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답다는 것은 의미 있는 장소로 가득한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다.
인간답다는 말은 곧 자신의 장소를 가지고 있으며, 그 장소를 잘 알고 있다는 뜻이다.
에드워드 렐프(Edward Relph),
『장소와 장소상실Place and placelessness』 중에서

공간이론에 꽂혀있던 몇 년 전 당시 책들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적절하다 싶었다. 곰곰이 곱씹어보니 보이지 않던 맥락이 드러났다. 그것은 장소성과 역사성의 의미가 과잉된 예술활동에 의해 오히려 장소성과 역사성이 상실되고 변형되는 ‘부조리한’ 상황에 대한 것이었다. 인천아트플랫폼의 장소성과 공간성을 둘러싼 외부이슈 중 가장 핵심은 구(舊)도심과 관련된 것으로 인천아트플랫폼이 속한 중구는 항구와 연결된 구도심이다. 일제시기 식민지 근대성의 여러 역사성과 장소성을 가지고 있으며, 또 동인천역과 신포시장 근처는 2000년대 전까지 인천의 핵심상권이기도 했다.

인천아트플랫폼 내 설치된 아트벤치

사실 인천아트플랫폼도 일제시기 물류창고를 리모델링한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주변의 차이나타운, 멀지 않은 동인천 구상권과 공원 등으로 인해 인천아트플랫폼은 구도심 문화재생 전략기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구도심 문화관광 벨트는 구도심의 재생을 문화예술로 접합하려는 문화정책의 전략 상 키치(kitsch)와 관광의 장소상실에 놓여있고 타자화된 표상이 곳곳에 이식되는 것이다. 이런 부분은 연고자에게는 너무 익숙하고 비연고자에겐 너무 거친 설명일 수도 있다. 필자는 인천아트플랫폼이 선취하고 있는 구도심의 장소성과 역사성에 대해 비평적인 입장에서, 최근 인천문화재단에 의해 진행된 <도시 속 예술프로젝트>를 그러한 사례로 비평하고 이를 인천아트플랫폼의 운영방안과 연결해보려 한다.  

