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예술사업가 혹은 사업예술가가 되고 싶다. 사업에 능숙한 것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종류의 예술이다.
 - 앤디 워홀

한국형 팝아트?
2000년대 이후 한국 미술계를 장악하고 있는 절대 주류는 팝아트다. 한국에서 팝아트는 1960년대 미국 팝아트의 전성기에 파편적으로 등장한 적이 있지만, 한국 미술계의 주요한 흐름 속으로 들어오기까지 사십 년 가까운 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이것은 그동안 한국 미술계가 팝아트를 받아들일 감성적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다는 것과 이런 감성이 자라날 문화적 토양 자체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본격적인 소비사회로의 전환과 신세대 문화의 대두 등 1960년대 미국 팝아트를 이끌었던 것과 유사한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된 이래 한국 팝아트는 급속도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국의 팝아트를 정의하기란 쉽지 않다. 매우 다양한 경향들이 산발적으로 증식하고 있고 이것을 과거 미국 팝아트의 견지에서 보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의 여부도 모호하다. 다만 우리나라에서 대중문화를 휘감고 있는 이미지들을 미술이 이토록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적은 없었으며, 팝아트가 버블붕괴 이전까지 한국 미술시장의 호황을 이끈 핵심에 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몇몇 비판에도 불구하고 팝아트는 현재 가장 환영받는 취향임에 틀림없다.*

특히 한국의 경우도 니폰팝(にっぽん Pop)이나 중국의 냉소적 사실주의와 마찬가지로 작가마다 특정 캐릭터를 양산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것이 아토마우스, 동구리, 얼큰이 등으로 페이퍼 만화잡지의 주인공 같은 이름을 가진 이 캐릭터들이 작가의 분신이 되어 미술계는 물론 대중적으로도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타이완의 큐레이터 빅토리아 루(Victoria Lu)가 기획해 2006년부터 개최되고 있는 <애니마믹스(Animamix)展>은 아시아미술 전반에 확산된 이러한 만화화(化) 경향을 상징하는 전시다. 이제는 어떤 작가의 작품을 생각할 때 그 작가만의 고유 캐릭터를 떠올리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처럼 되어버린 것이다.

왼쪽부터 철완아톰, 미키 마우스, 아토마우스

캐릭터-‘낯선 익숙함’
작가의 내면에 천착하는 한국 모더니즘의 전통을 깨고 만화라는 ‘발칙한’소재가 ‘거룩한’캔버스 위에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1993년 이동기의 ‘아토마우스’가 탄생하고 부터다. 그리고 이 탄생의 동력이 된 “왜 한국에는 팝아트가 결핍되어 있는가”라는 작가의 물음은 모더니즘의 정신주의적 풍토 속에서 팝아트의 세속성과 통속성이 강력한 거부의 제스처일 수밖에 없었던 미술사의 궤적을 의식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아토마우스는 일본의 대표 캐릭터인 테즈카 오사무(手塚治蟲, 1928~1989)의 철완아톰(?腕アトム)과 월트 디즈니(Walt Disney, 1901~1966)의 미키 마우스(Mickey Mouse)의 형상을 조합한 것이다. 귀여운 것도 아니고 예쁜 것도 아닌 이 애매한 변종 캐릭터는 일본과 미국이라는 한국 현대문화의 정체성을 극명하게 드러내면서 ‘낯선 익숙함’을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이러한 옥시모론(oxymoron) 효과적인 표현을 하기 위하여 서로 모순되는 어구를 나열하는 표현법은 작가가 어떤 시대, 어떤 문화 속에서 호흡해왔는가를 스스로 진단한 결과물에 대한 동의 혹은 거북함과도 관련된다. 그래서 아토마우스는 그 자체가 하나의 형식이자 스타일이고 동시에 내용이자 주제기도 하다.

이는 권기수의 ‘동구리’에서도 마찬가지다. 이 캐릭터는 패턴화된 전통문양이나 그래픽으로 단순화된 배경들, 그리고 몇몇 한국화 속으로 오로지 크기와 자세만을 바꿔가며 종횡무진 한다. 여기서 동구리를 중심으로 한 작품의 의미를 끄집어내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동구리는 새로운 미학에 대한 하나의 방법론이고, 이것이 곧 의미기 때문이다. 물론 한상윤의 루이뷔통 돼지나 파야의 노블레스 칠드런(Noblesse Children)처럼 캐릭터가 풍자적 의미를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소비사회를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미술시장을 향해 조소(嘲笑)를 숨기지 않는 이들 작품은, 그러나 비판을 겨냥한 초점에 비해 지나치게 가볍고 유쾌하다. 이것은 일종의 만평이다. 진지한 촉구나 고발이 아닌 친숙한 유머를 통해 쉽게 다가가기를 바라며 우리시대가 의례 갖게 마련인 자본주의 사회의 속물성에 대한 짧은 언급일 뿐이다.


