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인아파트

옛날 80년대 초, 어릴 적 어려운 시절을 보냈던 동네라 사진을 보니 눈물이 찔끔 납니다. 동네 아이들과 옥인아파트 거쳐 인왕산에 헐떡거리며 올라가서 야호를 외쳐대던 그때가 뼈에 사무치게 그립습니다.

저에겐 30년의 추억이 담긴 곳이랍니다. 어렸을 적부터 근처 교회를 다녀서 이곳저곳 추억의 공간이죠. 옥인아파트도 마찬가지구요.

한 블로그*에 달린 댓글들이다. 무릇 장소에서 발현되는 기억과 상상력은 모든 존재의 든든한 기반일 것이다. 그런 기반이 흔들릴 때 우리는 감히 시인이 되거나 예술가가 된다. 도시재개발, 이주, 철거의 2000년대는 미술계에서 공공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기 가장 좋은 소재였다. 1971년 시범아파트로 지어진 후 2009년 철거가 시작된 옥인아파트도 이중 하나였다. 그러니까 <옥인아파트 프로젝트> 역시 2000년대 횡행했던 공공, 도시공동체, 커뮤니티라는 미술판의 밋밋한 수사학들 중 하나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의 행위가 드러내고 있는 지점은 사뭇 색다르다.

우선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를 잠시 살펴보자. 이 프로젝트는 2009년 7월 인왕산의 조망권과 스카이라인을 살린다는 구실로 아파트 철거가 공시된 시점부터 시작되었다. 작가 김화용은 이 아파트가 철거 공시되기 불과 몇 개월 전부터 입주해 있었는데, ‘공간과 연애할 틈도 없이’ 이별하게 될 입장이었다. 이에 다섯 명의 작가를 옥인아파트에 초대하여 ‘옥인 콜렉티브’를 구성했고, 이들 김화용, 이정민, 이주영, 육킹탄, 진시우, 조은지은 철거되어가는 아파트를 소재로 삼은 <옥인 오픈사이트>를 2010년 3월 7일, 하루 동안 공개했다.

이정민·진시우 작가의 설치작품 <볼링 포 옥인(Bowling for Okin)>은 오래된 아파트의 불균질한 옥상에서 펼쳐진 ‘불안한 도시민의 삶’이거나 세련되게 숨어 무자비하게 폭력을 휘두르는 ‘숨은 권력의 행선지’로 상징되었고, 버스정류장 정자에 모여 철거 아파트의 3, 4, 5, 6, 9동 등을 둘러보는 <고스트 워크(Ghost Walk)>이주영 作와 철거가 진행 중인 폐허의 아파트에서 마시는 한 잔 술 <고스트 바(Ghost Bar)> 이주영·육킹탄 作는 공간에 대한 위안으로 보이기도 했다. 또한 <어느 화창한 날, 나는 상처 입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조은지 作 는 안내에 따라 열다섯 군데의 경치 좋은 집안-기억과 장소의 끝이 만나는 존재론적 지점이자 경치 좋은 터일 것이다-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관객은 아파트 언덕 가장 끝에 있는 <너를 우리 집에 초대해>김화용 作 와 맞닥뜨리게 되는 것이었다. 실제 작가의 집이자 전시공간이 된 2동 한 편에는 소녀시대의 브로마이드와 철거 중인 옥인아파트의 잔영들이 담겨 있었다.


철거작업 중인 옥인아파트

“우리에게 아무도 총을 겨누지 않는”진은영, 「70년대産」 중에서 현실에서 재개발과 막개발로 만들어진 폐허의 이미지가 ‘불임의 도시공간’을 재현하기 쉬운 소재인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많은 작가들이 폐허의 도시 이미지를 다루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루는 방식에는 별 차이가 없다. 하기야 예술의 형식이 고래(古來)로 별 차이가 없기는 했다. 도시 이미지를 다루는 세 가지 도식이란 개인적인 기억을 포함한 공동체적 기억의 소멸, 정치·경제적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무한한 욕망과 변주, 존재론적 관점에서 타자의 배제 및 추방, 이주 등일 터다. 재개발과 폐허의 이미지가 세계의 실재를 드러내기 좋은 알레고리임에 틀림없지만 또한 배제된 타자와 관계의 위상학(位相學)을 드러내기에는 과잉의 소재일 수 있다는 점도 틀림없다. 이제 누가 도시재개발을 말하는가.



