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레는 중력에서 벗어난, 세련된 정령의 몸짓을 추구한다고들 하는데 이는 결국 발레가 ‘죽음충동’의 무용적 표현이란 뜻이다. 죽음충동은 죽음 너머로까지 연장되는, 죽음을 초월하는 어떤 정념의 에너지이자 활동이다. 확실히 로맨틱 발레(romantic ballet)는 이 어두운 충동의 끈질긴 지배를 받고 있다. <지젤Giselle>은 죽은 자의 마음과 그에 따르는 산 자의 복잡한 마음이 발레적 접촉으로 극화된다. <백조의 호수Le lac des cygnes>나 <잠자는 숲속의 미녀La Belle au bois dormant>는 ‘아름다운 영혼’이라는 순진한 관념을 전제로 하지만 심연을 가진 호수(거울의 표상)와 긴 잠(소급작용)이라는 죽음충동의 매개항이 작용한다.

표현주의적 색채를 떨쳐버린 20세기 모더니즘의 시대에는 롤랑 프티(Roland Petit) 같은 발레안무가가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젊은이와 죽음Le jeune homme et la mort>에서는 문명의 가속페달을 밟으면서 나타나는, 도시적 환등상(Phantasmagoria)파리 아케이드를 환등기에 빚대어 묘사한 발터벤야민의 개념―특히 파리(Paris)의 모더니티적 파사쥬(passage) 풍경―의 이면에 도사린 어둠의 풍경을, <아를르의 여인L’Arlesienne>에서는 상실한 사랑의 대상을 환상적으로 응시함으로써 출현하는 마음의 현상학을 나타냈다. 그리고 <카르멘Carmen>을 극단적인 느와르(noir)로 재해석함으로써 사랑의 병리(“사랑은 일종의 병이다”)와 유혹의 관계를 극화하는 복수의 시학은 이제 발레가 19세기 낭만화된 관념의 공간으로부터 20세기 아케이드의 공간으로 건너왔음을 말해준다. 발레는 이처럼 동시대의 삶을 뒤따라왔으며, 이제 삶의 밑그림과 포개지려는 욕망이 훨씬 더 강렬해졌음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롤랑 프티의 안무세계는 여전히 문학적 신체와 그로부터 흘러나오는 놀라운 신체언어로 구성되어 있다. 그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그가 이번에 국립발레단의 공연 <롤랑 프티의 밤A Night with Roland Petit>에서 보여준 것을 생각해보자. 그것은 20세기 초반의 산업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도시의 어두운 세계를 소외된 청춘의 선망과 상실, 그리고 불가능한 사랑으로 표현한 발레였다.

<아를르의 여인>에서는 마음대로 되지 않는 환상의 지렛대를 조절하려 애쓰면서 이미 무(無)인 동시에 실재하는 것으로 오인하는 한 젊은 남자의 판타지를 발레의 세련된 밀고 당기기로 표현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는 롤랑 프티의 기술적인 안무가 얼마나 놀라운 신체언어를 낳는가를 증명했지만, 주제적으로는 여전히 팜므파탈(femme fatale)에 기댄 ‘느와르 발레’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느와르라는 수식은 독일표현주의와 어슬렁거리는 도시의 이면이 결합한 문학적, 시각적 개념이다. 특히 <젊은이와 죽음>에서 이러한 느와르적 성격은 가장 발랄하고 짜릿하게 연출되었는데, 이러한 취향을 즐기는 이들에게 그것은 시각적 쾌락이 마구 분출하는 작품이었다. ‘죽음=여성’으로 등식화된 코드는 전형적인 남성의 거세공포와 관련되어 있고, 라캉(Jacques Lacan, 1901~1981)의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역설적인 명제가 어떻게 남성을 죽음으로 몰아가며, 다시 어떻게 죽음 너머의 시각으로 파리라는 도시를 전망하는지 보여준다. 이것은 롤랑 프티의 발레가 춤추는 자를 비인칭적인 주체로 몰아가는 듯하지만 결국은 풍경 속의 일부로 바꾸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롤랑 프티의 안무가 문학적 신체로 구성되어 있다고 평가한 이유는 그의 안무가 현대의 분열적인 신체나 다른 사물로 변하는 신체와는 전혀 관련이 없기 때문이다. 문학적 드라마로 충만한 발레의 내러티브에서 ‘새로움’은 내러티브의 수정이나 안무의 세련된 조절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모던한 멜랑콜리를 다시 한 번 정겹게 즐겨야 한다.
롤랑 프티는 한국에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고색창연하게 보일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없는 모더니티의 향수까지 불러내는, 아이러니한 발레를 선물했다. 이러한 역설은 흥미롭기도 한데, 어쨌거나 우리는 이러한 ‘시간차 공격’이 본의 아닌 결과-단순한 엔터테인먼트 이상의 결과-를 낳는 것에 주목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역사책에서 뚜벅뚜벅 걸어 나온 발레라고 하면 모두들 로맨틱 발레를 생각하지만 이제 우리는 모더니즘 발레를 떠올리는, 섬세한 감각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공연의 한 장면

공연<롤랑 프티의 밤>포스터

이미지 제공_ 국립발레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