애니마믹스展 모습

한국형 팝아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이 가벼운, 그래서 자칫 미술이라는 이름을 선뜻 갖다 붙이기엔 일말의 위험성을 안고 있는 만화적 이미지들에 대해 뻔뻔스러운 자신감을 내비치면서도 끊임없이 미학적 담보를 필요로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전통회화’와 ‘미국의 팝아트’가 가장 많이 등장한다. 먼저 권기수는 물론이고, 손동현의 영웅 캐릭터나 민화를 이용하는 김지혜의 작품들은 동양의 전통회화와 현대 이미지의 조합을 통해 현대사회의 아이콘들을 받아들이는 동양인의 감성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한국의 경우 유난히 미국 팝아트의 상징들을 차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앤디 워홀(Andy Warhol, 1928~1987),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 1926~1962), 슈퍼맨 로고, 성조기 등 고전적 팝의 상징들을 재해석함으로써 현재의 우리를 바라보려는 ‘팝의 팝’이 그것이다.


동구리의 작가 권기수

이런 점에서 한국형 팝아트는 이질적 이미지의 교배나 기존의 팝아트를 비틀어버림으로써 현재 혹은 현재의 나를 바라보는 적극적인 시선을 나타내기도 하지만, 이것이 과거미술에 대한 내용이나 형식적인 연관에 무게를 둔 것은 아니며, 기존미술을 검증하거나 실험하려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오히려 동양적 감수성의 체현은 한국형 팝아트가 국제미술 시장에서의 차별성을 얻는 가장 손쉬운 방식이기도 하고 팝아트적 어휘의 끊임없는 재생은 이미지의 역전과 대중성을 손쉽게 보여주려는 단편적인 시도에 다름 아니다. 결국 팝아트란 미술이 문화산업 속에 있다는 사실을 숨기지 않겠다는 것이고, 대중은 쉽고 친숙한 것으로 무장한 ‘미술’이라는 교양에 후한 점수 매기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회화와 만화 사이
그러나 이동기의 근작 <플라워 가든(flower garden)>(2007)과 <플라잉 아토마우스(flying atomouse)>(2007)는 예술이 현실의 삶과 충돌하고 긴장하는 그 가운데에 팝아트가 놓여 있음을 잘 보여준다. 대중문화의 포화 속에서 화가가 무엇을,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는 결국 시대에 대한 예술가의 반응과 관련되고, 극명한 두 화면의 대비를 보여주는 이동기의 작품은 과연 아토마우스라는 만화적 캐릭터 혹은 팝아트적 소재가 미술사의 내적 필연성 속에서 어떤 위치를 갖고 있는가에 대한 고심을 드러낸다.

예컨대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1923~1997)의 붓놀림(Brushstroke) 작업들이 추상미술의 주관성이 더 이상 산업사회의 삶과 예술을 담아낼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비아냥조의 언급이었다면, 이동기의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식의 추상적인 화면과 아토마우스의 대립은 추상과 팝, 회화와 만화 사이의 결합 혹은 절합(節合)에 대한 이상적 중용을 지향한다. 즉 예술 속으로 들어온 만화는 결코 만화가 아니며, 주인공의 영혼 속에서 미술의 정신성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정신성이 숨 쉬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이동기의 캐릭터가 지향하고 있는 것이 미술의 문제며, 팝이미지의 재현은 오늘날의 미술이 대중성과 예술성이라는 이분법적 문제에 대해 아직 많은 의문을 떠안고 있다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팝아트가 기대고 있는 것은 절대적인 대중의 지지다. 미술에 대해 큰 지식 없이도 많은 사람들은 고매한 전시장 속에서 내가 아는 흔한 만화들이 예술의 범주에 들어있다는 것에 대해 큰 안도감을 느낀다. 그것이 수입된 것이건 토착적인 것이건 간에 소비사회의 확대와 구매력의 증강은 문화적 소비를 삶의 수준을 차별화하는 중요한 도구로 간주한다. 기존의 현대미술이 어렵고 알 수 없는 전문적인 지식이나 미학적 감식안을 요구했던 반면 만화적 캐릭터는 작가 고유의 개성이 박혀있는 각종 기성품들을 통해 예술품의 소유에 대한 다소 키치(kitsch)적인 만족감을 제공한다. 1990년대 이후 한국사회의 풍요를 감안하면 한국형 팝아트는 1960년대 미국 팝아트와의 시간적 괴리에 상관없이 이제야 비로소 꽃을 피울 수밖에 없는 제반조건을 만족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동기, 플라워 가든(2007)

