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어로 ‘지혜의 바다를 가진 자’를 의미하는 달라이 라마(Dalai Lama)는 티베트(Tibet)의 종교적 수장이자 정치적 지도자에게 주어지는 칭호다. 달라이 라마는 세습되거나 투표로 선출되는 것이 아니라 전임 달라이 라마가 열반하면 그 환생자를 찾아 옹립(擁立)한다. 티베트인들이 달라이 라마를 일컫는 칭호는 다양한데 그중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 감독의 영화를 통해 널리 알려진 것이 쿤둔(Kundun), 즉 살아있는 부처라는 뜻이다.
비폭력 평화주의자로 198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한 달라이 라마 14세 텐진 갸초(Tenzin Gyatso)는 오늘날 티베트뿐만 아니라 세계인의 정신적 지도자로 절대적인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다. 왜 세계인들은 그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따르는 것일까. 달라이 라마의 24시간을 공개한 최초의 다큐멘터리 <선라이즈 선셋Sunrise/Sunset>은 바로 이러한 물음에서 출발한다. 푸틴(Vladimir Putin), 옐친(Boris Yeltsin, 1931~2007),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등 유명한 정치가들의 다큐멘터리 시리즈를 제작한 러시아의 감독 비탈리 만스키(Vitaly Mansky)의 인터뷰에 따르면 “인도 히말라야산맥 자락의 한 작은 사원에 있는 사람의 말에 왜 세계적 지도자들이 귀를 기울이는지, 집에 혼자 있을 때 그는 정말 어떤 사람인지를 알고 싶었다”고 한다. 그리고 1년 동안의 끈질긴 구애 끝에 달라이 라마를 직접 알현(謁見)했고, 단 1분 만에 촬영 승낙을 받았다고 한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시선은 종교적인 메시지를 포함해 달라이 라마가 말하는 모든 것을 객관적 거리를 두고 관찰할 뿐 어떤 것도 강조하지 않는다. 감동을 유도하는 음향과 영상 효과를 배제하였으며, 어느 입장을 대변하거나 선동하지도 않았다. 이는 마틴 스콜세지 감독의 <쿤둔>(1997), 하인리히 하러(Heinrich Harrer, 1912~2006)오스트리아의 등반가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장 자끄 아노(Jean-Jacques Annaud) 감독의 <티벳에서의 7년Seven Years In Tibet>(1997) 등 달라이 라마를 다룬 기존 작품들과는 다른 조명 방식이다. 비탈리 만스키 감독의 <선라이즈 선셋>은 달라이 라마의 존재를 신비주의와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으로 거창하게 풀이하거나 티베트의 역사적 비극을 자극적으로 보여주기보다는 일출에서 일몰까지 달라이 라마의 꾸밈없는 일상을 담고자 했다.
영화의장면들
영화는 도로와 철도를 빠르게 따라 달리며 인도와 중국, 러시아로의 여정을 차례로 보여준다. 세상의 숨 가쁜 흐름에서 비껴난 듯 고요한 달라이 라마의 사저(私邸)에서 멈춘 화면에는 시계 초침소리만이 가득하다. 티베트 승려들이 아침채비로 분주한 가운데 새벽 3시, 달라이 라마가 어둠 속에서 나타난다. 여느 할아버지처럼 속옷차림과 맨발로 러닝머신 위에서 땀을 흘린 그는 신성한 오체투지 기도와 명상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양치질을 하거나 아무데서나 구두를 벗고 차를 마시는 모습, 문득 TV채널을 돌리던 중 자신의 BBC 인터뷰 방송이 나오자 표정이 왜 저러냐며 폭소하는 모습, 떠나는 이를 배웅하며 몇 번이고 뒤를 돌아보는 모습 등 달라이 라마의 진솔한 면면이 드러난다. 위대한 종교 지도자의 이러한 일상적 풍경은 우리도 이미 알고 느끼고 경험하고 있는 것들이다. 즉 평범한 일상이 진정 위대한 삶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한편 달라이 라마가 자신의 사저를 지키고 있는 인도인 경비원을 굽어보며 소탈하게 인사를 건네는 장면에서는 ‘비폭력의 상징이 무장 경호를 받아야만 하는 역설적인 세계’에 대한 비감이 전해지기도 한다.
