립한 것이고 프랑스령과의 합병문제는 이후에 불거졌다), 소말리아인들이 대부분이었던 오가덴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인접국인 에티오피아에 넘어간 후였다. 연합군이 자기들 멋대로 소말리아 사람들이 소말리아어를 쓰면서 살고 있는 그 지역을 에티오피아에 넘긴 결과였다. 달리 말하면 연합군은 자기들 입맛에 맞게 임의적인 ‘지도’를 그린 셈이었다.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의 영토분쟁은 그렇게 해서 시작되었다. 『지도』는 바로 그 영토분쟁에서 비롯된 정체성의 문제를 중심에 놓고 스토리를 전개한다.

소설은 아스카르라는 청년을 중심에 놓고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정체성의 문제로 어떤 혼란을 겪는지를 그의 목소리를 빌려 세세하게 묘사한다. 전통적인 리얼리즘 방식과는 다르게, 특이하게도 화자(아스카르)는 필요에 따라 “너(you)”, “그(he)”, “나(I)”의 목소리를 번갈아 차용해가며 스토리를 전개하는데, 이는 독자가 스토리를 따라가는 걸 때로 방해하기도 하지만 그의 정체성이 불분명하고 분열적인 정체성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상당히 효과적인 서사전략일 수 있다.

아스카르는 소말리아와 에티오피아가 영유권을 주장하는 오가덴에서 태어난다. 그의 친부모는 오가덴에 사는 소말리아인들이었다. 아버지는 독립투쟁을 하다가 죽었고 어머니는 그를 낳다가 죽었다. 그런데 갓 태어난 그를 데려다 키우는 사람이 공교롭게도 소말리아의 적국인 에티오피아에서 온 미스라라는 여인이다. 그렇게 해서 서로 양립할 수 없는 소말리아인과 에티오피아인이 하나의 공간에서 공존하게 된다. 아스카르와 미스라는 서로 떨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된다. 아스카르는 자신을 가리켜 미스라가 “드리운 그림자의 일부”이자 “그녀의 확장된 자아”이고 “그녀의 몸을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라고 하는데, 이는 두 사람이 얼마나 가까운 관계인지를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인위적으로 강요된 국가적, 인종적 정체성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여지없이 무너지는 것이다. 아스카르는 분명히 소말리아인이지만 그를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는 것은 에티오피아 출신의 미스라이기에 경계의 소멸은 불가피한 것이다.

그런데 두 사람 사이에서는 국가적, 인종적 경계선만이 허물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적 경계선까지 허물어진다. 아스카르는 여자들의 세계와 자신을 동일시한다. 실제로 그는 여자들이 매월 그러하듯 ‘피’를 흘리기까지 한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여자”가 살고 있고, 자신이 자기 말이나 생각이 아니라 자신의 내부에 있는 그 여자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까지 한다. 그의 자아(남자) 안에 타자(여자)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소말리아인과 에티오피아인 사이의 경계선이 허물어지는 것처럼 남자와 여자의 경계선도 허물어지는 것이다.

문제는 현실이다. 남자와 여자, 소말리아인과 에티오피아인 사이의 경계가 현실에서 없어질 리가 없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남자와 여자, 소말리아인과 에티오피아인 사이의 성적, 인종적, 국가적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은 아스카르가 성년이 되어 현실세계에 발을 내딛기 전에나 가능한 것이라는 말이다. 경계의 소멸은 결국 한시적인 꿈이나 환상의 세계에 지나지 않는 셈이다. 그리고 그 꿈과 환상의 세계는 결국, 프로이트의 말처럼 ‘현실 테스트’를 거치면서 그런 게 언제 존재했느냐 싶게 거품처럼 사라지고 만다. 남자가 여자처럼 ‘피’를 흘릴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죽이고, 살해하고, 약탈하고, 강간”해서라도 오가덴을 되찾고자 하는 게 현실인 것이다. 그러한 현실 앞에서 성의 구분, 인종의 구분, 국가의 구분이 없는 세계는 꿈이나 환상이나 이데아에 지나지 않는다. “적의 피를 마셔 이루는 복수”가 현실인 상황에서 꿈이나 환상이나 이데아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 그 현실 앞에서는 아스카르도 미스라가 아무리 자신에게 어머니 이상의 존재였다고 해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미스라는 결국 소말리아인들의 타도 대상인 에티오피아인인 것이다.

