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한 기념의 해
방금 받은 우편물 더미 속에 한 장의 CD가 들어있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문화축제 개막식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올해 모스크바 볼쇼이 극장에서 열린 한국 문화예술 공연행사를 담은 영상물인데 CD 겉장에는 20이라는 숫자를 귀여운 인형모양으로 형상화한 로고가 그려져 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2’자는 족두리 쓴 한국의 새색시 인형 모습을, ‘0’자는 러시아의 마트료쉬카(Matryoshka) 인형 모습을 담고 있다. 그러고 보니 이제는 목각인형 안에 같은 모양의 더 작은 인형들이 차례로 들어있는 구조를 가진 마트료쉬카가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러시아 전통문화의 아이콘이 되어있다. 1990년 이전의 양국관계의 분위기를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는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변화가 아닐 수 없다.

1990년 9월에 두 나라가 수교했을 때 러시아는 소련이라는 나라의 핵심적 공화국이었고, 그래서 당시 두 나라의 수교는 한·소 수교라 불렸다. 1991년 12월 말 소련이 해체되면서 러시아가 소련의 계승국이 되었고 한·소 수교는 한·러 수교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다. 1884년의 조로수호통상조약(朝露修好通商條約)에 이은 두 번째 수교이되,1 공화국들 간의 수교로는 첫 번째 것이다. 더욱이 2009년과 2010년은 ‘동유럽’ 여러 국가들과의 수교를 기념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냉전 시대의 기억
6.25전쟁 후 반공을 국시로 삼는 체제 아래 살아온 한반도 남쪽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소련이라는 이름의 나라는 오랫동안 적대진영의 종주국이라는 이미지로만 비쳤고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다. 소련 사람들도 군사정권 지배 아래 있는 한국을 경시하고 적대시했다. 

20세기 후반 국제관계의 특징을 한 마디로 규정한다면 바로 동서냉전(東西冷戰)이라고 할 수 있다. 2차 대전 이후 세계 질서는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자본주의권과 소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주의권으로 나뉘었다.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 소련은 미국과 더불어 양대 초강국의 하나로 세계를 양분하고 유럽에서는 동독과 그 동쪽 유럽국가들을, 아시아에서는 몽골과 북한을 자신의 영향권 아래 두었다. 1949년에는 중국 공산당 정부가 수립되었는데 소련과 중국은 굴곡진 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중심의 정치·군사 동맹관계에 편입된 한국은 사회주의권 국가들과는 전혀 교류할 수 없었다. 양자는 서로 완벽한 타자로서만 존재했다. 한반도에서 한국이 유일한 합법정부이며, 북한과 수교한 국가들과는 외교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 문화축제 포스터


비슷한 사례는 서독의 경우에서 찾을 수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2차 대전 이후 분단되었던 독일의 경우, 1949년 정부 수립 이래 기민당(CDU)을 중심으로 하는 보수정당이 집권하던 시기 이른바 할슈타인 원칙(Hallstein Doctrine)을 천명하여 동독과 외교관계를 수립한 나라들과는 수교하지 않았다. 유일한 예외로 소련과 외교관계를 형성했을 뿐이다.

그러나 1960년대 말 사민당(SPD)이 주도하는 연정이 형성되면서 사정이 달라졌다. 빌리 브란트(Willy Brandt, 1913~1992) 총리는 새로운 동방정책(Ostpolitik)을 내걸고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서독은 할슈타인 원칙을 폐기하고 1970년 모스크바 조약, 바르샤바 조약을 맺은 데 이어 동독과도 관계개선의 길에 나섰다. 1972년에 동서독기본조약을 체결하여 동서독의 상호인정, 교류·협력의 길을 본 궤도에 올려놓았다.

한국에서는 1980년대 대부분의 시기에도 소련, 중국은 물론 동유럽 국가들과 아무 교류가 없었다. 1983년에는 소련 영토에 잘못 들어갔던 한국 KAL기가 소련군에게 격추당하여 탑승자 전원이 사망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 1980년대 후반부터 전기가 찾아왔다. 계기는 두 가지였다. 소련 공산당의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 서기장(나중에는 대통령도 겸임)이 주도한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 정책이 그 하나요, 대외정책에서 방향전환을 요청하는 한국 내부의 지적, 정책적 흐름이 다른 하나였다.
     
