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기슭으로 들쭉날쭉 굽은 포장도로를 따라 걷다보면 오른편에 콘크리트로 된 기다란 벽이 나타난다. 마치 미니멀아트(minimal art)처럼 풍경을 나누어 시야를 차단하는 이 잿빛 칸막이가 이우환미술관(李禹煥美術館)의 입구를 가리키고 있다.


이우환, 관계항-침묵(2010)ⓒ야마모토 타다스

벽을 따라 난 계단을 끝까지 내려가니 벽이 끝난 저편에는 해안과 마주한 초원이 펼쳐져 있고, 그곳엔 거대한 다갈색 자연석과 철판을 대치시킨 이우환의 입체작품 <관계항―대화>가 자리하고 있다. 문득 뒤를 돌아보자 시야를 방해하던 무기질의 잿빛 콘크리트가 위화감 없이 풍경에 녹아들어 마치 작품의 연장선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이곳은 대자연의 축복을 받은 나오시마(直島) 일본 카가와현(香川縣)에 있는 섬의 풍경을 그대로 담고 있다. 그야말로 꾸밈없는 공간인 셈이다. 무언가를 ‘가둔다’는 본래의 기능을 잃은 채 그저 조용히 서 있는 그 콘크리트 벽으로부터 이곳이 지향하는 바를 깨닫는 순간이다.

베네세하우스 뮤지엄(ベネッセハウス ミュ?ジアム)1992년 개관, 지중미술관(地中美術館)2004년 개관에 이어 나오시마의 세 번째 미술관으로 태어난 이우환미술관은 나오시마 최초의 개인미술관이다. 이우환 본인에게도 자신의 작품만을 들여놓은 첫 번째 영구전시가 된 셈이다. 건축 또한 일본의 대표 건축가인 안도 타다오(安藤忠雄)가 맡았다.


이우환미술관 전경ⓒ야마모토 타다스


알다시피 이우환과 안도 타다오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저명인사들이다. 이우환은 경상남도 출신으로 젊은 나이에 도일하여 니혼대학교 철학과를 졸업한 뒤 일본을 거점으로 활동해왔다. 근래에는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의 제작, 발표를 통해 국제적으로도 이름을 떨치고 있으며, 내년에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Guggenheim Museum)에서 개인전이 열릴 예정이다. 또한 그는 20세기 일본미술에 있어 가장 중요한 운동 중 하나인 모노하(もの派) 사물을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사물과 공간, 위치, 상황, 관계 등에 접근하는 예술의 이론적 지도자이자 논객이기도 하다.

한편 오사카(大阪)에서 자란 안도 타다오는 이우환을 능가하는 독특한 경력의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고졸 학력의 프로복서 출신으로 건축의 세계에 뛰어들어 독학으로 기술을 익혔다는 사실은 이미 유명하다. 현재는 세계적으로 영향력 있는 건축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최근에는 미술관과 같은 공공시설이나 거대 프로젝트를 주로 맡고 있다. 이우환미술관을 비롯하여 앞서 언급한 나오시마의 두 미술관 또한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이다.

콘크리트 기둥이 심벌처럼 솟아있는 ‘기둥의 광장’으로부터 안도 타다오 식(式) 건축의 대명사인 높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회랑과 천장이 없는 반(半) 옥외 형식의 ‘조응의 광장’을 거쳐 전시실로 들어가자 작품들이 자연스럽게 놓여있다. 이우환미술관의 건축은 단순히 작품을 진열하고 전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이우환의 작품세계를 보다 깊이 체감할 수 있는 장소로 만들고자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한 작가의 작품을 소개하고 그 활동을 조명한다는 종래의 개인미술관의 취지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또한 1970년대부터 2009년까지의 평면 대표작들이 전시된 ‘만남의 공간’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시실마다 각각 단 한 점의 작품만이 놓여 있는데, 그 작품들은 각각의 해당 전시실을 위해 제작된 것들이다. 아니, ‘해당 전시실을 위해’라는 표현은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이우환미술관의 건물과 작품들은 주종관계가 아닌 하나의 덩어리로 존재함으로써 다양한 사색을 이끌어내어 시공간의 풍성함을 창출하고 있는 까닭이다.

사실 이우환미술관의 건설계획은 2007년에 시작되었다. 당시 많은 이들은 이 세계적인 작가와 건축가의 합작에 갖은 충돌을 우려했으며 우여곡절을 예상했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의외로 원만하게 진행되었고 약 삼 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완성될 수 있었다. 두 사람 간의 친분 외에도 예술과 건축의 관계에 대한 공통적인 이상을 품고 있었기에 이토록 조화로운 명상의 공간이 탄생한 것이다.

한편 나오시마에서는 때마침 <세토우치국제예술제2010(瀨戶內?際芸術祭2010)>이 열리고 있다. 후쿠타케 소이치로(福武總一朗) 베네세홀딩스 회장, 나오시마 후쿠타케미술관재단 이사장가 종합 프로듀서를 맡은 이 예술제는 나오시마, 테시마(豊島), 쇼도시마(小豆島)를 비롯한 세토나이해(瀨戶內海) 동부의 섬들과 오카야마현(岡山縣), 카가와현의 양 기슭을 포함하는 광역지역을 연결하여 관광객을 불러 모음으로써 예술을 통한 지역 전체의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세토나이의 아름답고 변화무쌍한 자연경관과 독특하고 실험적인 현대건축, 그리고 하루 몇 차례 없는 왕복선 외에는 접근수단이 없다는 설정이 비일상적인 면모를 강조하여 예술제에서의 체험을 한층 특별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우환미술관 내부ⓒ야마모토 타다스


이우환, 대화(2010)ⓒ야마모토 타다스


이우환, 선으로부터(1974)ⓒ야마모토 타다스

이러한 예술제의 맥락과 더불어 중요한 것은 이우환미술관이야말로 자연과 건축이 일체를 이루는 특별한 예술체험의 이상향이 아닐까하는 생각이다. 예를 들어 기둥의 광장 벤치에 걸터앉으면 <관계항―점선면>에 사용된 자연석과 동일한 색상의 암괴가 작품의 배경처럼 산속에 펼쳐져 있음을 볼 수 있는데, 마치 작품이 산속까지 확장된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물론 실제 작품에 쓰인 자연석은 나오시마 산(産)이 아니지만 맞은편에 위치한 오카야마현에서 이우환 본인이 직접 오랜 시간을 들여 찾아낸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세토나이 지역에서 산출되는 자연석을 사용함으로써 지역의 환경과 자연에 작품을 녹여내고자 하는 그의 의도는 미술관의 중심부를 반지하로 구성하여 주변 경관과의 조화를 꾀하고 있는 안도 타다오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 디자인과도 일맥상통한다.

이처럼 동시대에서는 보기 드문 이우환과 안도 타다오라는 두 인물의 융합과 감상자, 작품, 건축 그리고 이를 감싸 안고 있는 바다와 산, 이 모든 것들이 부드럽게 교감하고 있는 이우환미술관은 21세기 미술의 역할과 미술관의 의의에 대해 시사하는 바가 큰 실험적 장소임에 틀림이 없다.

이미지 제공_ 이우환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