영화<선라이즈 선셋> 포스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라이 라마는 삶에 대한 따뜻하고 유쾌하고 현실적인 태도를 잃지 않는다. 대다수 사람들에게 가장 호소력 있게 다가오는 것은 복잡한 철학 문제보다, 승려로서의 본래 모습보다 더욱 눈에 띄는 그의 인간적인 모습일 것이다. 바쁜 하루를 보내는 틈틈이 감독과 나누는 대화 속에서는 받아 적고 싶은 잠언들이 쏟아져 나온다. 때로는 유머러스한 담론이 오가기도 한다. 고난과 시련으로 점철된, 티베트의 과거와 미래라는 무거운 운명의 짐을 짊어진 그의 일상은 외려 미소와 여유로 가득하다. 이처럼 외부에 의해 정복되지 않는 내면의 행복에 대한 달라이 라마의 실천은 삶은 고통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게 인류라는 연대와 더불어 위로와 공감대를 형성한다.
그러나 티베트 민중의 정치적 지도자인 달라이 라마의 최고 선결 과제는 티베트의 해방이다. 오로지 힘의 논리에 의거하는 강자의 폭력에 대해 약자들이 비폭력을 부르짖는 태도는 단지 이상적인 방법으로 비춰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달라이 라마는 “사랑과 자유, 진리, 정의를 향한 인간의 근본적인 성향이 마침내 널리 퍼질 것”이라는 믿음을 저버리지 않는다. 종교적 논리의 동의 여부를 떠나 사람들의 마음을 진실로 움직이는 것은 평화와 비폭력 투쟁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신념은 실제로 티베트의 독립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와 전폭적인 지지를 얻고 있다. 누구에게나 고통에서 벗어나 행복할 권리가 있다는 인류의 근원적 가치를 수호하는 달라이 라마와 이를 실재적인 삶 속에서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티베트인들의 행보가 고난이라는 현상을 넘어, 전 세계에 잔잔하고도 깊은 공명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전쟁과 환경파괴 등 인류문명을 위협하는 대재앙들을 맞닥뜨린 이 시점에서 온정과 분별력 있는 인간성을 옹호하는 그의 가르침은 새로움보다는 진정성으로서의 의미 있는 울림을 전한다.
영화의 한장면
영화의 말미에서 달라이 라마는 이렇게 말한다. “태양은 아침에 떠올랐다 금세 져버린다. 태양은 평생 떠있는 것이 아니다. 허나 떠 있는 동안은 많은 도움을 준다. 우린 그 짧은 빛을 충분히 즐길 수 있다.”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는 법, 죽음은 그저 낡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던 그가 새벽의 어둠 속으로 걸어가는 뒷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영원할 것 같은 하루는 저물어간다. 윤회론(輪廻論)에 따르면 그는 지금 열네 번째 생을 살고 있다. 시작도 끝도 없는 생을 살고 있는 76세의 달라이 라마. 그의 존재를 곧 희망의 증거이며, 조국의 미래로 여기는 티베트인들은 그가 열반에 드는 날을 상상할 수 없다고 한다. “나는 단지 평범한 승려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하는 그에게도 언젠가는 낡은 옷을 벗어야 하는 날이 올 것이다. 고향을 잃은 티베트인들의 순례는 어디까지일까. 윤회를 믿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이든, 티베트인들은 그들의 태양이 비추는 방향을 따라 그들이 돌아가야 할 길로 향하고 있다. 달라이 라마 14세는 새로운 환생자가 그 임무를 완수하리라고 믿는다.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의 지지 않는 태양이기 때문이다.
#저자 약력
李惠仁 1985년 서울생. 프리랜서 여행기고가. 최근 글로 「디디의 세계여행-네팔, 티베트편」, 「당신의 모든 것, 나의 모든 것」 등. fiveminutes@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