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능경, <신문 읽기> 퍼포먼스의 한 장면

<1970-80년대 한국의 역사적 개념미술:팔방미인展>은 소위 아방가르드 미술이라 불리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 흐름에 대한 보고서다. 혹자는 이 시기를 ‘실험미술’의 시기라 부르기도 하며, 혹자는 아방가르드로 표현하기도 한다. 그만큼 현대 한국미술사에서 좀처럼 전례를 찾기 어려운 파격적 형식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이 전시는 대안공간 쌈지스페이스의 관장을 거쳐 경기도미술관 관장을 퇴임하기까지 시장논리로는 결코 수용될 수 없었던 ‘대안’미술을 끌어안은 김홍희 전(前) 관장의 자취를 오롯이 느낄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더해졌다.
‘팔방미인’이라는 제목과 달리 참여작가인 김구림, 김용익, 이강소, 박현기(1942~2000), 성능경, 이건용, 홍명섭, 곽덕준에 대한 이미지는 사실 미술시장과 담쌓은, 대중에 전혀 개의치 않은 ‘괴짜’ 혹은 ‘외골수’ 이미지가 강하다. 그러나 기획자의 시각은 이와 달랐다. 전시서문에서는 그들이 작품제작뿐 아니라 미술이론까지 두루 관심을 가진 ‘지성파 아티스트’였기 때문에 이 전시를 팔방미인이라 이름 붙이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실제로 전시장에는 아카이브실을 따로 두어 S.T.그룹1970년대 전위예술 단체과 같은 1970~1980년대 소그룹의 활동기록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는데 깊이 있는 기획이라 평가할만한 이유는 바로 이 점에 있다. 30년 넘게 간직되어 온 색 바랜 학회지에는 한스 하케(Hans Haacke)독일의 화가와 헤르베르트 마르쿠제(Herbert Marcuse, 1898~1979)미국의 철학자의 글을 번역, 게재하는 등 당시 작가들의 지적욕구에 대한 기록들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팔방미인展> 포스터

2층에 마련된 본전시를 보기 전, 1층에서는 1975년 백록화랑에서 있었던 퍼포먼스와 이번 전시 오프닝에서 재현된 성능경과 이건용의 퍼포먼스 동영상이 상영되었다. 전시 오픈에서 <신문 읽기>와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는 성능경, 이건용이 초로(初老)의 몸으로 재현에 임했다. 성능경은 퍼포먼스 중간 선글라스 대신 돋보기를 바꿔 끼고 신문을 읽었다. 신문기사를 면도칼로 오려내는 주름진 손은 심하게 떨렸으며, 쪼그려 앉아 발 앞의 바닥을 분필로 칠하고 그 칠한 부분을 앉은 채로 지나가는 맨발(이건용) 또한 12월 추위에 퍼렇게 움츠려 있었다. 그는 15미터 정도를 지나간 후에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반백의 노인이 되어 체력의 한계를 넘나들면서까지 그들이 열심히 임했던 이 퍼포먼스는 어쩐지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잃어버린 젊음이 서글픈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이 든 육체가 아방가디스트라는 자부심을 더 빛나게 해 주었다. 그러나 정작 서글픈 것은 아방가르드 미술이 피터팬의 네버랜드처럼 지금의 시장중심 현실에서는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또한 예술옹호적 입장을 표방한 사회학자 램버트 쥐더바아르트(Lambert Zuidervaart)는 “진정한 실험은 진공상태에서 일어나지 않는다”라며 스스로를 아방가디스트라 칭하는 예술가들에게 그들의 실험이 결코 스스로 존재하는 독자적 결과물이 아니라 과거를 기억하고 재생시키며, 현 시대를 반영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미루어 본다면 이들의 작품이 역사적 가치를 지녔지만 생명력 없는 화석인양 치부해버리는 오늘의 현실은 어쩌면 예상했던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2층 전시실에 펼쳐진 풍경은 이러한 비판에 아랑곳하지 않는 듯 네버랜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나무와 뿌리가 엉켜있는 거대한 흙덩이를 전시장에 옮겨 놓은 이건용의 대표작 <신체항>은 <달팽이 걸음>이나 <손의 논리> 같은 1970년대의 퍼포먼스와 드로잉 작품을 함께 감상해보면 ‘몸’과 관련된 큰 흐름을 파악할 수 있다. 제의적으로 보이는 그의 퍼포먼스와 꿈틀대며 의인화된 나무 드로잉을 보면, <신체항>은 모노하(もの派)사물을 그대로 놓아둠으로써 사물과 공간, 위치, 상황, 관계 등에 접근하는 예술의 선(禪)사상에 영향을 받아 타자와 나의 몸을 동일시하는 ‘물아합일’을 시각화했음을 추정할 수 있다.
또한 성능경은 가장 ‘텍스트’에 집중한 작가로 신문 퍼포먼스나 <특정인과 관련 없음> 등과 같은 작품으로 보건대 그가 텍스트와 콘텍스트의 불안정한 연결고리, 그리고 현대사회에서 떠돌아다니는 정보의 과잉현상 등에 한결같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반면 김용익은 가장 지적인 작업방식으로 시선을 끄는데 커다란 광목천을 늘어뜨린 <평면 오브제>와 이것을 트롱프뢰유(trompe-l'œil)실제의 것으로 착각할 정도로 세밀하게 묘사한 그림 형식으로 마치 벽에 천이 늘어져 있는 것처럼 그린 <스프레이작업 바리에이션>을 비교해보면 김용익이 누구보다 이분법적 사고를 깊이 연구하고 작업에 수용했으며, 또한 철저한 분석 하에 치밀하게 전개해갔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내가 문제 삼고 있던 것은 한 명제의 다각적 해석과 연습”이라고 밝힌 그의 짤막한 노트와 작품 제목들을 참고해보면 참여한 작가들 중 가장 자신의 작품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용, <달팽이 걸음> 퍼포먼스의 한 장면

