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랍의 어느 도시에서 기차를 타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한 역무원이 헐레벌떡 달려왔다. 내가 잃어버린 표를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찾아주었다. 고마울 따름이었다. 한번은 시외버스를 타고 내 짐이 잘 실려 오는지 창밖으로 짐 정리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자리정리를 끝낸 기사가 비디오를 틀었다. 이집트 특유의 익살극이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조금 지나자 극 속의 영리한 하인과 우둔한 주인의 콤비플레이가 웃음을 자아냈다. 나는 언뜻 촌스러운 연기에 대한 불만도 잊은 채 시골길 나들이에 몸을 실을 수 있었다.

십여 년 전 시리아의 극작가이자 연출자인 사아달라 완누스(Saadallah Wannous, 1941~ 1997)의 연극을 저서에 소개한 후 올해 서울시극단의 공연을 접하고 모든 관계자분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먼저 전하고 싶었다. 1977년 작품을 당시 시리아·레바논 정치사태와 희곡의 검열상태를 모르는 한국관객들이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우려했기 때문일까. 이번 <왕은 왕이다The King is the King>는 그동안 보았던 시리아나 다른 아랍연극을 다시금 떠오르게 해주었다.

완누스의 희곡과 연극의 상연
완누스의 희곡은 크게 기록극, 민중극, 역사극 등의 세 단계로 나눠볼 수 있다. 이 중 민중극에 속하는 <왕은 왕이다>에서 완누스는 정치억압을 끝내고 사회정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히드와 우바이드극중 등장인물들 같은 민중이 힘을 합쳐 일어나야 한다는 주제를 피력한다. 또한 자히드와 우바이드로 하여금 아랍 구전문학 속의 이야기 전달자 하카와티(hakawati) 역할을 맡게 하여 서구적 형식에서 벗어나고자 했으며, 관객과 가까운 아랍연극의 특성을 살리기도 했다. 연극의 정치화라는 개념을 피력한 완누스는 기존의 정치극과는 차별화된 연극을 통해 민중에게 정치의식을 더욱 인식시키고 행동에 옮기도록 하려는 목표를 설정한 것이다.

연극잡지의 편집장을 맡고 다마스쿠스극연구소에서 강의하던 중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으로 인해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환멸과 자괴감으로 작품을 내놓지 못하던 그는, 이후 <강간The Rape>(1990)과 더불어 <신기루 서사Mirage Epic>(1996) 등 연이어 일곱 편의 작품을 내놓았다. 이전단계와의 차이점은 자신이 설정한 검열에서 벗어나 보다 자유롭고 개인적인 사고의 사실주의적인 시각을 연극 속에 담고 있다는 점이었다. 역사극 <인류문화학>(1994)에서는 이븐 칼둔(Ibn Khaldun, 1332~1406)의 입장과 자세에 대해 역사기록과는 다른 비틀어보기, 전환하여 보기 등의 방식을 통해 아랍의 패배원인을 역사 속에서 찾고 관객들이 올바른 인식에 따라 행동해 나갈 것을 제시하고자 하는 연출입장을 확고히 하기도 했다.


연극의 한 장면

한편 그의 희곡은 검열을 의식하여 골격부분만 써 놓고 있기 때문에 연극으로 상연할 경우, 연출자와 상연국가에 따라 똑같이 반복되지 않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는 구전문학이 오랫동안 유행해온 아랍연극 대부분의 속성이자 관객들과의 대화라는 즉흥극적 요소를 중시하는 완누스의 의도이기도 하다. 예컨대 <왕은 왕이다>의 경우, 이집트에서는 두 번 상연이 되었는데 총 열한 곡의 음악을 사용한 점이나 억압에 대항해야 한다고 외치는 움무잇자극중 등장인물의 호연은 갈채를 받을 정도로 원작자의 의도가 잘 전달되었다. 그러나 아부잇자극중 등장인물를 맡았던 배우가 텔레비전의 주연을 맡아 극이 중단되기도 했다는 사실 등을 통해서는 이집트뿐만 아니라 시리아와 아랍국들의 연극이 지니고 있는 어려운 상황도 짐작할 수 있다.


연극 <왕은 왕이다> 포스터

1967년 아랍국의 대패, 1975년 팔레스타인 문제로 연계되어 터진 레바논내전과 시리아의 전쟁개입 이후 지도자에 대한 시끄러운 논쟁 속에서 던져진 <왕은 왕이다>의 화두는 권력의 속성에 비추어볼 때 당시의 시스템이나 왕의 선출보다는 민중의 단합된 봉기에 대한 희망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 연극은 구어체로 상연되어야 공감을 일으키기 적합한 요소와 문어체로 기록할 수밖에 없는 희곡의 간격을 보다 효과적으로 좁혀주고 있는 작품이기도 하다. 

한국에 새겨진 완누스의 자취
작년 다마스쿠스(Damascus)에서 논문을 발표하며, 400여 개의 위성채널 앞에 둘러앉은 시리아인들을 보고 완누스가 세계화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며 아랍문화의 앞날을 걱정하던 글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레바논사태에 좌절한 완누스는 이후 자신의 병과 맞서 개인에 초점을 맞춘 희곡들을 써내려갔다. 그리고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익살극을 선호하는 대중의 기호와 선정적인 위성방송에 맞서 극과 함께 살다 간 그의 자취가 최근 비로소 한국에 새겨진 것이다.

이번 작품의 경우 우바이드와 자히드의 역할이 좀 더 부각되었더라면 원작자의 의도와 더 가까워졌을지도 모른다. 죄인들의 목을 자르는 사람을 단순히 망나니라 호칭한 것 또한 당시 지식인들을 감시하던 정보국장으로서의 참수인 역할로 재고해야 한다. 관객에게 질문을 하거나 극 속 내용 중 공감을 이끌어낼 수 있는 부분에서는 배우를 관객 속에 배치하여 관객의 역할을 하게 하고 이를 통해 주변관객까지 관여시키는, 아랍 즉흥극의 요소를 놓친 점도 아쉽다. 더불어 앞으로 한국인의 공감대를 얻을 수 있는 아랍희곡을 선택하는 것도 과제로 남을 것이다.

연극의 한 장면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아랍연극이 상연되었다. 이는 그동안 소개해온 아랍소설에 이어 한국과 중동의 문화교류 전개에 활력을 줄 것이다. 우리의 전자제품뿐만 아니라 예술작품에도 박수갈채를 보내는 아랍인들의 호의에 화답하여 새로운 문화터전이 마련되었으면 한다. 다양한 관심사와 더불어 다른 문화권을 심층적으로 이해하는 또 다른 즐거움의 여유가 생기기를 바란다.

이미지 제공_ 서울시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