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아인 타이 저, 최하나 역, 『섬 위의 여자』(인천문화재단, 2010.4)

ⓒ인천문화재단│2010
프랑스가 베트남에 들어온(1859) 이래 베트남의 근현대사에서 섬은 유배지의 상징이었다. 독립을 찾으려고 투쟁했던 수많은 항불 인사들이 가깝게는 베트남 남부의 뿔로꼰도르 섬, 멀게는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의 레유니옹, 까이엔느 섬 영화 <빠삐용Papillon>(1973)의 배경이 되는 곳이 이 부근임으로 끌려갔다. 그것은 단절이었다. 그러나 섬에서 유형수들은 억압 받는 복수(複數)였고 연대했다. 섬으로 유배되었던 반불 인사들은 그곳에서 학습하고 투쟁하다가 귀국해서는 더 강력한 투쟁가로 변신해 결국 승리를 쟁취해냈다. 그래서 섬은 단절의 유배지이자 궁극적 승리로 가는 희망의 수태지(受胎地)이기도 하다.
『섬 위의 여자』(1988년 출간)에서는 베트남 역사 속 섬의 이미지가 오롯이 그려지고 있다. 소설의 시간적 배경은 1980년대 전반이다. 나무 기름을 쪄내는 깟박 섬베트남 북동부에 위치 내 비엣 화 지역의 5반 임업 가공장은 고도(孤島)의 수용소나 다름없다. 이곳과 임업장 본부 사이에는 세 시간이나 걸어야 통과할 수 있는 짙은 정글이(이곳에서 길을 잃은 5반 소속 여성 노동자 히엔이 몇 달 뒤에 해골로 발견되기도 한다) 가로 놓여 있고 반대편 서쪽 능선은 절벽으로 이어진다. 5반 작업장에는 스물한 살부터 마흔네 살까지 서른여덟 명의 여자들이 있다. 한 명만 빼놓고 모두 독신이다. 죄수들은 아니다. 여자들은 신분상 자유인이고 노동자들이다. 그들 중 일부는 전쟁 기간 청년돌격대1 일원으로서 활동하기도 했고, 전쟁 후에 직업으로 이 일을 선택한 사람들도 섞여 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여자들은 외부와 거의 차단된 채 살고 있는 중이다. 이들을 묶는 연대 의식의 기저는 갈망이다. 여자들은 은밀히, 갈망을 충족할 방법을 찾아내고 공유하며 그 과정에서 씩씩한 투쟁도 전개한다.
무엇을 향한 갈망인가? 남성에 대한 성적 욕구이다. 이는 희망의 다른 표현이다. 작가가 몇몇 여자의 입을 통해서 드러내는 근원적 갈망은 자식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청년돌격대 출신 미엔의 비통한 절규를 들어보자.
“그때 (전쟁 기간 동안) 우리는 적을 이겨야 한다는 목표, 평화로 향하는 목표 한 가지 밖에 없었습니다. 평화가 오면 행복, 남편, 자식…전부 생길거다…미군과 싸울 때, 우리 옆에는 삶과 죽음이 있었고 본능적인 갈망을 억제할 수,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정말 잊을 수가 없습니다. 저는 속으로 제 자신에게 나이를 넘겼으니 다 끝났으니, 더 이상 누구에게도 시집갈 수 없다고 말하지만 자식 하나만 있다면 얼마간 위로가 되어서 괜찮겠다고 생각합니다.”
가족 간 유대 의식이 유난히 강한 베트남인에게 자식은 현재의 삶이 영원으로 이어지게 하는 매개이며 세계 어느 민족보다도 조상신 숭배 의식이 강한 베트남인에게 자식은 저승과 이승을 이어주는 끈이다. 섬 위 여자들의 갈망은 자식이 없어 혼자 늙어가다가 향불 하나 피워 주는 이 없는 고혼(孤魂)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벗어나려는 몸부림인 것이다. 하지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더 근원적인 갈망은 섬으로 비유되는 숨 막히는 단절의 사회주의 통제경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갈망이 아닐까 한다. 1979년까지 프랑스, 미국, 캄보디아, 중국과의 전쟁으로 유지되던 사회적 긴장감이 이완되면서 사회주의 체제의 비효율성이 도처에서 드러나기 시작했고 국제적으로도 고립되어 가는 가운데 베트남은 점차 침몰해 가고 있던 중이었다. 베트남이 시장 경제로 방향을 틀기로 결정한 것이 1986년이니 『섬 위의 여자』가 그리는 시기는 변화에 대한 갈망으로 사회 전체가 부글거리던 때였다. 작가는 그 시대적 분위기를 섬 이야기를 통해서 절묘하게 짚어내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현재의 이야기와 과거에 대한 회상이 주기적으로 왕복한다. 전체 여덟 장의 구성 중에서 현재의 이야기는 1, 3, 5, 7장이다. 나머지 2, 4, 6장은 지나간 이야기이다. 마지막 8장에서 현재와 과거가 합일된다. 현재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1980년대 전반기에 깟박 섬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베트남의 변화 조짐을 관측하며, 회상의 장들 속에서 베트남인이 겪어낸 근현대사의 자취를 배운다.