사회주의권의 변화 
1985년 봄에 소련 최고 권력자의 자리에 오른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는 대내적으로 사회주의의 개혁을 지향하면서 대외적으로도 냉전 극복을 위한 새로운 노선을 표방하는 포괄적 정책구상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국제관계 구상을 『새로운 사고Novoe myshlenie』라는 제목의 책으로 정리하여 세상에 내놓았다. 그는 군사적 대립의 완화, 군비감축, 평화증진을 제안했고 유럽에 대해서는 동서유럽의 구분을 넘어서서 유럽 공동의 집을 짓자고 제안했다. 또한 계급적 가치보다 인류 공동의 가치가 더 중요하다는 견해를 표명했다. 그의 제안에 따라 얼어붙은 듯한 냉전적 분위기는 차츰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고르바초프는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에도 개혁을 촉구했다. 동유럽 각국 공산당 지도자들도 시장경제의 도입, 정치적 민주주의의 확대 등을 위한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일어난 일련의 변화는 사회주의 개혁을 넘어 현실사회주의의 붕괴를 초래했다. 민주화를 요구하는 지식인, 시민들의 요구로 공산당 정권이 차례로 무너지고 체제 전환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과거의 동유럽 국가들에서는 비(非)공산당 정부가 잇따라 세워졌다. 가장 극적인 변화는 동독에서 일어났다. 민주화와 여행의 자유를 요구하는 시민들의 시위가 이어지던 끝에 1989년 11월 9일 동서냉전의 상징이던 베를린장벽(Berlin Wall)이 무너졌다. 이후 동서독은 1990년 10월 3일 통일을 이루었다. 베를린장벽 붕괴가 냉전 종식의 물리적인 상징이었다면 독일통일은 가장 중대한 결과였다.

사회주의 개혁 노력은 이처럼 냉전의 종식을 가져왔다. 이러한 국제관계 변화의 물결 속에서 고르바초프는 그때까지 비우호적 혹은 적대적이었던 다른 여러 나라들에도 군사적 긴장완화와 선린관계 확립을 제안하는 손길을 내밀었다. 특히 아시아권 국가들에 대한 그의 관심은 주목할 만했다. 1988년 9월 크라스노야르스크(krasnogorsk) 선언을 발표하여 소련은 아시아-태평양 국가이기도 하다는 것을 천명했다. 고르바초프는 소련과 불편한 관계에 있던 중국과의 관계개선을 꾀하였을 뿐 아니라 한국에도 큰 관심을 표명했다. 1988년 서울 올림픽에 소련선수단이 참가하면서 소련은 한국을 새로이 인식하게 되었다. 특히 페레스트로이카의 주안점 가운데 하나였던 경제개혁과 관련하여 소련 정치인들은 한국의 경제발전이 소련의 경제발전을 위한 참고가 되리라 여겼다. 한국과 소련은 경제 분야에서 상호보완적인 입장에 있으므로 경제적인 협력의 좋은 파트너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등장했다.

한국의 북방정책
러시아와 동유럽권의 체제변화는 외교관계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 절호의 기회였다. 서독 사민당정부가 동방정책을 추진했듯이 한국정부는 북방정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서독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실현할 기회를 먼저 잡은 세력이 보수정권이었다. 사실 1997년 대통령 선거 이전까지 한국의 집권세력은 모두 보수세력이었지만 일반국민을 향하여 구사하는 담론과는 달리 내부적으로는 사회주의권과의 관계개선에 대한 구상도 전무하지는 않았다. 1970년대부터 닉슨 독트린(Nixon Doctrine)과 주한미군의 부분적 철수 그리고 동서 긴장완화 흐름 속에서 한국의 집권세력은 한미동맹 일변도의 외교 관계만으로는 한국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인식을 지니게 되었다. 1983년 6월에는 당시 외무장관이 ‘북방정책’이라는 용어를 공개석상에서 사용하기도 했다.2

