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도쿄(東京)에서 열린 도쿄아트북페어(The Tokyo Art Book Fair)에 다녀왔다. 더 북 소사이어티 필자가 운영하는 소규모 자주출판 전문서점 부스를 가지고 참여한 것인데 이름은 거창할지 모르지만 사실 이 행사는 작년 진스메이트(ZINE’S MATE)라는 이름으로 열렸던 소규모 출판물 페어의 두 번째 버전에 지나지 않는다. 일본에서 이런 종류의 행사가 관심을 끌 수 있는 이유는 많은 개인이나 공동체, 기관들이 자신의 활동을 알리고 존재를 드러내기 위한 수단으로 출판매체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개인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대해 값을 치루는 것에 비교적 익숙한 탓인지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활동에 동참하여 하나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
 

도쿄아트북페어의 더 북 소사이어티 부스

어떤 선입견을 가지고 이런 행사에 참여하다 보면 항상 자신의 기대와는 다른 광경을 보게 된다. 행사의 질이나 참가자들의 역량을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것보다는 독립출판에 대해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개념이나 기대가 전부 제각각이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듯싶다. 누구는 크래프트(craft)적인 성격이 강한 작고 귀여운 책자를 기대할 수도 있고, 누구는 정치적 올바름을 강조하는 팸플릿을 기대할 수도 있다. 아니면 주류출판에서는 볼 수 없는 기괴하고 이상한 책을 상상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런 행사에 가보면 세상에 정말 다양한 책들이 존재한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진지하고 학술적인 글을 쓰는 사람부터 북유럽 데스메틀(Death Metal) 책자를 만드는 오타쿠(おたく)까지 다양한 연령대와 계층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만든 책을 가지고 나온다.

독립출판이라는 말이 지칭하는 것은 주로 진(zine)이라는 장르의 소책자라고 생각하면 된다. 진은 매거진(magazine)의 준말인데 단순히 진이라고 하면 형태적으로 팬진(fanzine)과 유사한 얇은 소책자를 뜻한다.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가 주로 발행하는 진은 보통 오십 부에서 많게는 백 부 정도씩 복사기와 스테이플러를 이용해 만들어지고 팔린다. 팬진이라고 하면 매니악(maniac)한 동호회에 의해 만들어지는 책이라는 인상이 강하지만 진이라는 용어는 예술가나 액티비스트(activist), 또는 일반 개인이 만드는 출판물 모두를 포함하기 때문에 더욱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다양한 종류의 진(zine)들


이러한 진의 역사는 192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처음에는 공상과학소설(SF)을 즐기던 개인과 동호회에서 대형 출판사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소설을 출판해주지 않자 스스로 소설을 쓰고 그것을 돌려보기 위해 만든 잡지나 소책자로 시작했다. 초창기 진은 공상과학소설 장르에 집중되었지만 시대를 거치면서 다양한 장르로 세분화되며 발전해왔다. 펑크(Punk)밴드가 만드는 펑크 진, 아나키스트들이 만드는 정치적 성향의 진, 채식주의자들이 만드는 비건(vegan) 진, 성적 소수자들이 만드는 게이·레즈비언 진이 등장하고 심지어는 유명 의상 브랜드에서 젊은이들에게 어필하기 위한 수단으로 진을 출판하기도 한다. 핵심은 주류문화에서 별다른 관심을 가지지 않는 장르나 문화를 문화 창작자와 수용자들이 스스로 만들어내고 즐기는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는데, 진을 만드는 사람인 진스터(zinester)는 기획과 창작, 제작, 유통까지 모든 과정을 자기 스스로 고민할 수밖에 없다.

기업이 하나의 유행처럼 만드는 경우를 제외하자면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가 이런 진을 만드는 이유는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고 자신이 즐기는 문화를 남들에게 알리기 위함이다. 웹이나 개인매체의 발전으로 인해 개인이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기회가 늘어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자본의 영향력에서 자유롭기는 힘들다. 포털사이트가 없는 파워블로거는 상상하기 힘들며, UCC 역시 유투브(Youtube)나 비메오(Vimeo) 같은 동영상서비스 사이트에서 판을 제공했기 때문에 그 안에서 개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만드는 사람과 소비하는 사람을 연결해주는 유무형의 시스템이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작동하며,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자본을 가진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관점에서 소규모 출판문화는 자본에 종속되지 않으면서 개인 스스로가 만들어낸 유무형의 시스템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것을 최근에 많이 사용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ing)의 경향으로 파악할 수도 있겠지만 만드는 사람 대부분은 자신의 활동에 대해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기보다는 개인의 욕망을 더욱 중요하게 생각하는 듯하다.


도쿄아트북페어


사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경향에 대해 독립이나 인디(indie)라는 형용사를 붙이는 것이 부당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독립이나 인디출판이라는 말을 쓰는 것을 꺼리는 편인데 이 용어들이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어떤 선입견을 주기 때문이다. 물론 독립이나 인디문화의 가치를 폄하하려는 것은 아니다. 1990년대 중반 홍대를 중심으로 만들어졌던 인디음악 씬(scene)은 한국문화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리고 지금 한국영화의 발전 역시 독립영화 저변이 충무로 상업영화와 함께 작동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인디나 독립이라는 용어가 하나의 형용사나 라벨처럼 개별 창작물을 규정하는 데 사용된다면 그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소규모 출판은 영화나 음악처럼 기본적으로 공동작업이 전제되고 많은 자본이 투입되는 예술활동과 다르게 조금 더 개인의 은밀한 욕망과 연결되어 있다.
대신 우리는 개인이나 소규모 공동체가 ‘스스로’ 기획해서 ‘소규모’로 제작과 유통을 하는 이러한 경향을 ‘소규모 자주출판’이라는 용어로 부르려 한다. 이런 움직임은 예전부터, 아마 종이와 펜이 발명되었을 때부터 항상 있어왔을 것이다. 책의 형태로 무언가를 만들고 그것을 남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는 욕구는 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 번씩은 꿈꾸었을 법한 일이다. 그러나 남들이 봤을 때 부끄럽지 않은 퀄리티(quality)의 결과물을 개인 스스로 만들고 판매하는 것은 비교적 새로운 경향이다. 즉 개인 스스로 출판활동을 지속시킬 수 있는 시스템이 이제는 어느 정도 우리사회 안에 갖추어졌다는 말이기도 하다.