소설 내용의 흐름은 완벽한 이중 트랙이다. 한 트랙은 인간의 본성, 또 다른 트랙은 역사의 흐름이다. 도입부에서 소개되는 부녀 강간, 밋(mit, jack-fruit) 두 개와 죽순 하나로 상징되는 남근, 그 비릿한 전설이 배어 있는 깟박 섬에서 유배나 다름없이 생활하는 여자들의 성적 욕구, 그들의 상대가 되어 주려는 듯 나타난 20대 초반의 청년 뜨엉, 뜨엉과 뜨엉 동료 숨죽이며 바라보는 암컷 바다거북이의 엄청난 배란, 모래사장 또는 바닷가 동굴 속에서의 남녀 교합과 임신 등이 한 트랙을 채우는 요소들이다. 다른 트랙에서는 19세기 ‘의용군’2 의 항불운동, 반역자 처단, 미국과의 전쟁, 캄보디아에서의 전쟁 등이 소설 속 인물들의 배경으로 슬쩍슬쩍 소개되면서 역사와 현재의 유기적 관계가 끊임없이 상기된다. 두 개의 트랙을 통해서 작가는 정치적 또는 경제적 변화의 염원을 성적 갈망에 비유하면서 그 원초적 본능으로서의 건전성과 불가피성을 암시하고 있다.
변화를 추구하는 세력이 베트남 근현대사에서 ‘정의’의 편에 섰던 주체들이었다는 설정은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변화의 역사적 정당성이 확보된다.
먼저, 여자들의 성적 갈망을 해결해 주는 뜨엉을 보자. 그는 하노이에서 대학을 다니던 미술학도였다. 순수한 영혼의 소유자로서 누구에게나 친절한 20대 초반의 청년이다. 소설의 기술에 의하면 “아버지는 장교로, 1978년 이웃나라 전장에서 전사했다”고 하니 베트남과 캄보디아 간의 ‘민족적’ 무력 충돌이 있었을 때의 희생을 가리킨다. 장교였으니 아버지의 군 경력은 통일 이전 항불, 항미 전쟁 시기까지 닿을 것이어서 출신 성분으로 볼 때 뜨엉이란 인물의 역사적 정통성은 충분히 확보된다. 그는 충격적인 실연을 당하고 무너진 몸과 마음을 추스르느라 깟박 섬으로 들어와 국영 수출회사 직원으로 취직해 바다거북이 사육 관리인으로 일하게 되었다. 뜨엉의 작업장은 깟박 섬에서 한 차례 더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 보방 섬이었다. 이곳에서 그는 혼자 지낸다. 여자들이 있는 5반 작업장과 뜨엉이 있는 보방 섬은 서로 멀리 바라보이는 곳이다. 남녀 사이는 절벽과 바다로 가로막혀 있었으나 성에 대한 갈망은 여자들로 하여금 절벽에 길을 내게 하고 뜨엉은 나룻배로 바다를 건너 두 성(性)은 하나가 된다. 이런 행위의 불가피성은 앞서 소개한 청년돌격대 출신 미엔의 항변으로 옹호된다.
