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잊지 말아요.’ 물망초의 꽃말. 연인에게 꽃을 꺾어주려다 물에 빠져 죽은 남자가 외치는 말. 그 남자는 사라졌지만 그의 말은 남아 꽃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다. 우리가 그의 바보 같은 사랑을 기억하는 이유는 죽음과도 맞바꿀 수 있는 사랑의 정념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했던 사람의 기억에서 지워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의 감정과도 연관이 있다. 죽음이 가혹한 이유는 ‘나’라는 존재가 세계에서 없어진다는 필연 때문일 것이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자신이 불멸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잊고 살아간다. 불현듯 자신이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임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현존마저도 의심하고, 그것을 입증하기 위해 무언가에 매달린다. 이런 맥락에서 영화 <시>의 알츠하이머를 앓는 주인공 미자가 시(詩)를 쓰는 행위는 곧 다가올 부재를 앞두고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자신을 입증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렇다면 미자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로 존재하는 것일까.

<시>는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묻는 영화이자 아름다움과 윤리가 혼효하는 시대의 시와 예술의 의미에 관해 묻는 영화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영화는 존재하는 것과 부재하는 것들에 대해 고민하게끔 한다. 미자는 어디로 사라졌는가 하는 부재에 관한 의문을 시작으로, 에필로그의 여학생은 과거의 모습인가 아니면 현전(現前)인가 하는 존재에 관한 물음으로 이어진다.

영화 후반부에서 손자가 연행되는 장면은 모호하게 처리된다. 이 장면은 피해자와 가해자 간의 합의가 결렬됐음을 의미한다. 김 형사가 등장한 것으로 보아 미자가 손자를 신고한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녀의 변심으로 ‘중학생들의 윤간으로 인한 여학생의 자살사건’은 세상에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에필로그에서 여학생이 부활하는 장면은 의미심장하다. 미자는 최후까지 보호자로서 역할을 다하다가 결국 혈연이라는 공동체적 의무를 지워버리고 고의적으로 사라진다. 결과적으로 그녀의 행위는 자신을 공동체 내에 부재하게 함으로써 죽은 타자(여학생)를 존재하게 한 것이다. 이 대목은 ‘타자를 목적으로 대하여 자유로워지라’는 칸트(Immanuel Kant, 1724~1804)의 지상명령을 떠올리게 한다. 미자는 자신에게 전가된 죄의식을 가해자 본인에게 되돌림으로써 책임의 분산을 막은 것이다. 여기서 영화는 그녀를 비로소 자유롭게 하는 것은 시를 쓰는 행위라고 말하는 듯하다.

시인(김용택)의 말대로라면 시를 쓰기 위해서는 제대로 보아야 한다. 아름다운 것들만 시의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던 미자는 가해자 부모들의 비윤리적인 면모, 노인(김희라)과 손자의 성적 욕망, 김 형사의 농지거리 등을 보면서 두께를 가진 인간의 실체를 확인한다.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시를 쓰기 위해 대상을 제대로 보는 일은 고통스럽다. 보기에 아름답다고 해서 진정 아름다운 것이 아님을, 아름다운 것만이 시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깨닫기에 이른다.

대상의 아름다움을 판단할 때는 대상의 인식적 측면(참/거짓)과 윤리적 측면(선/악)을 괄호 속에 넣어야 한다. 미자의 경우 여학생의 자살사건에 대해 사건이 실제인지를 확인하고(인식), 손자에게 책임을 추궁한(윤리) 후 종국에는 그 사건에 대한 시(미)를 쓴다. 그녀의 판단체계는 보통 사람들처럼 동시적이거나 복수적이지 않고 순차적이면서 단면적이다. 이는 그녀가 알츠하이머로 인해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미자가 시를 쓰지 못하는 이유는 동시적으로 존재하는 다른 측면들을 괄호 속에 넣지 못하고 지워버리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지우기 능력은 그녀가 시를 쓰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한다. 그녀는 여학생의 자살사건에 대한 인식적 측면과 윤리적 측면을 지우고 자기 자신과 대상(손자)과의 관계마저도 지워버린다. 그리고는 자신을 지운 텅 빈 곳, 여학생이 죽은 자리에서 시를 쓰기 시작한다. 그녀의 노트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은 죽은 자의 말이고 그녀에게는 시어(詩語)다.

시를 ‘나타난 것의 사라짐을 영원히 고정시키는 것’이라고 정의한 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견해에 동의한다면 미자는 자신을 지우고 사라진 타자를 존재하게 함으로써 시를 쓰는 자(者)다. 그녀는 없지만 그녀의 언어는 남아서 영원히 고정되고 시가 된다. 시가 무엇인가를 고정시킨다면 영화는 지나가는 것들을 담아낸다. 에필로그에서 미자가 불러낸 여학생의 영혼이 우리를 향해 돌아본다. 미소 띤 것인지 체념한 것인지 알 수 없는 표정. 여기서 화면은 고정된다. 이것은 일종의 판타지다. 여학생의 표정을 볼 수 있는 자는 지상에 없다. 그녀는 돌아보지 않았을 것이다! 미래의 일을 고정시키는 것은 어쩐지 영화적이지 않다. 하지만 우리로 하여금 영화의 윤리에 대해 고민하게 한다. 영화 <시>는 시가 하는 것을 영화도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영화의 의미를 확장한다. 지워진 사건들을 고정시키고(시), 그것을 다시 재생시켜서(영화) 사건을 제대로 보기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사라졌던 배우들(윤정희, 김희라)의 부활한 맨몸은 존재성과 부재성을 동시에 가진 이중적 신체다. <시>는 이를 통해 죽은 사건을 부활시키려 한다. ‘변하는 법이 없는 죽은 자’를 부활시켜 ‘살아있는 자’들을 변화시키려는 것일까.

영화 <시> 포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