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기념관의 꿈
남산기슭의 고목들로 둘러싸인 나무숲 사이로 요란스럽지 않게 단아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서있는 건물이 있어 발걸음을 머물게 한다. 건물은 해발 200m 위 자연환경 속에서 여유를 부리는 등산객들의 낙엽 밟는 소리와 삼삼오오 해맑게 떠드는 학생들 속에서 의연하게 서 있다. 고인돌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기념비가 겨울의 스산함을 더해주지만 석양에 비친 열두 개의 유리기둥은 마치 땅 속에 무릎까지 빠져있는 모습처럼, 일어서듯 서 있는 모습처럼 금세라도 환하게 웃는 표정으로 불을 밝힐 것 같다.
새로운 기념관의 건축가인 임영환, 김선현 부부는 “주어진 가로 35m, 세로 49m의 직사각형 대지 안의 흙을 건물의 체적만큼 들어내고 그것을 열두 개의 매스(mass)덩어리로 분절해 같은 자리에 다시 앉혔다. 마치 선큰(sunken)움푹 들어간된 대지의 틈에서 열두 개의 기둥이 솟아나오는 듯한 형상을 취하게 된다. ‘12’라는 숫자는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의 후광에 가려진 단지동맹(斷指同盟) 12인의 역사적 인물을 상징하는데 1909년 자신들의 무명지(無名指)넷째 손가락를 끊고 대한독립을 맹세했던 그들 속에서 안중근 의사를 재조명하고자 했다. 아무런 장식이나 꾸밈 없이 우뚝 선 열두 개의 기둥은 그들의 뜻과 정신을 반영한다. 낮에는 열두 개의 육중한 기둥이 마치 위패와 같이 옛 신사의 터를 짓밟고 당당하게 서있을 것이며, 밤에는 열두 개의 매스가 조명과 함께 남산을 찾은 많은 이들에게 은유적인 빛을 밝혀주길 바란다”고 말한다.

방과 방 사이로 보이는 남산

새로운 기념관은 남산공원에 자리 잡고 있다. 남산은 조선을 건국할 때부터 4대 안산(案山) 중 하나로 풍수지리를 바탕으로 한 중요한 산 중의 하나였으며, 인근 사람들에게는 휴식과 놀이의 장소였으나 1925년 조선신궁을 만들고 신사참배를 강제했던 곳이기도 했다. 이후 정부에서는 조선신궁을 비롯한, 일본이 남산에 남긴 지배적인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는데 1956년 8월 15일 이승만 대통령의 팔순을 기념하여 그 부지에 이승만 동상 제막식을 거행하고 1959년 남산 정상에 이승만 대통령의 호인 우남(雩南)을 따서 우남정을 건립, 남산이 가지는 상징성에 독재정부의 이미지를 입히기 시작했다.
1960년대 이후의 정부도 전 정권과 마찬가지로 일제의 이미지를 지우기 위한 노력을 시도했다. 민족정신과 독립정신을 부각시켜 일본에 의해 계획되고 조성되었던 남산공원 일대를 해방시키고자 한 것이다. 그에 따라 크고 작은 동상과 기념비를 세우고 1963년 조선신궁 자리에는 야외음악당과 어린이 놀이터를 준공했으며, 이후 도서관, 식물원, 어린이 회관, 안중근 의사 기념관 등도 생겨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전경

하여 남산이 가지는 상징성에 독재정부의 이미지를 입히려 했던 과오의 흔적 속에서 새로운 기념관이 일제치하의 설욕을 딛고 일어나 땅을 파헤치며 태어나기를 바란다. 건축가가 꾸어왔던 꿈처럼 낮에는 열두 개의 육중한 기둥이 옛 신사의 터를 짓밟고 당당하게 서 있고, 밤에는 열두 개의 매스가 남산을 찾는 많은 이들에게 은유적인 빛을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유명인사들이 만든 안중근 의사 기념비들   경사로를 따라 내려가면 오른쪽엔 옥중유묵이, 왼쪽에 입구가 나온다

