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림의 미학, 슬로시티
최근 걷기열풍과 더불어 슬로시티(slow city)*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숨 막히는 도시에서의 치열한 경쟁, 이른바 패스트라이프(fast life)에서 벗어나려는 욕구가 그 바탕에 있다. 전 세계적으로 이제는 느림에서 경쟁력이 나온다. 느리게 살기가 어떻게 경쟁력이 될까. 행복과 재미, 환경, 생태주의를 도입한 유럽의 슬로시티들이 지난 십 년간 보여준 지역인구 증가와 관광산업 확대는 느리게 살기가 미래의 성장동력이라는 점을 확인시켜준다. 관광, 식품산업 등에서 슬로시티의 국제적 친환경브랜드 효과는 상상 이상이다. 제대로 시간을 들여 키운 식물, 친환경적으로 생산한 육류, 전통적 방식으로 조리하는 지역음식 등 슬로푸드(slow food) 또한 세계적 추세다.

슬로시티는 인구 5만 명 이하의 마을로서 고유의 문화유산을 지키고 자연친화적인 농법을 사용하며, 삶의 방식에 있어서도 ‘속도’가 아닌 ‘인간’이 중심이 되는 곳이다. 전통보존, 생태주의 등의 느림의 철학이 묻어나는 마을을 일컬으며, 슬로시티국제연맹에 의해 선정된다.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의 삶을 반성하고 느리게 사는 삶을 실천함으로써 참다운 행복을 누리고자 하며, 또한 슬로푸드 운동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는데 슬로푸드란 햄버거, 피자, 청량음료 등의 패스트푸드와 무절제한 음주, 흡연을 삼가자는 운동이다.



또한 자동차보다는 자전거를, 대형할인점이나 백화점보다는 소규모 지역전통 상점이나 식당을 이용할 것을 권장하고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슬로시티 발원지인 오르비에토(Orvieto), 그레베 인 키안티(Greve in Chianti) 등을 포함하여 무려 60여 곳의 가장 많은 슬로시티 수를 자랑하고 있다. 구백 년 된 성벽으로 둘러싸인 오르비에토는 도시 내부가 차량통행 금지구역으로 마을을 가로지르는 도로가 채 2㎞도 안 되지만 수백 년 전 마차가 다니던 시절의 규모 그대로다.
슬로시티국제연맹은 2007년 12월 1일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에서 열린 총회에서 담양군 창평면, 장흥군 유치면, 신안군 증도면, 완도군 청산면 등 총 네 지역을 슬로시티로 지정했다. 이들 지역은 슬로시티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지역의 특성에 맞는 사업을 펼쳐나가면서 가입지역과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농어촌지역의 새로운 브랜드를 창출해나가고 있다. 슬로시티 인증을 계기로 지역의 문화와 특산품 등을 개발하고 이를 관광자원화해 세계적인 브랜드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전통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의 실험
이들 네 지역은 2007년 12월 슬로시티 인증을 계기로 경쟁력 있고 차별화된 브랜드로 슬로시티를 육성시켜 주민소득과 웰빙(well-being) 수준을 끌어올리고자 이를 민관협력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다. 전남 담양의 창평면을 거점지역으로 한 이들 네 지역이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로 지정됨에 따라 새로운 지역브랜드로 대두될 만큼 다양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전통보존, 지역민 중심, 생태주의, 느림의 철학 등을 담고 있는 슬로시티가 소위 ‘조금 부산한’ 관광과 어울릴 수 있느냐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해본다. 슬로시티란 정주공간으로부터의 주체적인 삶의 행동방식에 따른 결과이거나, 지역공동체 삶의 지속성, 그리고 공간과 인간의 조화를 끊임없이 이행하는 작은 운동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이를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보다 다양한 접근방식이 요구된다. 도대체 슬로시티가 무엇으로 관광상품화 된다는 것인가? 한국형 슬로시티 모델은 무엇인가? 그리고 슬로시티 모델을 만들기 위한 기반정비와 보존은 어떻게 할 것이며, 어떤 접근방식으로 조용하고 느린 명소로 만든다는 것인가?

