낭독콘서트, 모두가 나누고 향유하는 육성의 제단
내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당신이 먼저 왔으니 나는 당신의 고통에 오활(迂闊)곧바르지 아니하고 에돌아서 실제와는 거리가 멀다는 뜻하다. 그것도 살이 무너지는 문둥이 몸으로 오셨으니 내 아둔함은 꽃도 하나의 무너짐이라는 것을 종국에는 조금 알까 싶다. 그마저도 당신 떠나신 몇 십 년 후의 소슬함이 고작이다.

제일 먼저 누구의 이름으로/이 좁은 지역의 한 포기의 꽃을 피웠더냐.//하늘이 부끄러워/민들레꽃 이른 봄이 부끄러워.//새로는 돋을 수 없는 빨간 모가지/땅속에 움돋듯 치미는 모가지가 부끄러워//버들가지 철철 늘어진 초록빛 계절 앞에서/겨웁도록 울다가는 청춘이요 눈물이요//그래도 살고 싶은 것은 살고 싶은 것은/한 번밖에 없는 자살을 아끼는 것이요.
-한하운, 「봄」

몸은 마음의 바람보다 빠르고 속절없이 무너져갔다. 아니 문드러져갔다. 이렇게 말해놓고 나는 그런 단정이 내 자신의 것이 아닌 한하운(韓何雲, 1920~1975) 당신의 것임을 늠연히 떠올린다. ‘무너져갔을 것이다’나 ‘문드러져갔을 것이다’라는 추측형의 조심스러운 서술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여느 때의 내 문장일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추측이 아닌 단정의 말투를 썼다. 아니 이것은 내 직감이나 선험적인 판단이 아닌, 그분의 혼백이 짐짓 내 어눌한 문투(文套)에 잠시 갈마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고통은 추측이 아닌 현실, 그 현장의 멱살을 잡고 머물러있다. 그것은 내가 겪었던 고통이 아닐지언정 시제(時制)의 문제도 아니다. 불가피한 확인과 대면의 문제일 터였다.
인천 중구 해안로길 변에 위치한 옛 창고건물인천아트플랫폼 안에서 나는 한하운, 당신의 시에 묵은 귀를 주었다. 말끔하게 리모델링된 건물 안에는 적막과 시음(詩吟)이 서로 오랜 연분이 있는 양 떠돌다 가라앉고, 스미다 번져나간다. 나는 이상하게 당신의 시가 한소끔 번질 때마다 당나라 때 이하(李賀, 790∼816)당나라 시인가 당겨왔다. 그러면서도 이하는 자꾸 앞서거니 뒤서거니 밀렸다. 늦가을 저녁의 개조된 옛 창고건물 안에는 학생부터 영화배우, 교사, 시인, 소설가, 심지어 진행자까지 문둥이 시인의 속내를 제 속으로 우려내고 있었다. 영속(永續)을 모르는 우리네 몸뚱이들에 깃든, 갖은 욕망의 너겁을 또 다른 빙의의 허깨비처럼 어두운 무대 저편으로 떨어뜨려놓고 본다. 당대 나병(癩病)이라는 병마를 지닌 유망한 시인이 당신처럼 외따로울 수가 있을까. 우리 시사(詩史)에서 오래도록 변방의 파랑새 울음소리나 보리피리 속에 외따로 결락되었다는 것이 슬프다. 당신의 시문학은 결코 아마추어리즘도, 동호인 수준의 장애인문학도 아니었지만 그에 대한 연구는 일천하고 적막했다. 과문(寡聞)하지만 당신만큼 병에 대한 치열한 대응의지와 그 절절한 시의 결로(結露)이슬이 맺힌다는 뜻를 보인 시객도 드물다. 그것은 견인주의자(堅忍主義者)의 어록 같은 시편이다.
이하는 「숭의리체우(崇義里滯雨)」라는 시에서 “젊은 나이로 떠도는 한을 품고/온통 백발이 된 것을 보고 꿈속에서 속절없이 울었다”壯年抱羈恨(장년포기한)/夢泣生白頭(몽읍생백두)고 말한다. 그것도 꿈속에서 말이다. 그 지극한 슬픔은 그러나 꿈속의 것이다. 그런데 당신은 이하보다 더 깊은 우환의 몸을 생시에 지녔으니 당신께 온 시마(詩魔)마저도 시난고난 이 어둑한 몸에 살아야하나 난처하기도 했을 것이다.
나는 객쩍게도 당신이 나보다 먼저 살았었구나라는 새삼스러움으로 한하운 당신을 불러온다. 죽었기 때문에 ‘살았었다’가 아니라 당신의 육체적 구렁에서 돌올(突兀)높이 솟아 우뚝하다는 뜻해져 나온 그 시혼의 목소리들로, 현재를 사는 과거형으로 ‘당신은 살았었구려’하고 되뇌게 된다.

