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오페라’라는 찬사를 얻어온 알반 베르크(Alban Berg, 1885~1935)의 <룰루Lulu>.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이소영은 그 역사적인 한국 초연무대를 지난 11월 25일부터 28일까지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펼쳤다. “우리시대의 그 어떤 음악도 베르크의 음악만큼 인간적인 것은 없고, 바로 그것이 우리를 경악하게 한다”고 음악학자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1903~1969)는 말했다. 우리를 경악하게 하는 것은 <룰루>의 음악만이 아니다. 오페라 <룰루>의 원작 희곡인 독일작가 베데킨트(F. Wedekind, 1864~1918)의 「땅의 정령Erdgeis」과 「판도라의 상자Die Bchse der Pandora」 역시 당대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며, 점잖은 독자들의 분노를 산 작품이다.
독특한 매력으로 여러 남자들을 파멸에 이르게 하고도 아무런 죄책감이 없는 여주인공 룰루가 그 분노의 주된 원인이었다. 뿐만 아니라 난해하고 몽환적인 베르크의 음악은 초연 당시 오페라극장의 청중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 관객들 또한 내용도 음악도 이처럼 도발적이고 난해한 현대오페라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을까.
국립오페라단은 <룰루>를 공연하기 전부터 이미 베르크의 <보체크Wozzeck>, 리하르트 슈트라우스(Richard Strauss, 1822~1905)의 <살로메Salome>, 아리고 보이토(Arrigo Boito, 1842~1918)의 <메피스토펠레Mafistofele> 같은 작품들을 공연해 우리나라 오페라 애호가들을 단련시켰다. 불협화음과 반음계가 자주 나타나는 오페라뿐만 아니라 무조음악(無調音樂)장조나 단조 등의 조에 의하지 않고 작곡되는 음악을 사용한 작품까지도 아이디어 넘치는 탁월한 연출력으로 흥미를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덕분에 <룰루> 역시 관객들에게 대단히 어려운 작품으로는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다.
최근 유럽의 오페라 프로덕션들을 살펴보면 텅 빈 듯이 보이는, 극도로 미니멀(minimal)한 무대를 가수들의 공격적인 연기 및 초현대적 조명과 영상기술로 채우는 것이 대세다. 독일의 여성연출가 크리스티나 부스(Kristina Wuss)와 무대, 의상, 소품 디자이너 루카스 놀(Lucas Noll)이 선보인 이번 무대 역시 사실주의와는 거리가 있었다. 무대 중앙에는 구식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인물들의 등장과 퇴장을 담당했지만, 그 엘리베이터를 휘감고 있는 뱀룰루를 상징하는 원죄의 동물 형상의 나무, 공중에 매달린 의자들과 시계, 바이올린과 새, 나비 등은 초현실주의 회화작품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액자 형태의 대형 모니터를 무대 좌우와 안쪽에 설치해놓고 극의 상황과 인물의 심리상태에 따라 모니터 속 풍경과 색채를 변화시킨 것도 효과적인 시도였다.
룰루 역의 소프라노 박은주는 마치 맞춤옷을 입은 듯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이 어려운 배역을 소화했으며, 어린아이처럼 천진하면서도 저항하기 어려운 관능미를 지닌 룰루 그 자체처럼 보였다. 연속고음에 따른 피로감도 박은주의 목소리에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특히 쇤 박사를 살해하기 전 부르는 룰루의 노래에서는 콜로라투라(coloratura)18∼19세기 오페라 아리아 등에 즐겨 쓰인 선율 또는 그 양식 기교가 찬란하게 빛났다.
베이스바리톤 사무엘 윤은 주의 깊게 조절된 에너지와 적절한 뉘앙스로 지능적이고 복합적인 남자주인공 쇤 박사 캐릭터를 탁월하게 형상화했다. 특히 룰루 때문에 자살하거나 살해당한 남자들은 3막에서 새로운 배역으로 무대에 돌아와 룰루에게 복수하게 되는데, 사무엘 윤은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범 ‘잭 더 리퍼’로 이중배역을 맡아 거침없는 연기력으로 관객에게 충격을 안겼다.

오페라의 한 장면

언제나 룰루의 곁을 맴돌며 헌신하는 게슈비츠 백작부인 역과 쇤 박사의 아들 알바 역은 독일가수들이 맡았다. 메조소프라노 우테 되링(Ute Dring)은 룰루를 향한 강렬한 감정을 보여주는 ‘모니터 속 실루엣 연기’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알바 역의 볼프강 슈바닝어(Wolfgang Schwaninger)는 진지하고 섬세한 배역의 성격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한편 엘리베이터 속 순백의 조명 아래 뿌려진 선혈은 룰루가 살해당하는 마지막 장면을 지울 수 없는 기억으로 관객의 뇌리에 새기기도 했다.
지휘자 프랑크 크라머(Frank Cramer) 역시 TIMF 앙상블과 함께 오페라 <룰루>의 음악적 관능미와 예측 불가능한 변화의 묘미를 절묘하게 살려냈다. 이번 공연을 통해 관객들은 현대음악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다 해도 현대오페라의 연극적인 재미에 충분히 설득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하여 오페라 <룰루>는 연출력에 따라 현대오페라도 얼마든지 이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준 또 하나의 획기적인 공연이었다.

오페라 <룰루> 포스터

이미지 제공_ 국립오페라단
李庸淑 1962년 서울생. 음악평론가. 최근 저서로 『춤의 유혹』, 『지상에 핀 천상의 음악』 등. rosina@cho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