그러나 정책이 실제로 추진된 것은 1988년 7.7선언 이후의 일이었다. 1987년 6.10항쟁을 거치고 6.29선언 이후 한국의 민주화 운동이 남북한 교류협력을 중시하는 통일운동으로 나아가자 집권 보수세력은 이에 대응하면서 통일외교정책에서 주도권을 쥐고자 했다. 7.7선언에서 당시 노태우 대통령은 남북교류와 교역의 추진을 선언한 다음, 남북이 국제사회에서 서로 협력하며 중국 등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추구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것이다. 동유럽 국가들이 현실사회주의체제를 벗어나고 있던 당시 상황은 이를 위한 유리한 여건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리하여 한국은 1989년 3월 동유럽 국가들 중에서는 최초로 헝가리와 외교관계를 맺었고, 이후 폴란드(1989년 11월), 유고슬라비아(1989년 12월), 체코슬로바키아(1990년 3월), 몽골(1990년 3월), 루마니아(1990년 3월)등 구(舊) 사회주의권 국가들과의 수교가 줄을 이었다. 화룡점정은 1990년 9월 30일에 이루어진 한·소 수교였다. 수교 선물로 한국은 소련에 40억 달러의 차관을 제공하기로 했다. 한·소 수교는 북한과의 관계 개선, 중국과의 외교관계수립을 가능케 해주는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91년 말에서 1992년 초에 이르는 시기에는 남북한 간에 기본합의서가 체결되고 비준되었으며, 1992년 8월에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 외교관계가 수립되었다. 6.25전쟁으로 무력대결을 벌였던 왕년의 교전국 한국과 중국이 국교를 수립한다는 것은 한·소 수교가 가져다 준 또 하나의 큰 선물이었다. 1991년 말 소련이 해체되고 우크라이나를 비롯하여 소련에 포함되어 있던 열다섯 공화국이 독립하자 한국은 중앙아시아, 동유럽에 위치한 이들 신생 국가들과도 차츰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리하여 한국은 북한, 쿠바 등 극소수 국가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구 사회주의국가들과 외교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첫 만남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전반에 많은 아시아 지식인들에게 러시아 지식인들의 경험은 자기 삶의 실존적 선택을 위한 거울이었다. 아시아 지식인들은 19세기 러시아 문학작품을 읽으면서 근대로의 전환을 고민했다. 러시아 인텔리겐치아(intelligentsia)의 치명적 매혹에 수많은 아시아 지식인들은 하얗게 밤을 새고 앓으며, 사회와 역사에 대한 인텔리겐치아의 고뇌와 번민을 자기 것으로 삼았다. 루쉰의 소설 『광인일기(狂人日記)』가 러시아제국 출신 우크라이나 작가 고골리(Gogol, 1809~1852)의 소설 『광인일기Zapiski sumasshedshego』의 강력한 영향 아래 씌어졌음은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다.3 더 나아가 러시아혁명 이후 수립된 소련 체제는 아시아 지식인들에게 근대화의 가장 강력한 모델 중 하나로 여겨졌다. 식민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경로의 근대화를 대안으로 여긴 것은 그들이 제국주의적 착취와 억압에 대한 반대라는 점에서 러시아혁명의 주도세력과 가치관을 공유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8년 한러정상회담

국가적 차원의 만남을 보더라도 한국인들은 러시아인들과 이미 19세기 후반에 외교관계를 수립했고 국가적 차원에서는 상당히 긴밀한 관계를 가지기도 했다. 1884년 한·러 사이에 체결된 첫 번째 수교조약이었던 조로수호통상조약은 불평등조약이었다. 제국주의 시기에 약소국 조선이 다른 제국주의 열강과 맺은 조약이 모두 불평등조약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다. 그 후 고종은 일본과의 갈등을 피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아관파천(俄館播遷)을 단행함으로써 러시아를 조선인들로 하여금 잊을 수 없는 이름으로 만들었다. 그 후로도 러시아와 일본 간의 제국주의 전쟁이었던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 일본의 조선 지배가 기정사실화된 것, 2차 대전 종전 후 미군이 남한에 주둔하고 소련군이 북한에 진주한 것이 한반도의 남북 분단의 원인이 되었던 것 등에서 보듯 러시아(소련)는 한반도의 운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나라의 하나로서 한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각인되었다. 다만 앞에서 말했듯 2차 대전 후 반공주의가 지배하면서 한국인들에게 소련은 경원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북한과 소련이 특수한 협력관계에 있었던 것과 극단적으로 대비되는 사실이었다.  

반면 동유럽은 현실에서나 관념에서나 문자 그대로 먼 곳이었다. 역사상 동유럽의 대부분 나라 사람들과 한국인들은 국민 대 국민으로서는 20년 전에 처음으로 만났다. 조선왕조가 국제관계에 들어서고 러시아와 수교도 하던 19세기 말, 이들 나라들은 대부분 독립국가를 이루지 못한 채 제국의 지배 아래 놓여 있었다.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폴란드는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의 지배를 받되 그중 러시아 지배 아래 든 부분이 가장 컸다. 발칸반도의 인민들은 상황이 각기 달랐지만 유고슬라비아라는 나라는 1919년에 처음으로 등장했다. 1차 대전 후 이 나라들이 독립을 얻고 국민국가를 이루었을 때는 조선이 일제의 제국주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2차 대전 후 광복을 이룬 한반도에서 한국정부가 수립되었을 때는 이들 국가들은 앞에서 말한 대로 소련의 영향권 아래 놓여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북한만이 이들 나라들과 외교관계를 가졌던 것이다.