낭독콘서트 모습들

이런 고통의 서정과 간원(懇願)간절하게 원함의 시문(詩文)을 번져놓고 그 찬연한 얼룩의 자리를 자꾸 더듬고 쓰다듬어보게 됨은 늦되나 탓할 이도 드물어 외려 적적하다. 그러니 이제는 당신의 ‘살았었구나’가 ‘살았구나’의 확언으로 넘어가 종내 ‘살아있구나’의 확신으로서 그 육성의 시제가 현재진행형이 됨은 스스럼이 없다. 당신의 시문을 읊조리며 가슴 한 켠에 스며드는 이 새삼스러운 자리는 당신의 목소리가 몸이라고 하는 소멸의 번제(燔祭)에서 벗어났음이다. 자신의 살점을 소멸의 악머구리에게 헌 신발처럼 벗어주었음에도 그 혼의 울림만은 결기의 활자로 남겨두어 결결하다. 그것은 당신의 말처럼 ‘자살을 아껴는 것이요’라는 진술에서 더 연장된 바 크다. 비관을 크게 얻었다면 자살보다 못한 문둥이 신세였음에도 자살을 아낀다는 말은 당신이 그 누구보다도 출중한 삶의 한가운데를 지사(志士)처럼 지킨 존재임을 드러낸다. 그럼에도 속울음 깊은 남도길이야 어쩌겠는가.

한하운의 친필원고와 사진들

그리고 당신의 외로웠을 섹스를 떠올린다. 당신이 당신의 성(性)을 누구보다도 호호 불어가며 아끼지 않았을까만 당신도 당신의 궁핍한 성을 문둥병으로 다 허물어 허공처럼 말갛게 잊지는 못했을 터이다. 변방이 된 것이 어찌 성뿐이겠는가 싶다가도 당신의 요철 많은 편력 속에 타락한 시대의 성을 질타하는 시구를 대할 때면 나야말로 변방에 내쳐야 할 잔망한 성을 꾸리지 않았나 뒤돌아보게 된다. 그러나 한끝 당신께만은 좀 더 분방한 성의 뒷방을 해맑은 곁두리처럼 내어드리고 싶음도 한 마음이다.
그럼에도 당신은 당신의 성적 리비도(libido)를 개인적인 차원의 한(恨)이나 본능의 좌절로 내두지 않고 보다 대사회적인 소수자, 즉 나병환자들의 인권개선과 재활을 위한 공공선(公共善)을 위하는 데 심신의 물꼬를 터주었다. 불구가 아님에도 불구의 성을 조장하는 사회적 시선을 당신은 누항(陋巷)의 가래침처럼 뱉어버리고 싶었을 게다.
심신의 여러 허물어짐도 많았을 테지만 수없이 몸이 문드러지는, 아니 차라리 몸과 맘이 고름처럼 흘러내리는 그 처연함 속에서도 꽃의 자연을 보고 그 꽃에 찬연한 시샘을 가졌을 것이다. 꽃과 문둥이라는 두 대척적인 상태는 그러나 이내 하나로 수렴될 날을 가진다. 그것이 지상의 시간이 가져다주는 공평한 소멸의 나눔이 아니겠는가.
당신의 육성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그걸 기억할 수 없음이 당연하면서도 한편 다행스럽게 여긴다. 살점이 나날이 문드러져감에도 시구에서는 오히려 결기와 한의 문자향(文字香)이 도드라졌음은 여일하다. 비록 몸은 소멸의 제단에 도드라지게 내어줄 수밖에 없었음에도 그 소멸의 인간 숙명에 대한 당신의 처절하고 애잔한 그리고 결기에 찬 육성의 눈길은 더 웅숭깊어졌을 것이다.
“낯선 친구를 만나면/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라고 일갈한 당신은 그 몸마저 종내 다 육탈(肉脫)시켰으니, 문둥이는 갔다. 당신을 담았던 문둥이 몸은 영원히 당신 것이 아니다. 이제 당신 육성의 절절함을 언제까지라도 동무처럼 나눠가지려는 사람들만이 당신의 영혼을 되살린다. 이제 육탈의 제단을 걷어치우고 모두가 나누고 향유하는 육성의 제단, 그 무대가 흐뭇하고 편안한 슬픔으로 번져간다. 그것은 나눔의 제단이다.
이것이 바쳐도 바쳐도 되살아나는, 아리도록 가슴 찬 울림으로 되살아나는 육성의 본향(本鄕)인 것이다. 제사에서 물린 퇴주(退酒)를 음복하듯 당신의 시음은 결코 더불어 나누어도 줄어들지 않는 한 즐거운 고해(苦海)의 인상이 될 것이다.

자료전, 그 찬연한 외주물집에서
당신은 이제 생전에 살던 인천 십정동 집과 여러 우거(寓居)들을 흔적도 없이 잃었다. 축산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당신이 보기에 세상에는 돼지들의 집이 빽빽하고 밤낮으로 불빛 휘황하거늘, 당신의 체취가 스민 누옥(陋屋)은 그 흔적조차 아득하다. 그 묘연한 종적을 어느 지연(地緣)의 한터에 복원한다 한들 아쉬움이 없겠는가만, 그에 앞서 또 한 집이 세기를 넘겨 인천의 옛 창고건물 자리에 불빛을 달았다.