미스라가 적과 내통을 해서 육백 명에 달하는 소말리아인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혐의를 받고 도피를 하다가 결국 심장이 ‘도려내진’ 시체로 해변에서 발견되는 대목은 피아(彼我)의 구분이 없는 꿈과 환상과 이데아의 세계가 ‘현실 텍스트’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지를 잘 말해준다. 소설에 정확하게 제시되어 있지 않아, 미스라의 죽음에 아스카르가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비유적인 의미에서 보면 아스카르는 “제가 살기 위해서 당신을 죽여야만 해요”라고 어렸을 때 했던 자신의 말처럼 친어머니보다 더 어머니였던 미스라를 스스로 ‘죽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미스라가 실제로 에티오피아 군대와 내통해 소말리아인들을 죽게 만들었는지, 아니면 그녀의 말처럼 억울한 누명을 쓰고 죽게 되었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아스카르에게는 어머니보다 더 어머니인 존재지만 오가덴의 소말리아인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아웃사이더이자 적일 수밖에 없으며, 두 국가가 영유권을 주장하며 서로의 목을 겨누는 상황에서는 아스카르도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등을 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것이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식민주의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이다. 영토분쟁은 결국 식민주의의 유산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아스카르와 미스라의 관계는 개인의 이야기가 아닌 집단의 이야기가 된다. 즉, 소설이 일종의 알레고리라는 말이다. 바로 이것이 제3세계 소설을 집단에 대한 알레고리로 규정한 제임슨의 말이 지나친 일반화만은 아닌 이유일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소설이 누르딘 파라 자신을 위한 알레고리이기도 하다는 사실이다. 파라는 소말리아에서 태어났지만, 스물아홉 살 때부터 다른 나라를 전전하며 일종의 귀양살이를 했다.(이는 그가 쓴 『드러난 바늘A Naked Needle』 때문에 정권의 눈 밖에 난 결과였다) 그는 소말리아에서 살았던 기간보다 더 많은 세월을 소말리아 밖에서 살았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이 소설을 보면, 소말리아어를 쓰는 소말리아인이면서도 에티오피아에 속한 아스카르가 겪는 정체성의 혼란은 작가 자신이 소말리아 밖에서 겪어야 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파라는 영어로 글을 쓰는, 그것도 자국의 독자들이 아닌 서구의 독자들을 향해 글을 쓰는 작가였다. 영어로 글을 씀으로써 국제적인 명성을 얻는 덴 성공했을지는 몰라도 그는 정작 자신의 글을 읽어야 하는 소말리아 독자들을 위해 글을 쓰는 덴 실패한 셈이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야기를 복잡다단한 포스트모던 서술방식으로 풀어내는 것도 그가 겨냥하는 독자층이 소말리아가 아니라 외부에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지도』는 포스트모더니즘을 비롯한 당대 문학의 흐름에 친숙해있는 독자들이 아니라면 읽어내기가 어려운 소설이다. 스토리 자체는 그다지 복잡할 것도 없지만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소설 형식에 식민주의, 여권주의, 인종주의, 국가주의에 관련된 담론이 복잡하게 펼쳐져 있어서, 평범한 독자들이 소화해내기 어려운 포스트모던 소설이 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파라는 데렉 라이트(Derek Wright)가 지적한 것처럼 “완전한 포스트모더니스트”인지 모른다.

그런데 아프리카 출신의 작가가 “완전한 포스트모더니스트”로 분류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는 곰곰이 생각해봐야 할 대목이다.(라이트가 사용하는 “완전한(thoroughgoing)”이라는 말은 치누아 아체베(Chinua Achebe)가 조지프 콘래드(Joseph Conrad, 1857~1924)를 가리켜 “완전한 인종차별주의자”라고 하면서 사용했던 “완전한”이라는 형용사를 연상시킨다. 거기에서 “완전한”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였음은 물론이다) 어쩌면 파라는 남아프리카 출신의 작가인 존 쿳시(J. M. Coetzee)가 등장인물의 입을 빌려 제기한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을 듯하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Elizabeth Costello』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아프리카 소설가들은 아프리카에 관해서, 아프리카적 경험들에 대해서 쓸 수는 있지만 그들은 글을 쓰는 내내, 그들의 어깨너머로 그들의 작품을 읽어줄 외국인들을 흘깃흘깃 바라보고 있는 것 같아요. 그들은 좋든 싫든, 그들의 독자들에게 아프리카를 해석해주는 해석자의 역할을 받아들이고 말았어요.” 『지도』에 드러나는 파라의 역할이 때로, 소말리아 밖의 독자들에게 소말리아를 해석해주는 “해석자의 역할”로 비치는 것도 어쩌면 이러한 이유 때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