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꾸기 어려운 시대다. 어른들은 물론이고 아이들조차 경쟁에 내몰린 지 오래다. 현실이 치열해지면서 꿈과 환상은 거추장스러운 아이들 장난감처럼 취급될 뿐이다. 하지만 사실 꿈과 환상은 우리가 맹신하는 현실의 논리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드러내고, 굳어진 인식의 틀에 균열을 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이 꿈과 환상을 잃고 있다는 것은 그 사회가 변화에 대한 추동력을 상실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연극의 한 장면

그러나 적대적인 것마저 먹어 치우는 탐욕스러운 자본 앞에 꿈과 환상이란 그저 과거의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단어로 전락해버렸다. 그렇게 박제화된 환상은 문화상품으로 소비된다. 이런 경우 환상은 사람들의 인식을 무디게 하고 현실을 회피하도록 만드는 퇴행적인 역할에 머문다. 비록 오늘날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분야에서 꿈과 환상을 그린 작품들이 쏟아지고 있지만 박제화된 환상이 아닌 우리가 무의식 중에 사로잡혀있는 프레임에 균열을 내고 새로운 사유로 우리를 이끄는 환상을 그려내는 작품이 흔치 않은 까닭이 여기에 있다. 그리고 여기 환상을 이야기하는 한 편의 연극이 있다.
연극 <환상동화>에서 피아노 연주자인 남자 주인공은 전쟁터에서 시인인 적군과 친구가 되지만 폭격을 맞은 그는 귀가 멀고 시인은 죽는다. 주인공은 제대 후 전선을 넘어 시인의 여동생을 찾아가고, 눈 먼 댄서인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이 극은 시, 음악, 그리고 춤이 주인공의 사랑을 현실과 매개하는 환상으로 만들어내는 모습을 통해 예술이, 그리고 이 연극이 이상과 현실을 잇는 매개로서 기능하는 것을 보여준다. <환상동화>는 다소 상투적인 플롯을 조율하면서 극과 관객을 잇는 장치로 세 광대─전쟁·사랑·예술광대─를 배치한다. 전쟁광대는 현실, 사랑광대는 이상을 상징하고, 예술광대는 현실과 이상의 가교를 상징한다. 세 광대는 단순히 등장인물의 역할을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야기의 내용을 결정하고 관객에게 극을 직접적으로 설명한다. 그들이 지시문을 읽으면 남녀 주인공은 그 지시에 따라 연기한다. 세 광대는 배우이자 무대 위의 극작가이면서 연출가이기도 하다. 즉 <환상동화>는 일종의 메타 연극인 셈이다. <환상동화>는 이를 통해 희곡이라는 텍스트가 연극으로 재현되는 과정을 사유함으로써 연극의 환상성을 끄집어낸다. 그러나 이 연극이라는 환상이 관객의 눈앞에 재현되는 과정을 드러내어 극의 주제를 강화하기보다 텍스트와 재현의 엇갈림을 단편적인 희극적 소재로 활용하는 것에 머무른다. 이로 인해 발화된 지시문은 연극의 환상성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연극을 도리어 텍스트로 되돌려버린다. 그럼으로써 관객의 능동적인 상상력을 제어하는 역효과를 가져오고 만다.

만약 이 연극이 스스로에게 부여한 역할인 현실에서 이상으로 넘어가는 가교, 즉 환상의 역할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세 광대 중 가장 중요한 인물은 예술광대일 것이다. 예술광대는 환상, 예술 그리고 이 연극 자체의 상징이며, 이들만이 사랑이라는 가능태를 현실태로 만들 수 있(다고 이 연극이 주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술광대는 다른 두 광대에 비해서 좀처럼 특징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역할도 애매모호하다. 이는 결국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극이 충분히 조응하지 못함을 의미한다.

이렇게 극 속 환상이 생동감을 충분히 얻지 못하자 결국 사랑에 대한 공허한 외침만이 남은 듯하다. 상식적 교훈주의와 플롯의 상투성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인지 <환상동화>는 예상치 못한 지점에서 극을 해피엔드로 마무리 짓는다. 이러한 결말은 분명 의외이기는 하나 무책임하다는 인상을 지우기 힘들다. 여주인공이 여전히 시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남주인공은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한 채로 극이 끝난다. 이는 앞으로 주인공들에게 닥칠 필연적인 비극을 외면하고 도피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환상동화>가 말하는 환상이란 현실을 변화시키는 힘이 아니라 잠시 현실을 잊게 만드는 최면제에 불과해진 셈이다.

연극<환상동화> 포스터

이미지 제공_ 대학로문화공간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