자료전 모습

나는 당신의 저서와 육필원고가 깃든 전시관이 그 어느 때보다 달가웠다. 당신의 여러 저작과 『보리피리』 시집이 초판부터 여러 개정판 그대로 식구들처럼 모인 그 전시관 한 귀퉁이 환한 전시대를 떠올리자 뒤늦게 이 시가 떠올랐다.

간밤에 얼어서/손가락 한 마디/머리를 긁다가 땅 위에 떨어진다.//이 뼈 한 마디 살 한 점/옷깃을 찢어서 아깝게 싼다/하얀 붕대로 덧싸서 주머니에 넣어둔다.//날이 따스해지면/남산 어느 양지터에 가려서/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다.
한하운, 「손가락 한 마디」

얼마나 처연했을까. 아 하고 소리 지르기도 전에 소리 없이 떨어져나간 손가락 한 마디가 얼마나 황망하고 애처로웠을까. 그러나 당신은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한번도 울어본 일이 없다’라며 짐짓 의연하게, 아니 허망하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여기 당신의 자칫 잃어버릴 번한 혹은 흩어졌던 말들을 모을 수 있었다는 것은 천연(天緣)에 가깝다.
그러니 그 손가락 한 마디는 죽어서의 것이 아니라 살아서의 것이고, 당신의 천형과 울음의 분광(分光)은 세속적인 그런 것과는 유(類)가 다른 깊이로 외따롭게 번져갔을 것이다. 어디로 번져갔겠는가. 그것은 바로 당신의 시의 흉부 속으로 부드러운 가시가 되어 파고들었을 것이다.
잃어진 손가락 한 마디를 ‘남산 어느 양지터에 가려서/깊이 깊이 땅 파고 묻어야겠’지만 당신의 육필원고와 시집을 비롯한 저서는 오히려 이제 보금자리를 찾았다. 불빛 속에 정처(定處)를 가졌다. 한 존재에서 모든 존재에로 번져갈 징검돌을 놓았다.
당신은 이제 그토록 몸에 묶여 탄식하고 울부짖던 파랑새의 영혼을 이 투명하고 밝은 둥지에 불러들일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유리문을 통해 당신을 보러 들어올 것이다. 아, 그토록 서러웠던 한하운 당신이 있는가하며 기웃거릴 것이다. 그 기웃거림은 당신이 그토록 갈구하던 고향 같은 사랑의 다른 말일 수도 있지 않을까. 가슴 속에 들국화 한 무더기를 슬쩍 스며가지고 올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당신과 초등학생인 아들의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아들을 데리고 온 한 여인의 당돌하고 재밌는 방문도 보았다. 당신은 나보다 먼저 빙그레하며 오랜만에 웃었을 게다-이제야 좀 유명해지셨군요. 누구에게도 버림받은 이름이 아니라, 누구에게도 빌미가 될 수 있는 이름, 어떤 구름하운(何雲)인가 높이 쳐다보고 깊이 굽어보는 이름을 가지셨군요.
나비눈의 시새움이 아닌 연모와 동감의 언저리로 모이는 집, 그런 당신의 모음들이 드난살이를 접고 짐짓 누구의 눈길도 달게 받는 크리스탈 큐브인천아트플랫폼 내 전시장, 그 밤의 찬연한 외주물집으로 어둠 속에 소박한 광채의 귓속말을 보았다. 당신의 특별전은 기간과 관계 없이 항구도시의 한 켠을 낮달로, 또 밤별로 유구하지 않나 싶다.
다가오는 누구라도 어느 때라도 그 어느 마음자리라도 여기 그 문드러지던 몸에서 온전히 받아 길어 올린, 이 돌올한 시편과 아스라한 육필의 생음(生音)을 들으러 불빛은 자주 깊어질 것이다. 
찬연하지만 고적한 이 해변 외주물집에 들판의 꽃 한 무더기를 데려갈까 잠시 망설이는 사람들이 번져올 것이다. 그러나 그 망설이는 팬들과 후학조차 늘어날 계제이니 아름답다. 사랑은 분별 앞에서 한낮에도 어둡고 어리석다. 당신 앞에, 아니 우리들 모든 사람들, 아니 모든 숨 탄 것들은 세월 앞에 문둥이다. 우리들 본연의 문둥이라는 운명을 잠깐만이라도 들여다보면 서럽고 따스하고 아름답다. 그 문둥이 너머의 문드러지지 않는 마음을 밝히는 시의 숙명이 있다니, 그걸 먼저 헤아리고 간 파랑새가 있다니 기껍다.

劉鐘仁 1968년 인천생. 시인, 미술평론가. 2009년 제2회 플랫폼 미술비평상 당선. 최근 글로 「일본인들이 아꼈던 한국의 정서」, 「진경의 변모와 그 계보학적 미래」 등. jongin-yu@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