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유하는 시간의 무게’라는 전시제목에서 젊은 시절 어두운 사색의 시간들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부유하는 시간과 공간이 작가들의 미디어적인 시각으로 자유롭게 혼재되어 있음을 느꼈다. 전시장에는 동양권의 미디어작가 일곱 명의 싱글채널비디오, 사진, 드로잉 등을 포함한 서른여 점의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미디어’와 ‘동양’이라는 다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가지 특색이 동양 특유의 역사적 또는 사회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어 작품은 한층 더 가깝게 다가왔다. 반면 근대유럽미술에서 한때 유행했던 ‘시느와즈리(Chinoiserie)’ 후기 바로크·로코코 양식 미술에 가미된 중국적인 기풍 나 ‘자포니즘(Japonism)’ 일본미술의 영향 또는 일본적인 취향 등을 선호하는 현상이 배면에 숨겨진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혹이 전시를 돌아보는 내내 머릿속을 맴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의 능숙한 미디어작업은 이제 과거의 화려한 문명과 역사에 머무르지 않고 현대사회와 꾸준히 교감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현대미술이 내포하고 있는 보편성을 동양미술이 이미 획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지점이다.

타이완작가 첸시에전(?界仁)의 <팩토리factory>는 타이완이 개발도상국이었던 당시 활발하게 움직였던 하청공장들, 지금은 버려진 공장들을 대상으로 제작한 영상이다. 그의 작업은 타이완 역사의 사회적인 상징처럼 멈추어버린 공장에 과거의 노동자들을 다시 불러 모아 이를 영상으로 제작, 낡은 다큐멘터리 영상과 조합하는 것이었다. 이는 실제로 촬영한 영상을 이미 존재하는 다큐멘터리 영상에 번갈아 삽입하는 연출방식으로 시공간을 자유롭게 하여 새로운 의미의 시간과 공간을 재구성한다.


첸 시에전, Factory(2003)

한편 인도작가 날리니 말라니(Nalini Malani)는 인도의 현대미술 영역에 비디오아트를 알리고 발전시킨 선두적인 작가인데, 독일극작가 하이너 뮐러(Heiner Muller, 1929~1995)의 연극 <햄릿머신Hamlet machine>을 인용하여 작품화하고 있다. 뮐러는 고뇌의 상징인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 원작의 <햄릿>을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지식인들의 외침이 반영된 <햄릿머신>으로 연출했다. 날리니 말라니는 연극에서의 살아있는 강렬함이 느껴지도록 양면과 앞쪽에 프로젝션이 되는 세 가지 영상을, 바닥에는 소금과 물을 배치하여 스크린영상을 투사한다. 투사된 이미지는 불안과 분노로 점철된 인도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눈, 코, 입을 마구 섞고 흔들어 마치 프랜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의 작품에서 느껴지는 그로테스크한 긴장감과 연극의 현장감이 엿보였다. 또한 벽과 바닥으로 이어지는 영상은 다양한 질감과 이미지를 동시에 표현하고 있는 입체적 회화처럼 느껴졌다. 영상 속에는 일본 부토무용 모더니즘과 표현주의, 허무주의를 담아낸 일본의 아방가르드 무용가인 하라다 노부오(原田伸雄)가 나오는데 작가는 무용가의 움직임을 통해 인도 자체의 문제와 자신의 트라우마를 표현하고 있다.

인도작가 소니아 쿠라나(Sonia Khurana)의 <버드bird>는 구속된 신체와 여성성의 한계에 도전하는 전형적인 페미니즘 작품으로서 현대적인 흐름에서 보면 고전처럼 느껴지는 작품이다. 이 분 정도의 싱글채널 비디오 <버드>에서 아름다움이나 여성성과는 무관한 신체는 자유로운 비상을 하기위해 수없이 몸을 던지지만 중력 때문에 무기력하게 떨어지고 만다. 작가는 인간의 노출된 몸이 아닌 인간의 욕망과 좌절에서 다시 일어나는 인간승리의 몸으로 성차가 극복된 몸의 한계를 형상화하고 있는 것이다.

실파 굽타(Shilpa Gupta)는 일찍이 관객에게 적극적인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젊은 작가로서 인도 미디어아트계의 독보적인 작가로 관심을 받고 있다. 실파 굽타의 상호작용적 예술은 작가가 관객과 소통하려는 노력에서 시작된다. 작품명인 <하프 위도우즈half widows>는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부인들’을 지칭하는 뜻으로, 선을 그어 드로잉한 종이 위에 한 여성이 땅따먹기 놀이를 하는 영상을 투사하여 제작했다. 땅따먹기를 하면서 슬픈 내레이션을 웅얼거리는 여성은 인도―파키스탄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안고 있는 카슈미르(Kashmir)의 천오백여 과부들을 대변하고 있다. 전시장에 설치되어 있는 헤드셋을 쓰면 그녀의 웅얼거림은 이내 수위를 넘긴 통곡처럼 느껴진다. 이렇게 그녀의 작업을 대하는 관람객은 무의식적으로 작품에 참여하게 된다. 예기치 않은 새로운 감정이나 의미들을 끌어내게 되는 흥미로운 경험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부유하는 시간의 무게展>포스터

예링한(?凌翰)은 중국의 젊은 작가로서 미디어적인 언어에 가장 쉽고 자연스럽게 접근한 작가일지도 모른다. 빠른 정보화 시대와 함께 성장한 예링한에게 뉴미디어는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기 위한 가장 자연스러울 매체일 것이다. 작가는 내면의 이야기를 수천 장의 회화적 이미지로 풀어낸다. 그리고 그것을 미디어로 재구성해나가는 과정을 통해 가상과 현실을 대립적으로 구성, 도발적이고도 나른한 틈새에서 기억과 상상의 시공간들을 지속적으로 재구성한다.


예링한, 라스트 익스페리멘틀 플라잉 오브젝트(2008)

이미 현대미술의 흐름에서 간파할 수 있듯 ‘서구 중심의 현대미술’이라는 말은 허무한 공명과 함께 본색을
감추기 시작했다. 이번 전시는 그 의미를 더욱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전시로서 중국, 인도의 현대미술이 그들의 역사, 사회, 문화와 지속적으로 연계되어 ‘현대’라는 맥락에서 활발히 진행 중임을 읽을 수 있었다.

 
날리니 말라니, 햄릿머신(1999~2000)  소니아 쿠라나, 버드(2000)

더불어 대부분의 작품이 현대적인 테크놀로지보다는 비평적인 시각으로서의 무게감이 느껴지는 것은 중국과 인도의 역사적 특성에서 출발한 미술현상이라고 본다. 전시제목처럼 흩어지고 열리고 재구성되는, 부유하는 시공간 속에서 미디어아트의 다원적인 특성에 자신의 숨겨진 창작욕구를 끄집어내어 적극적인 감상을 하기를 바란다.

이미지 제공_ 아라리오갤러리천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