기념관 곳곳을 둘러보며
기념(記念)이라는 말은 지난 일을 기억한다는 의미로 쓰인다. 나아가 회화, 조각, 건축 등과 같은 여러 가지 물리적, 시각적 형태로서 ‘시간 속에서 지속되어지는 기억’을 의미하기도 하는데 과거의 시간을 현재로 재현시키는 것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일상에 스며들어 앞으로의 새로움을 제시하는 것이다.
1990년대 이전 기념관은 주로 이데올로기적 상징성에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상징화를 통해 공동체로 하여금 동질성을 느끼도록 사회적 기능을 담당해왔는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로서 공동체의 구성원을 동질화하거나 집단의 신화에 개인을 투시하게 하는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이유로 기념관은 권력행사의 고차원적 수단이자 상징권력으로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새로 지어진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기존의 독립기념관처럼 정치적 이념의 목표를 위해 권위적인 스케일로 계획되거나 위엄을 높이기 위해 석재를 사용한 외관으로 상징화되는 것을 지양했다. 새로운 기념관을 통해 건축가는 이 시대의 기념관이 지니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장소성을 넘어 남산공원의 자연에 순응하면서도 형태와 재료의 자유로움과 은유 속에서 반투명성 외피를 통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허물고 공간의 확보가 아닌 일상으로의 초대를 계획하고자 했다. 다른 기념관이 지니고 있는 우아하고 권위적인 정면성이나 입구 대신 관람객들이 완만한 경사로를 걸어 내려가 모퉁이를 돌아야만 입구에 다다르게 되는 것 또한 안중근 의사의 어록과 유묵(遺墨)을 지나는 동안 벽에 기대서서 숲의 소리와 함께 안중근 의사의 외침을 들으며 접근하도록 한 것이다.
겨울에는 흐르지 않지만 벽을 따라 흐르는 물은 마치 나라를 잃은 통한의 눈물 같다. 그 물소리에 안중근 의사가 의거를 거행하기 전 지었던 「장부가(丈夫歌)」의 “만셰 만셰여 대한독립이로다. 만셰 만셰여 대한동포로다”라는 외침이 들려오는 듯한 까닭은 유명인사들이 만들고 줄지어 놓인 기념비 때문이 아닌, 한 건축가의 고뇌 때문이리라.
새로운 기념관은 열두 개의 유리매스 외부형태가 서른여섯 개의 방을 만들어 안중근 의사의 행적을 이야기하는 건축적 형태를 취하려 했다. 지하 1층에 있는 입구로 들어가면 3개 층에 걸쳐 트여있는 커다란 참배홀을 마주하게 되는데 명주옷을 입은 백색의 좌상과 안중근 의사의 단지 당시 피로 그린 것으로 알려진 태극기를 마주하게 되어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지하 1층 참배홀

또한 지하 1층부터 지상 2층의 방에는 안중근 의사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사상과 활동이 여러 형태로 전시되어 있다. 층과 층을 연결하는 계단에는 활짝 열린 유리를 통해 자연을 보는 즐거움과 휴식을 더 하고, 방과 방사이의 틈을 통해서는 자연과 도시를 보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밖에서 언뜻 보기에는 무덤덤한듯 하지만 건축을 이루는 재료가 만드는 독특한 맛과 그 구축방식의 아름다움을 통해 단순히 기념품을 소장하는 곳이 아니라 머무름을 만들고 싶은 모습이 보인다. 그럼에도 건축가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내부공간에서는 참배홀과 출구의 동선이 충돌되거나 외부의 밝고 분절된 디자인 문맥과 어휘들이 어둡고 인위적인 전시공간 연출로 퇴색되어 어색한 것은 왠지 씁쓸하기만 하다. 전시와 운영이 건축가의 의도를 지켜주지도, 건축과 소통하지도 못한 모습이다.
하여 오후 다섯 시를 끝으로 기념관을 분주히 빠져나왔다. 그러면서 안중근 의사의 향기를 차 한 잔에 담아보았으면 하는 섭섭함을 뒤로한 채 빼곡히 세워져 있는 기념비를 보았다. 세간의 관심 속에 개관했지만 ‘초대받지 못한 건축가’로 연일 건축계가 시끄럽던 때였다. 그런데 행여 ‘초대받지 못한 시민’으로 또 시끄러워지는 것은 아닐까. 시민의 일상 속에서 안중근 의사의 삶이 느껴졌으면 한다.

이미지 제공_ 필자
黃淳佑 1960년 인천생. 건축가, (주)건축사사무소 바인 대표이사. 주요 작품으로 인천아트플랫폼, 돌체소극장 외 다수. hswvine@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