이렇듯 동유럽 국가들과 한국은 아주 오랫동안의 어긋남 끝에 만났다. 문화적 상호 이해의 심도도 깊지 않은 편이었다. 아마 동유럽인들이 한국에 대해 아는 바가 반대의 경우보다도 더 적었을 것이다. 사실 동유럽 지역의 일부 문화는 오래 전부터 한국인들에게도 친숙한 것이었다. 폴란드 출신 쇼팽(Fryderyk Chopin, 1810~1849)의 음악, 헝가리 출신 리스트(Franz Liszt, 1811~1886)의 음악은 한국인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체코의 한 지역인 보헤미아(Bohemia) 출신 민족주의 음악가들인 스메타나(Bedrich Smetana, 1824~1884)나 드보르자크(Antonin Dvorak, 1841~1904)의 음악도 마찬가지였다. 폴란드 작가 헨리크 시엔키에비치(Henryk Sienkiewicz, 1846~1916)의 소설 『쿠오바디스Quo Vadis』는 그 열렬한 애국적 정서가 식민지 시대 이래 한국인들에게도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 1883년~1924년)의 소설들이 불러일으킨 근대적 삶의 불안에 대한 고민은 그가 프라하(Praha) 출신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인식되기도 전에 이미 한국인들에게 익숙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고급문화 중 극히 일부에 국한된 것이었다면 이제 양쪽 사람들은 서로 오고 가면서 인간사회의 다양한 삶에 대한 이해를 확대해 가고 있다. 동유럽을 방문하는 한국인들은 왠지 사회주의체제 아래서 낙후했으리라고 추측해 온 나라들이 깊은 역사적 전통과 높은 문화수준을 갖추고 있음을 알고 자주 놀라곤 한다. 편견의 극복과정이라는 것이 이런 것이리라. 그리고 유학, 연수, 강의 등 여러 목적으로 한국대학이나 연구기관을 방문하는 동유럽 출신 학생 및 학자들의 수도 점점 늘어가고 있다. 그들 또한 아시아 문화비평의 깊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식을 새로이 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열광, 상호갈등, 문명적·시민적 상호이해
한·소 수교는 양국 국민들 사이에서 상대에 대한 열광적 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수교 후 1991년 4월 고르바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한국을 방문해 제주도에서 한·소정상회담이 열렸을 무렵, 이 소련 정치인은 아마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외국 정치인이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도 한국은 빠른 시기에 경제성장을 이루어냈고 품질 좋고 가격경쟁력 높은 제품들을 생산해내는 공업국가로서 대단히 긍정적인 이미지로 비치고 있었다.

그러나 열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1998년의 외교관 맞추방 사태에서 보듯 한때는 양국 사이에 또다시 험악한 기류가 흐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는 곧 극복되었다. 두 나라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상대 안에 있는 긍정적인 것, 부정적인 것을 함께 가늠하며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가는 단계로 차츰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러시아와의 교류가 한국에 대해 가지는 특별한 의미를 부정할 수 없다. 러시아는 영토 뿐 아니라 군사, 문화, 자원 등 여러 면에서 여전히 막강한 대국이다. 더욱이 러시아는 남북한 두 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는 대국이다.(중국 또한 그러하다) 러시아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한국이 동북아 지역에서의 균형 잡힌 국제관계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독자적으로 결정하는 데 있어 필수적이다. 한국의 일부 사람들이 러시아를 경제적으로 낙후한 자원대국으로 보고 자원외교의 상대로만 여기는 것은 큰 오류다. 국제관계에서 러시아의 발언권은 여전히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한국이 러시아와의 관계를 강화한다는 것은 국제관계를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의 대립으로 보고 한국은 해양세력과 연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구식 이분법적 지정학의 속박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스스로 대륙과의 관련을 잃고 섬이 되자고 주장하는 것은 어리석다.
한국과 동유럽 사이에는 한·러 관계처럼 특별한 애증관계는 없다고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동쪽 끝의 나라 한국과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동유럽의 인민들은 상대의 역사와 처지에 대해 동병상련과 공감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을 테니, 강대국을 대할 때 가질 수 없는 감정이었을 것이다.

과거 동유럽에 속했던 나라들은 동유럽이라는 개념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이기도 한다. 이 명칭이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던 시절의 부정적 기억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동서독의 통일은 지정학적으로 동유럽이라는 범주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했다. 중부유럽의 중심국가였던 독일이 동서로 분단되고 유럽이 동서로 나뉨에 따라 중부유럽 개념이 사라지고 대신 동유럽이라는 개념이 성립하게 된 것이었는데, 독일통일은 이제 동유럽 개념의 용도가 폐기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과거의 동유럽에 속했던 지역 사람들은 스스로 중부유럽의 일원으로 불리기를 원한다. 더 나아가 이 지역의 국가들이 모두 유럽연합에 가입해 있기 때문에 이들은 유럽인으로 불리기를 더 원하기도 한다. 하여 동유럽이라 불리던 지역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은 더 많은 유럽을 알게 됨을 뜻한다.

한국과 러시아 및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 분명하다. 한국인들은 경제교류에 그치지 않고 이들 지역의 역사, 문화, 예술에 대한 이해를 통해 자신의 문화적 지평, 지적 성숙도를 높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들이 미국, 일본 위주의 문화적 편식에서 벗어나 이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하고 이해를 심화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세계화라 일컬을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