또 다른 주인공 화는 30세의 독신으로서 뜨엉이 일하는 회사의 젊은 사장이다. 그는 사려 깊고 친절하며 경영 능력이 뛰어나다. 사람들의 과거는 묻지 않고 능력과 성실도로만 평가하며 직원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줄 안다. 뜨엉으로 하여금 이성과 자제의 미덕을 잊지 않게 하는 것도 화의 몫이다. 그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잃고 작은아버지 집에서 성장했다. 작은아버지 찐 씨는 결함이 없어 보이는 인격의 소유자이다. 시를 즐길 줄 아는 감성과 지성도 지녔다. 그의 직업은 작품 속에서 확실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우리는 그로부터 베트남의 이상적인 지식인상의 냄새를 맡는다. 이 지식인상에는 소설의 초입에 소개되는 반불 운동의 지도자 딴 투엇 같은 유학자의 이미지가 드리워진다. 화는 찐이고 찐은 화이다. 경제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화는 합리성을 앞세운 경영을 통해서 무너져가는 회사를 회생시켜 성공적으로 이끌고 있다. 그의 새로운 경영 방식은 당의 의혹을 받아 사장직에서 쫓겨날 위기에 몰리지만 빛나는 조연들-특히 전쟁 때 최전선에서 싸웠던 수중특공대 출신이자 사회주의체제에서 가장 숭고한 직업인 노동자로 일하는 -의 적극적 변호로 경영에 복귀하여 변화를 주도한다. 이쯤에서 우리는 19세기 항불 투쟁으로부터 1960~1970년대의 전쟁/혁명을 거쳐 1980년대 시장 경제로의 전환에 이르기까지의 역사가, 또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일계적(一系的) 흐름 위에 위치한다는 작가의 메시지를 눈치 챌 수 있다.
이 작품은 영어, 불어로도 번역되어 있다. 서양 세계에 번역된 베트남 문학작품들에는 1975년 이후 베트남 사회의 어두운 면모들에 대한 고발이 많다. 『섬 위의 여자』에서도 우리는 서양 독자들을 만족시켜 줄 만한 요소들을 꽤 발견한다. 암시장, 참전여성들의 비극, 아직도 만연한 미신, 하노이의 깡패, 관리들의 탐욕과 부정, 사회주의 체제의 허술한 경제 운용, 심지어 당의 무능에 대한 암시까지 미국이나 프랑스인들로서는 베트남의 승리가 초래한 값비싼 대가들을 보면서 자신들의 베트남 개입이 옳았다고 생각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구미와 한동안 한 편에 섰던 한국인들에게도 일정 정도 마찬가지의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그래서 어두운 면모를 엿보는 재미가 물론 쏠쏠하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이 작품이 우리에게 흥미로울 수 있는 진짜 이유는 역사와 현실, 갈망과 제어라는 기본 구도 속에서 일관되게 흐르는 진지함과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노래되는 희망 때문일 것이다. 베트남과 매우 유사한 역사와 문화 전통을 갖고 있는 한국인의 정서는 식민국 구미보다는 피식민지 베트남과 훨씬 가깝다. 어그러진 것을 고치려고 노력하고 피 흘리는 투쟁을 마다하지 않는 전통도 매우 유사하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베트남도 싸우고 있었고 우리도 싸우고 있었다, 변화를 위해서 역사를 위해서.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것은 온갖 갈등과 좌절, 싸움 속에서 분투하는 옳은 자들에 대한 애정과 신뢰이다. 아울러 그것은 역사가 바른 길을 짚어 가길 바라는 갈망이며 과거와 현재의 정의롭고 행복한 조우를 추구하는 꿈이다. 이런 꿈은 1980년대 우리의 것이기도 했으며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저류하는 포기할 수 없는 힘의 근원이 아니던가?
투박한 번역, 오자 등이 여기저기서 독자의 눈을 거슬리게 할 것이 걱정된다. 구미 및 중, 일 문학에서 보이는 번역문학의 노력 및 재빠른 발전의 기운이 얼른 베트남 문학에도 파급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정도라도 해 낸 번역자의 노력과 능력이 귀하게 느껴지고 이런 작업을 지원하는 인천문화재단의 관심이 고맙다.
#저자 약력
崔秉旭 1961년 충남 아산생. 인하대 사학과 교수. 주요 저서로 『동남아시아사-전통시대』, 『베트남 근현대사』 등. choibyungwook@inha.ac.kr
#주석
1 베트남어로는 타인 니엔 쑹 퐁(Thanh Nien Xung Phong, 靑年衝鋒). 미국과의 전쟁 기간 약 150만 명의 여성들이 전쟁에 참가했는데 그중 15만 명 정도가 청년돌격대원으로 활동했다. 베트남 전쟁이 한창일 때 17~20세의 젊은이로 조직된 이 단체는 대부분의 구성원이 여성이었다. 이들의 임무는 원활한 군사작전을 위한 전방 지원이었다. 특히 남북 약 1,000킬로미터에 이르는 호찌민 통로의 건설과 유지, 복구는 이들이 흘린 피의 결과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번역문에서 사용되는 어휘 ‘의용군’은 근왕군(勤王軍)을 지칭한다. 1883년 베트남 황제는 황궁을 탈출해 전국에 근왕의 조서를 내렸다. 이 근왕령에 호응하여 주로 유학자들이 주도하는 반불투쟁이 전개되었으니 이를 근왕운동이라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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