슬로시티는 그 곳을 지키는 사람의 지속적 정주와 노력 그리고 느림과 자연과의 조화로운 정신운동의 결과물이다. 따라서 건강도시, 건강휴양촌 등의 개념과 함께 슬로시티의 생활정신과 지역민의 삶의 가치를 존중하면서도 관광으로서의 슬로시티를 실현해야 한다. 또한 전남의 경쟁력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강장수벨트 코드를 조합한 실용적, 실체적 관광명소 및 콘텐츠 개발이 필요하다.

하여 슬로시티에 대한 담양의 지향점은 슬로시티 철학과 전통을 추구하면서 대체로 몇 가지 지점에서 중요한 실험무대가 되고 있다. 우선 지속가능한 환경정책의 실천이다. 지속가능하다는 것은 현재의 상태를 유지하면서 조금씩 발전한다는 뜻이다. 환경이 지속가능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연과 자원을 보호해야 한다. 그리고 혁신적인 기술을 개발해 자연과 자원을 손상시키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전형적인 문화현상이 있어야 한다. 문화는 기본적으로 독특해야 한다. 독특함이 모여 다양성을 형성하는 것이다. 문화현상은 문화유산과 문화시설을 남긴다. 문화유산을 대표하는 문화재와 문화유적이 역사 속에서 하드웨어로 존재한다면 문화유산의 또 다른 측면인 정신적인 유산은 소프트웨어로 존재한다. 그것이 도덕이고 윤리이자, 민속이며 풍속이다. 이러한 전형적인 문화유산 덕분에 창평 슬로시티의 ‘대보름 동제(洞祭)’같은 행사가 새롭게 복원되는 일이 가능했던 것이다.



더불어 특징적인 도시구조가 필요하다. 길이 형성되고 집이 지어지고, 또 주거지가 형성되는 과정에서 특징적인 마을과 도시의 구조는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도시구조 속에는 그곳의 역사성이 살아 숨 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성이 슬로시티의 모든 것은 아니다. 도시는 현상을 유지하면서도 시대의 흐름에 적응하면서 지속적으로 변해가야 한다. 이는 도시가 과거지향적이 아니라 미래지향적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편 슬로시티에는 지역의 특산물도 있어야 한다. 창평의 특산물은 쌀엿, 한과 등과 같은 슬로푸드들이다. 이와 같은 특산물이 있어야 경제가 유지되고 느린 삶의 여유가 생기게 된다. 작물을 재배할 때도 전통적인 방식을 유지하면서 자연친화적으로 생산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지역시장 또한 활성화되어 있어야 한다. 작은 도시는 생산하는 물건을 모두 그 지역에서 소화할 만큼의 큰 시장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제품의 대량 소비처는 대도시다. 유럽의 작은 도시들은 식료품과 꽃 등을 직거래 또는 주말시장 등을 통해 거래한다. 우리의 슬로시티들도 5일장 등을 이용해 시장을 활성화하려 노력하지만 그것을 관광과 연결시키지 않으면 어려움이 생길 수밖에 없다. 따라서 재래시장과 더불어 유기농 벼룩시장이 운영되어야 한다. 창평에서는 매달 둘째 주 토요일마다 ‘창평놀토달팽이시장’을 운영하여 지역유기농산물을 주변지역 도시민에게 판매하는 슬로푸드 장터를 열고 있다.

슬로시티의 방향과 과제
슬로시티는 지역주민이 주체가 되는 지역사회기반형(community-based) 생활문화 운동으로, 지역주민의 자발적 역량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방문객으로 인해 지역주민의 생활패턴이 변화되지 않도록 하면서 방문객이 지역주민의 생활방식에 동화되도록 유도해야 한다. 또한 지역의 전통과 가치를 존중하고 문화와 자연의 왜곡을 최소화하는 발전전략을 취함으로써 지역의 사회문화적, 환경적 지속가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창평슬로시티는 그 방향을 생태적이고 느린 관광(slow travel)을 기반으로 하는 녹색성장 시대의 새로운 대안관광상품으로, 체류와 교류를 기본속성으로 개발하는 데 두고 있다. 기존의 주마간산(走馬看山) 식 관광이 아니라 해당지역에 일정기간 체류하면서 지역주민과 교류하며, ‘느린 삶’의 가치를 깨닫는 생활문화관광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느린 여행을 선택한 성숙한 여행자들을 만족시킬 수 있도록 다양한 체험 및 숙박시설, 교통수단, 친환경시설, 생태프로그램 등에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정주환경 정비, 명소기반시설 조성을 1단계로 추진하고 주민역량강화를 위한 슬로라이프 아카데미 등의 교육도 실시하고 있으며, 이벤트 및 체험프로그램 운영 또한 추진하고 있다. 또한 슬로시티 내 유기농 농산물과 지역특산품 판매 활성화를 위한 슬로푸드 장터를 통해 지역 내 주요 관광자원 및 명소와의 체험관광을 벨트화시키고 있다.

