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희의 영화>를 봤다. 지난 신디(CinDi)시네마디지털서울에서는 아핏차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엉클 분미Uncle Boonm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도 봤다. 두 감독 다 시카고(Chicago)에서 공부했던 시네아티스트들이다. 혹시 ‘시카고학파’가 대세인가? 농담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지난 십여 년을 통틀어 꾸준히 진화하며 한발 한발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국내감독을 꼽으라면 단연코 홍상수 감독일 것이다. 새로운 세기가 열린 직후 모두가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를 이야기하던 때를 기억하는 이가 있다면, 그리고 그가 디지털 담론과 미디어혁명을 주창하던 이론가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그동안 벌어진 한국영화의 지형변화는 아마도 그를 매우 참담한 기분에 빠지게 할지도 모른다. 갓 십 년도 채 지나지 않아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위기를 불러일으킨 주범으로 몰리고 심지어 디지털 혁명은 아직 발생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다만 자본의 왕성한 탐욕은 디지털로 하여금 더 적은 자본을 투입하여 더 많은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에 기여하는 기술로서 봉사하도록 허락했다.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홍상수의 영화는 다시금 우리에게 찾아왔다. 이 년 주기로 찾아오던 그의 영화가 이젠 매년 찾아오다 못해 올해에는 기쁘게도 두 편이나 개봉했다. ‘유령처럼 배회하다가 무심코 던지는 홍상수의 영화’라는 메시지를 불러와 그의 영화가 갖는 특별한 의미를 생각해보자.

우리는 그가 처음 선보였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명백히 오해했고, 그가 만드는 영화를 때로는 혐오했으며, 이제 일부 평자들과 시네필(cinephile)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그의 영화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그가 더 이상 대규모의 제작비를 댈 수 없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디지털 담론과 한국영화의 르네상스는 그의 영화를 결국 주변화시켰고 그를 영화게릴라로 변모시켰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이라는, 지금 생각해도 기괴하기 그지없는 제목의 영화로 데뷔한 이래 수많은 영화평자들의 사랑과 시네필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면서도 그는 관객에 대한 애정 어린 혐오와 조롱이 섞인 자조적 미장센을 서슴지 않았다. 그는 말하자면 가장 지독한 독설가로서 살아남았던 것이다. 열한 번째에 이르는 필모그래피의 대목에서 홍상수 감독에게 가장 탁월한 변신을 가져올 수 있었던 충동은 스스로에 대한 가차 없는 조롱과 연민이 아닐까. 그리고 그의 영화를 가로지르는 에너지로 승화된 ‘찌질함’이란 그가 대놓고 벌이던 ‘자기연민’에 대한 성찰이자 관객들이 들여다볼 수 있도록 장치해둔 윈도우의 기능을 했던 것은 아닐까. 한 인간의 찌질하기 그지없는 대사를 쇼핑하고, 찌질한 행동을 수습하며 낄낄거리다가 문득 허망해하거나 민망해하는 것, 그것이 그의 영화를 소비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한다. <해변의 여인>(2006)에서 벌이던 찌질한 이미지 놀음 “난 나쁜 이미지와 싸우고 있어”과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2004)에서 초현실주의적인 미장센의 어느 한 부분에서 난데없이 등장한 백인여자, 그리고 <생활의 발견>(2002)의 마지막 부분에서 백미와도 같이 등장했던 명대사 “캔 유 스피크 잉글리쉬?” 등은 홍상수적 인간형을 완성시키는데 필요한 가장 순도 높은 찌질함의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영화는 찌질한 인간들의 찌질한 인생사를 그냥 되는대로 갈겨대는 그런 영화일까. 글쎄, 나는 여전히 한국에서 그만이 유일한 모더니스트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가 진화하고 있다는 사실은 그의 영화 자체가 증명한다고 믿는다. 홍상수 이후 수많은 찌질한 영화들이 나왔으나 그의 영화에 미치지 못한 채 사멸했다. 우리는 그가 일상을 조망한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사실 그가 살아가는 현실의 ‘실제’라기 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의 초현실적 ‘실재’와 다름없는 듯하다. 그가 믿는 세상은 “찌질한 너희들이 등장하는 판타스틱한 세상이 바로 여기에 있다”라고 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이것 역시 우리의 오해일 것이다. 그는 만들고 우리는 본다. 아무리 의미를 찾는 것이 읽는 자의 몫이라는 포스트모던적 의미론에 기대어본들 그 앞에서 이러한 다짐은 무용지물처럼 스러지고 만다. 그는 변화무쌍하게 자기복제와 복제의 복제를 넘어선 재현들에 기대고 있다. 그곳이 통영이든 경주든 인사동이든 춘천이든 혹은 강원도든 말이다. 

그는 살아남기 위해 처절하게, 마치 게릴라처럼 고군분투한다. 시력이 좋지 않은 눈과 주체 할 수 없을 정도로 나온 배를 허리띠 아래로 간신히 걸쳐둔 채 그는 두주불사 배우에 탐닉하고, 대사를 긁어내고, 이야기를 이어간다. <옥희의 영화>는 이번 여름 유난히 푸르고 맑았던 통영을 경유하며 걸었던 여정의 뒤안길 같은 영화다. 사실 <해변의 여인>과 <잘 알지도 못하면서>(2008)를 보고, ‘앞으로 홍상수의 영화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은 없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제는 그저 홍상수 월드의 자기복제를 실컷 즐기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는 <하하하>(2010)와 <옥희의 영화>를 통해 자기복제를 넘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무엇보다 배우 정유미옥희 역의 말처럼 진심으로 그들이 연기했던 장면이 신기했고 영화가 참 좋았다. 무엇인지도 정확히 모른 채 다만 진심을 담았던 연기들이 앙상블을 이루고, 그것들이 모여 한 편의 멋진 영화가 만들어지는 그 순간순간들의 편린이 빛나는 영화였다. 말로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드러나지 않을 것만 같은 순간들을 기어코 드러낼 수 있는 영화는 그리 많지 않다. 다시 한 번 정유미의 말을 인용하자면, “오랜만에 영화 같은 영화를 본 기분”이었다. 정유미가 처음으로 <옥희의 영화>를 보고 느낀 소회다. 동감이다.

영화 <옥희의 영화>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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