인천아트플랫폼 내 설치된 시계탑

<도시 속 예술프로젝트>는 ‘가만히 들이다’를 주제로 인천아트플랫폼 근처에 아트벤치 열두 개와 시계탑, 조형물을 각각 하나씩 제작, 설치한 공공미술 프로젝트다. 최근 인천아트플랫폼이 하이틴 드라마 <드림하이>의 촬영장소로 사용되는 것을 보며 이러한 공공미술 작업을 세트라 여기기도 했는데, 현장을 방문해보니 이는 인천아트플랫폼의 현재적 상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작품들은 인천문화재단에 의한 프로젝트로 진행되었지만 설치장소인 인천아트플랫폼과의 긴밀한 협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이틴 드라마의 세트처럼, 관람객들의 포토월처럼 건물 사이사이에 놓여있었다.
오랜 준비 기간이 반드시 예술행동의 진정성을 보장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설프고 형식적인 지역맥락 작업과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더라도 ‘좋은’ 작업이 공공적이라고 생각한다. 가급적 프로젝트를 기획하고 진행한 기획매개자들과 작가들의 상황, 현실 그리고 노력을 거칠게 폄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럼에도 이번 <도시 속 예술프로젝트>는 인천아트플랫폼이 가진 장소성과 역사성을 부조리하게 왜곡함으로써 예술행동이 장소상실에 협조한 부분이 있다. 여기서 부조리란 최근의 핫 아이템인 정의나 공정의 의미가 아니라 까뮈(A. Camus, 1913~1960)가 이야기한 현실과 자아 사이의 이질성을 예술과 삶의 간극으로 차용한 것이다.
열두 개의 아트벤치는 나무 재질 두 개, 철 재질 일곱 개, 돌 재질 세 개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추운 날씨 탓이었을까, 나무 재질을 제외하고는 여름에는 뜨겁고 겨울에는 차가울 의자들의 용도가 과연 무엇일지 궁금했다. 관광벨트 내 핫 플레이스의 사진배경으로 타자화되려는 것일까. 아트벤치라기보다는 그저 공공미술 작품이라 보는 것이 더 적합할 듯했다. 이제 시작단계인 인천아트플랫폼의 운영을 생각하면 그리 넓지 않은 주변에 들어찬 작품들은 앞으로 인천아트플랫폼을 베이스로 할 프로젝트들의 여지도 좁힌다. 무엇보다 <도시 속 예술프로젝트>는 가만히 스며들기보다 예술과 삶의 간극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제 더 이상 현실적 제약이나 시도의 긍정성만으로 장소성과 역사성의 부조리한 전유를 외면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다.
건강한 장소성과 역사성의 재전유를 위한 인천아트플랫폼의 운영은 어떠한 방향을 모색해야 할까.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인천아트플랫폼이 장소성과 역사성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이방인들의 ‘플랫폼’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것은 예술과 삶에 대한 정치적 상상과 실천의 회복이라는 지점과 연결되는 것으로, 관습적이고 거시적인 장소성과 역사성을 답습하는 예술행동과의 일종의 거리두기다. 따라서 장소성과 역사성이 그 어느 곳보다 강력한 인천아트플랫폼에서 예술과 삶의 부조리함에 맞서는 이방인들의 일시적이고 다양한 거주개념들이 뒤섞이며, 우발적 커뮤니티와 연대를 통해 다층적 상상과 실천이 드러나기를 바란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인천아트플랫폼 조직자체의 역량강화를 통한 프로그램의 변화모색이 절실하다. 현재 홈페이지에 소개되고 있는 시각예술 창작, 기획매개의 발굴, 지원, 네트워킹을 위해서는 관리운영 중심이 아닌 연구조사 부분이 강화된 조직이 필요하다.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강조하는 것은 플랫폼과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내포하는 일시성과 우발성의 상상과 실천을 지원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회적인 외부기획자 및 외부기관과의 협력전시는 당장의 성과나 프로그램의 양적 풍부함을 보여줄 수는 있어도 인천아트플랫폼의 중장기적인 내실화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조직 내 기획매개 역량이 외부협력과 네트워킹을 질적으로 풍부하게 할 기반이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인천아트플랫폼이 해결해야 할 중요한 과제가 아닐까 싶다.
또 전시의 경우 인천아트플랫폼의 현실적 상황을 고려하더라도 대관전, 레지던시 작가전시, 자체기획전, 인천문화재단 기획전, 외부기획자 및 기관협력 전시 등이 뒤섞여있는 현 상황을 복합문화공간이라는 개념으로 말끔히 정리할 수 있을까 싶다. 교육은 도자기·사진·판화·음악·금속공예 등의 실기교육 및 입주작가와 함께 하는 예술체험 프로그램이 주인데 작가의 작업 스튜디오를 활용하는 측면이다. 단순히 차이를 위한 다른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말하고자 함은 아니지만 아직 기능적인 교육프로그램의 성격에 머무른 듯하다. 아카이브의 경우도 홈페이지 내 데이터베이스는 레지던시 참여자의 이력과 이미지 몇 개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커뮤니티 홀에 제공되는 자료비치 또한 작가들의 포트폴리오인데 거의 업데이트되지 않는다. 공공기관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가 바로 대중과 관련자들에 대한 보유자료의 공유이며 아카이브임을 감안한다면 아쉬운 부분이다. 레지던시는 2011년 2기 입주작가 공모가 완료되었으나 이를 포함, 2009년 파일럿 참여자와 2010년 1기 참여자만으로 현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지역이나 커뮤니티 맥락의 작업보다는 개인창작 중심의 작가가 대부분이고 입주 이후에도 관련된 프로그램이나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정도로 연결된다. 이 부분은 지역적 맥락의 레지던시 프로그램이 지니고 있는 딜레마에서 시작한다.
조직과 프로그램에 대한 기대에서 아직 인천아트플랫폼은 시작단계라 할 수 있다. 오랜 조직과 기관은 변화하기 어렵지만 신생조직과 기관은 유기적으로 변형, 발전할 수 있다. 올해 초 인천아트플랫폼의 관장이 새로 취임했다. 국립현대미술관 교육관 출신의 이승미 관장은 상대적인 선입견에 놓여있던 인천 문화예술의 보이지 않았던 가능성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인천아트플랫폼이 그러한 활동의 기반이 될 수 있다고 자신했다. 무엇보다 이는 인천의 문화예술이 가지고 있었던 왜곡된 열등감이나 피해의식이 아닌, 자존감이 가질 수 있는 긍정적인 출발이 될 수 있으며, 또 건강한 자기비판을 가능케 할 것이다.
이 관장은 구축된 하드웨어보다 사람의 중요성, 그리고 이를 위한 교육의 집중을 피력했다. 역시 공감하는 바지만 지금까지의 레지던시와 교육프로그램, 그리고 인턴 몇 명을 뽑아 인천아트플랫폼에 근무하게 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작가가 부족하면 지역학교와 연결해 신진작가를 인큐베이팅하고 숨어있는 중진작가를 발굴해야 한다. 기획매개자들이 부족하면 기획매개자를 양성하고 지원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해야 한다. 이는 시립미술관의 부재로 인해 레지던스 프로그램 운영기관이라는 핵심목표에 공공미술관의 역할까지 요구하는 것 같지만 인천아트플랫폼의 조직역량을 위한 프로그램과의 접합을 의미하기도 한다.

거친 사례일 수도 있지만 독일의 자동차회사 폴크스바겐은 플랫폼 A5에서 스무 종의 다양한 차를 생산한다. 이처럼 인천아트플랫폼 또한 역사성과 장소성의 역사적 사명을 지닌 공공미술관보다는 좀 더 실험적이고 일시적이며, 창의적인 실험실처럼 집중되고 유연한 플랫폼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한 플랫폼에서 연결되고 생성되는 다양한 예술행동 속에 자연스럽게 지역성과 장소성, 역사성과 공공성이 드러나기를 기대한다. 이미 고착화된 장소성과 역사성보다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애매모호한, 다층적인 장소성과 역사성에 인천의 가능성과 잠재성이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