현재 한국미술의 주류 속으로 편입하는 가장 쉬운 방법인 팝아트의 폭발적 증가는 그 양적 팽창만큼 조형성이 주는 질적 매혹까지 고루 제공한다고 보기 어렵다. 더욱이 한국형 팝아트가 오랜 세월을 통해 축적된 미국과 일본문화에 대한 무의식적 답습이나 아류인식에서 자유로운 것도 아니다. 이런 점에서 아토마우스는 매우 솔직하고 직접적인 문화적 고백이고, 그 자체가 현재 우리문화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명확한 성찰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팝아트가 꾸준히 승승장구하는 이유는 한국문화의 미세혈관까지 속속 이것을 수요하며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고, 따라서 당분간 이 경향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예술을 수용하는 관객은 더 이상의 고민을 원하지 않는다. 이들은 예술가연(藝術家然)하는 고루한 예술가상 보다는 눈길을 사로잡는 셀러브리티(celebrity)에 매력을 느낄 따름이다. 이런 풍토 속에서 오로지 작가만이 흥행과 예술 사이에서 모든 갈등을 떠안고 적당한 영감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왜 아시아는 팝을 선택했나?
앞서 일본과 중국의 팝아트를 살펴보았지만 동아시아 삼국 이외에도 타이완, 베트남 등 현대 아시아미술을 설명하는 가장 주요한 키워드는 애니메이션이나 코믹스(comics), 즉 만화다. 이것은 주로 팝아트라는 범주로 설명되지만 국제미술의 시장은 아시아의 팝이 미국식의 ‘팝아트’에 뿌리를 박고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렇다면 아시아에서 이토록 만화의 아이콘을 이용한 미술이 주류를 차지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 일본과 중국을 중심으로 한 아시아미술 시장의 성장이 그것이다. 일본은 무라카미 다카시(村上隆)를 중심으로 한 니폰팝이 대성공을 거두었고, 중국 역시 냉소적 사실주의나 정치적 팝에 담긴 이데올로기의 특수성을 통해 미술시장의 블루칩으로 대접받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본 대중문화의 영향력과 아시아의 중국민족(타이완, 홍콩)이 가세해 아시아 특유의 팝아트의 시대를 열었던 것이다.


이동기(좌)와 무라카미 다카시(우)

이것은 대중이 이해하기 쉬운 만화 캐릭터가 미술로 환영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구를 중심으로 한 국제미술 시장이 ‘아시아적인 것’으로서의 일본식 애니메이션 스타일과 동양의 이국적 색채를 결합하는 방식에 주목했기 때문이다. 한국 역시 1990년대 이후 소비사회로의 급격한 진입과 일본문화의 완전개방, 일상적 정보화, 특히 밀레니엄을 앞두고 유행한 사이버네틱스(cybernetics)에 대한 관심은 대중문화 속에 파고든 일본의 SF적 이미지들, 즉 건담(ガンダム)이나 아톰 같은 만화 캐릭터가 부분적으로 차용되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사라진 상태 등의 국내적 상황과 맞물려 팝아트 경향의 성장을 가져왔다. 그리고 무엇보다 국제미술 시장에 대한 감각의 성장과 개안이 만화식의 가벼운 이미지가 한국미술계를 휩쓸 수 있는 바람을 불어넣었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한중일 팝아트는 미술시장을 빼놓고는 논하기 어려우며, 만화와 같은 표피적 이미지의 반복이나 변화를 통해 자신의 색깔을 직접적이고 평면적으로 이해시키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러한 조류가 서구의 주류미술계의 흐름과는 괴리가 있다는 것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미술에서의 메타담론이 실종된 가운데에서도 서구미술은 다양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으며, 아시아미술의 흐름은 ‘만화’라는 새로운 동양적 색채의 틀에 맞춰져 있다. 이는 서구와 아시아의 미술이 고리타분한 이분법적 구조를 다시금 들먹일 수밖에 없는 지경에 놓였음을 드러낸다. 즉 시장경쟁력을 이유로 ‘아시아형 팝아트’는 차별화에 성공한 대신 로컬리즘(localism) 속에 과도하게 자신을 가두고 있고, 이것을 글로벌 미술시장은 끊임없이 부추기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따라서 현재 이십 년이 흐른 아시아의 팝아트가 이제 무엇을 보여줄 수 있는가, 또 팝아트 이후에 어떤 미술의 조류가 나타날 수 있는가를 보여주어야 할 때가 가까워졌음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어쨌든 현대미술은 확장되기 마련이고 미술사는 변화하기 마련이며, 미술시장은 언제나 새로운 상품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