더불어 이 시스템이 기본으로 전제하는 것은 출판 테크놀로지의 발전이다. 소규모 자주출판의 대부분이 디자이너와 디자인 전공 학생들에 의해 만들어진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한다. 디자이너들은 컴퓨터를 활용해 출판물을 만드는 방법에 능숙한 사람들이다. 상대적으로 자주출판이 용이하다는 말이다. 만약 아직도 충무로 인쇄소에서 활판인쇄만을 사용하고 있다면 출판은 여전히 고도로 훈련받은 전문가들의 전유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데스크톱(desktop) 출판의 활성화로 인해 이제는 조금의 교육만으로도 자기 스스로 페이지 레이아웃을 구성하고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책자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인디자인(Indesign) 같은 편집 프로그램을 사용하지 않고도 책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지금의 소규모 출판물은 컴퓨터를 통해 파일로 제작되어 복사기나 인쇄소 같은 인쇄기술의 힘을 빌려 만들어지는 것이 대부분이다.

또한 이런 출판 테크놀로지만큼 중요한 것이 소규모 출판물을 판매하고 유통하려는 시도들이다. 아무리 많은 개인들이 자기 책을 만든다고 해도 그것을 판매하는 곳이 없다면 이 행위는 자기만족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직은 미약하지만 소규모 출판물을 취급하는 서점이나 공간이 늘어나고 있다는 것은 분명 긍정적인 신호다. 이러한 공간은 이 문화가 지속되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셈이며, 자주출판 생산자들이 모여 정보를 공유하고 비평을 하는 장소로 기능할 수도 있는 것이다.

최근 언론들은 이러한 문화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면서 소규모 자주출판을 하나의 유행처럼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문화를 패션 아이템처럼 소비하는 것에 그친다면 그 가능성이나 잠재성을 제대로 보지 못할 것이다. 소규모 자주출판을 책을 만들기 위한 시스템으로만 치부한다면 그 효과가 크지 않다는 소리다. 왜냐하면 그 결과물이 가져올 수 있는 파급력이 영화나 미술, 음악과 같은 다른 예술장르에 비해 매우 협소하기 때문이다. 개인이 일이백 부 정도의 책을 만들었다고 가정해보자. 그것을 보는 독자는 그 숫자보다 적거나 같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나 음악은 물리적 형태의 결과물을 소유하지 않더라도 즐길 수 있는 비물질적 매체다. 인쇄매체의 물질성은 출판만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지만 사회적 파급력 측면에서 보면 약점이 될 수도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런 소규모 출판물을 폐쇄적이고 자기만족적인 성향이 강하다고 비판한다. 그리고 그 비판은 어느 정도 옳다. 책의 질적 수준만 보자면 그렇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러한 문화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싶다면 그 결과물의 퀄리티나 내용보다는 책이 만들어지고 소비되는 과정 자체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UCC나 블로그와 같은 개인 창작 플랫폼이 문화적 파급력을 가지게 된 것은 그 문화가 기업에 이익을 가져다주었기 때문이다. 반면 소규모 자주출판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영역과 논리를 만든다는 측면에서 자본이나 제도로부터 자유로운 활동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자율성은 언론의 관심이나 테크놀로지의 발전, 출판문화의 활성화만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자. 어느 누가 강제성도 없고 성공여부도 불확실한데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책을 만드는 수고를 하겠는가. 그러나 꽤 많은 사람들이 장르를 불문하고 자신의 글과 드로잉, 일러스트, 사진 등을 가지고 개인출판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사회 안에서 소규모 자주출판이 보여주는 것은 외부를 욕망하고 그 밖을 희망하는 개인들의 솔직한 움직임이다. 그 책들이 비록 사소하고 신변잡기적인 이야기에 그칠지라도 우리가 그것들의 문화적 가능성을 찾는 이유는 지금 우리사회에 대한 가장 적나라하고 정제되지 않은 반응들일뿐만 아니라 그 존재 자체가 우리사회의 사회적 조건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개인적이고 폐쇄적인 문화가 시대와 같은 걸음을 내딛는다는 것이 모순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보다 앞서 소규모 자주출판 문화를 경험했던 미국이나 유럽의 많은 도서관들이 진 라이브러리를 구축하고 전문사서를 교육하는 것을 보면 익명의 개인이 만든 책자의 중요성을 새삼 인식하게 만든다. 사실 이런 출판물은 시대상황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발전되고 진화한다. 주류문화가 성공 이후의 변화를 두려워하는 것과 다르게 이러한 문화는 차이 속에서 변화하며 생성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직 우리사회가 개인의 목소리를 의미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익숙하진 않지만 상황은 조금씩 변화하고 있는 듯하다. 자기 스스로 자신만의 책을 만들어보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이 문화를 즐기고 만들어가기 위한 첫걸음일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