박현기는 TV브라운관과 나무, 돌과 같은 자연물을 함께 배치해 서정적인 작품을 선보였다. 강 위에 TV를 띠우고 화면에는 잔잔한 파동이 이는 수면을 상영한다.<반사 시리즈> 백남준(1932~2006)의 작품에서 기계성이 부각된다면, 대조적으로 박현기의 TV는 자연에 흡수되어 버렸다. 물질과 비물질, 인공물과 자연물의 어울림은 상당히 명상적인 풍경을 자아내며, 금성사(Goldstar) 상표가 붙은 빈티지 브라운관TV가 요즘의 세련된 모니터로는 대체될 수 없는 형태요소의 한 부분이 된 것도 감상에 재미를 준다. 이밖에도 곽덕준의 나르시시즘적이고 위트가 넘치는 작품 <대통령과 곽>, 김구림의 역사적인 프로세스 아트(Process Art)작품이 진행되어 가는 과정을 완성된 결과보다 중요시하는 미술경향 <현상에서 흔적으로>, 미니멀리즘(minimalism)을 재해석한 홍명섭의 <디 벨로핑(de veloping)>시리즈, 자연물에 하얀 회칠을 하여 죽음과 관련한 영원성의 문제에 접근한 이강소의 <리드(reed)> 작품도 당시 아방가르드 미술의 치열한 열정을 가늠케 해주는 귀중한 사료(史料)다.

전시장 내부 전경

동시대 미술의 스펙터클에 익숙한 관람자라면 이 작품들이 사뭇 어설퍼 보일지도 모른다. 비록 이들의 작품이 스스로 창조되었다는 자가당착에 빠져 있고 시장성 있는 감각적인 작품도 아니며, 스펙터클이 지닌 흡인력도 갖추지 못했을지라도 피터팬이 영원한 소년으로 남길 바란 것처럼 영원한 아방가디스트로 남길 바라는 이들의 열정만큼은 예술영역의 확장이라는 빛나는 업적을 이루었다고 평가받을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

* 램버트 쥐더바아르트 저, 『아트 인 퍼블릭Art in Public』(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 p.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