이탈리아 그레베 인 키안티, 오르비에토, 브라(Bra) 등 최초의 슬로시티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지역의 전통문화와 정체성을 살리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오래된 건물을 보전하고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전통산업을 활성화시키는 데 힘쓴다. 또한 지역민 스스로가 슬로시티 산업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향후 자신의 지역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를 위해 노력한다. 좁은 골목이 존치되고 그 골목사이로는 예스러움이 엿보인다. 이를 위해 길은 자동차 대신 자전거와 보행자를 위한 거리로 지정한다. 그럼으로써 지역민뿐만 아니라 관광객에게도 볼거리, 즐길거리를 자연스럽게 제공하고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지역의 상권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다. 오픈마켓(open market)은 물론이고 지역마다 전통방식으로 생산하고 있는 와인, 치즈 등의 상품특화를 도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더불어 지역민이 주체가 되는 것 또한 공통점이다. 현재는 지역의 원로들과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슬로시티 운동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그리고 지역의 소외된 계층과 청소년을 대상으로도 지역의 고유성과 정체성을 전수하는 다양한 프로그램과 축제를 진행하고 있다.

슬로푸드 운동과의 연대와 확산 또한 이들 슬로시티의 공통점이다. 이탈리아의 슬로시티 뿐 아니라 영국과 독일의 슬로시티 역시 마찬가지로 지역민이 먹는 먹거리가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생산되고 있는지를 밝히고 전통적 먹거리의 생산방식과 요리법에 대해 적극적으로 지역민에게 알리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지역의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체계적인 교육을 하고 지역 내 학교의 급식관리를 직접 담당한다. 지역에서 생산되는 질 좋은 재료를 바탕으로 한 전통적인 요리법으로 건강한 급식을 제공하기도 한다.

지역 내 차량통제를 통한 도보권을 확보하고 공해발생을 방지하기 위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또한 공통점으로 들 수 있다. 대부분의 슬로시티에서는 대형차량이나 외부차량의 유입을 일정구역으로 한정하여 마을 내에서는 천연가스차량의 운행이나 자전거 이용, 도보만이 가능하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자전거족을 위한 다양한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는 것도 특징적인데, 이는 관광객을 포함한 외래방문객들에게 자연스럽게 마을의 속살을 구석구석 보여주면서 마을에서의 체재시간을 연장시키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지역 내 소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여 지역상권의 활성화로 이어지는 선순환구조를 만들기도 한다.

끝으로 슬로시티로 인해 지역민 스스로 자기지역에 대한 애착심을 높이는 계기가 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중요한 것은 지역의 브랜드가치가 향상되고 지역의 특산품 판매량과 지명도가 높아지면서 중소도시나 농어촌지역이 대도시의 거대자본에 의지하지 않는 독립적 모델이 완성되고 있다는 점이다. 슬로시티 운동의 이러한 점들이 녹색성장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주목을 받고 있는 이유일 것이다.

전통의 맛과 멋,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느긋하게’ 흘러가는 슬로시티는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단어에 홀려 ‘빨리빨리’만을 외치며 살아가는 현대인을 자연스럽게 슬로라이프(slow life)로 이끈다. 모든 것이 느린 이들 슬로시티에서는 천천히 걷는 슬로페이스(slow pace), 전통·자연식품을 먹는 슬로푸드, 자연친화적 주택에서 거주하는 슬로하우스(slow house)와 느긋하게 늙어가는 슬로에이징(slow aging)에 이르기까지 지금까지 겪어보지 못했던 다양한 방식의 슬로라이프를 체험해볼 수 있다.

그리하여 현재 창평슬로시티에서는 ‘느림을 통해 삶의 질을 높인다’는 발상의 전환을 구체화시키기 위한 녹색지역으로의 새로운 실험이 계속되고 있다.

이미지 제공_ 창평슬로시티추진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