이주영, 육킹탄, 고스트 바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는 이러한 점을 알고 있는 듯하다. 이들은 한껏 부풀려진 도시재개발의 과잉된 수사학을 우려한다.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는 공동체와 공공성을 강조하는 뉴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나 행위와 시간을 강조한 해프닝, 자본과 사적소유의 경제질서를 흔드는 스(squat)빈 건물이나 공간을 점거하는 행위이라는 예술언어의 변방에 있다. 그러니까 이들의 몸짓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바로 이 아무것도 아닌 행위의 지점에서 이들의 예술은 예술로 살아난다. 이들은 어느새 자신들의 타자성과 맞닥뜨리면서 공공성을 이야기하고 그럼으로써 시나브로 공동체의 표피를 건드리는 것이다.

나는, 거주민이나 수용자의 실용적인 필요에 완전히 흡수되는 공공미술이, 오히려 아방가르드의 정신과는 관련이 없다고 말하고 싶다. 시민들에게 우산을 나눠주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우산의 보급이 특별히 정열적이거나 심오한 파열의 계기를 주지는 못할지언정 적어도, 의미이든 공간이든 사회적 관계든 이를 재구성하는 흥미롭고도 뜻밖의 계기를 만드는 행위일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박찬경, 『문화예술』 2008년 봄호

이 말은 관 주도 프로젝트에 기반한 국내 공공미술의 사례를 두고 한 말이다. 하지만 굳이 공공미술이 아니더라도 이 말은 공공성-공공성이 있다면 말이다-을 향한 모든 예술적 행위에 어울린다. 우리는 이 ‘뜻밖의 계기’에 대해 미적이지는 않지만 미학적인 혹은 실험적인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도, 정치적인 것이라고 할 수도 있다.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는 공공성이나 공동체를 말하지 않고 이야기한다. 이들에게 보이는 공동체(커뮤니티)는 타자의 문제를 실천적으로 사유한다. 그들은 개별적으로 만나 서로의 차이를 확인했을 뿐이지만, 바로 이 ‘개별 존재의 차이’야말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1906~1975)가 말했듯 공공영역을 틀 짓는 것이다. 아렌트는 공적영역(public realm)에서 ‘타인의 현존’이 필수적으로 요청되는 근거로 복수성(plurality)을 든다. 여기서 복수성은 다자(多者)의 본성, 즉 공통적 본성이 아니다. 오히려 ‘차이의 본성’인 것이다.

사물들이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될 수 있을 때, 그래서 그 사물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극도의 다양성 속에서도 동일한 것을 볼 경우에만 세계의 실재성은 진정으로 그리고 확실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한나 아렌트, 『인간의 조건The Human Condition』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는 차이의 현존을 확인하면서 ‘뜻밖의 계기’를 만든다는 점에서 공공적이다. 이들이 대상화하는 것은 이들이 의식하지도 않았고 오히려 배제했던, 도식화된 도시개발이거나 공동체의 기억 어느 즈음일 것이다. 아니, 그렇게 읽히는 데 이 프로젝트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문제는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뿐만 아니라 도시공간을 다루는 국내 대부분의 프로젝트가 ‘뜻밖의 계기’로 더 이상 예술계에 논란을 주지 못할 수도 있다는 점일 것이다. 첨예하게 탐미적이거나 급진적으로 미학적일 필요는 없지만 충분히 정치적일 필요가 여기에 있다. 재개발, 공동체의 과잉 수사학에 어떻게 함몰되지 않을지 <옥인아파트 프로젝트>는 두고두고 고민해봐야 할 문제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