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11월 말 도쿄(東京)를 방문한 일이 있다. 학회발표라는 공식적 목적과 더불어 그 주에 열린 한국 인디밴드들의 일본공연 관람이라는 필드워크를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11월 21일 한국 인디음악의 얼굴 ‘장기하와 얼굴들’의 공연이 예정된 라이브 하우스 러쉬(LUSH)를 찾기 위해 시부야(?谷) 전철역에 내렸다. 그런데 그곳에서 나를 반긴 것은 장기하가 아니라 ‘소녀시대’였다. 물론 소녀시대가 나를 마중 나왔다는 뜻은 아니다. 그럴 리가.
인조인간처럼 아름다운 그녀들의 모습은 새로운 일본어 싱글을 홍보하기 위해 제작한 대형 전광판 속에서, 그러니까 퇴근길의 분주한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외면하고 싶어도 외면할 수 없는 높은 위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2000년대를 풍미했던 제이팝(J-pop)의 디바 우타다 히카루(宇多田光)의 앨범을 홍보하는 포스터가 역내에 그리 크지 않은 사이즈로 걸려있던 것에 비한다면 대조적이었다. 물론 그녀의 음반은 새 앨범이 아니라 편집앨범이었으므로 단순한 비교는 무의미할 것이다. 하지만 한국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미각태풍(美脚台風), 즉 아름다운 다리의 태풍이 어느 정도인지를 실감하기에는 충분했다.

한류의 새로운 전기
2010년 한국의 걸 그룹들이 이른바 ‘신(新) 한류’를 일본에 몰고온 것은 사실이다. 그 첫 번째 주역은 ‘카라’였다. 카라는 그해 벽두인 1월 7일 도쿄 아카사카(赤坂)의 브리츠(Blitz)에서 4,000명의 팬들을 앞에 두고 <카라 퍼스트 쇼케이스 인 재팬 2010(KARA First Showcase in Japan 2010)>이라는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매되는 싱글 <미스터(Mister)>를 발표하여 오리콘 차트(Oricon Chart) 톱10에 진입하기도 했다. 한편 소녀시대는 일본 첫 싱글 <지니(Genie)>의 발표를 앞둔 8월 25일 도쿄 아리아케 콜로세움(Ariake Colosseum)에서 첫 쇼케이스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는 2만여 명의 팬들과 1,000명의 연예산업 관계자들이 참석했다. 이 소식은 그날 저녁 NHK 저녁뉴스의 톱뉴스로도 다루어졌는데 이 점잖은 국영방송에서 미각태풍이라는 관능적 표현을 사용했던 것이다.

카라의 쇼케이스 포스터

코리언 인베이전(Korean Invasion)이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다소 과장되었고, 또 실제로 단명했지만 1960년대 비틀스(The Beatles)와 롤링 스톤스(The Rolling Stones) 등 영국의 젊은 밴드들이 미국에 상륙하여 파란을 일으킨 현상을 브리티시 인베이전(British Invasion)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한국의 걸 그룹들이 불러일으킨 센세이션을 간단히 무시할 수는 없는 것 같다. 현재의 센세이션이 얼마나 오래 지속될지는 분명하지 않더라도 ‘남자배우에 열광하는 중년여성’이 주를 이루었던 일본에서의 기존 한류와는 달리 최근 한국 걸 그룹들의 경우, 대중문화의 주요소비자인 십대와 이십대 일본여성들에게 호소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과 다른 것은 분명하다. 즉 한류는 ‘세대’와 ‘젠더’라는 측면에서 한차례 전기를 맞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후 들려오는 소식들이 그리 희망적이지는 않다. 소녀시대의 일본어 노래를 들은 주변의 일본인들은 한결같이 “가사가 어딘가 어색하다”라고 말하고 있다. 소녀시대의 음악에서 가사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리 높지 않다고 하더라도 상쾌한 소식은 아니다. 카라와 관련한 뉴스는 이 정도가 아니라 ‘청천벽력’ 수준이다. 잘 나간다고 생각했던 그룹의 멤버 일부가 ‘불공정 계약’, ‘부당한 대우’ 등을 문제 삼아 반란을 일으킨 것이다. 특히 소속사에서 멤버들과 아무런 계약을 체결하지 않고 일본진출을 추진했다는 후문이다. 마지막으로 일본의 미디어에서 카라와 소녀시대를 “성적으로 비하한다”라는 뉴스가 간헐적으로 들려오고 있다. 우선 이 세 가지 소식에 대한 해석으로 이 글의 일부를 채울까 한다.

일본진출의 세 가지 문제
먼저 일본어 가창의 문제다. 한국의 가수나 그룹이 일본에 진출하는 경우 일본어로 노래를 부르는 것은 이제 하나의 관습이 되었다. 달리 말해 ‘일본에서 인기 있는 케이팝(K-pop)’이란 실제로는 대부분 ‘일본어 가사’를 가진 음악이다. 곡의 창작자가 한국인이고 노래를 부르는 가수나 그룹이 한국인이기는 해도 이 음악들은 ‘일본인이 만들고 일본인 가수나 그룹이 부르는’ 제이팝과 크게 구분되지 않는다. 한 일본인 지인은 “카라나 소녀시대의 음악을 듣고 제이팝과 너무나 똑같아서 놀랐다”고 말했는데, 나 역시 이 점에 반대하지는 않는다. 즉 가사를 제외한다면 아이돌 음악분야에서 제이팝과 케이팝은 거의 동질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 대해 “외국에 진출하기 위해 현지의 언어로 노래를 부르고 현지의 사운드를 추구하는 것이 뭐가 어떠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반대의 문화적 흐름을 생각한다면 이런 주장이 반드시 타당하지만은 않은 것임을 알 수 있다. 간단히 말해 제이팝이 한국에 건너올 때 한국어 가사로 번역하여 노래를 부르는 경우는 거의 없으며, 제이팝이 한국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볼 수는 없지만 일부 애호가들에게는 여전히 ‘아시아의 쿨하고 모던한 음악’으로 수용되고 있는 현상을 고려한다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문화적 비대칭성은 여전히 남아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두 번째는 일본활동의 문제다. 음악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꿈이 있다면 멀리 떨어진 다른 나라나 지역에 직접 가지 않고도 그곳에서 음악이 팔리는 것이다. 다시 한 번 제이팝과 케이팝을 비교해보자. 제이팝 아티스트들이 한국을 찾는 경우가 과거보다는 많아졌지만 여전히 일반적이지는 않다. 프로모션 차 한국을 방문한다고 해도 며칠 머물다가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 몇 달씩 체류하면서 연예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반면 케이팝 아티스트가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서는 현지에 장기간 체류하거나 혹은 빈번히 한국과 일본을 오가야 한다. 보아, ‘동방신기’, 류시원, 박용하 등의 예를 보면 이것은 자명하다. 카라의 경우도 일본에 바삐 드나들어야 하는 현실에 피로감과 회의감을 느꼈던 것 같고 이러한 노동에 대한 보상 또한 불확실한 상황이 반란을 야기했던 것 같다. 자세히 알 수는 없겠지만 이 점은 동방신기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일본에서 발매된 카라(좌)와 소녀시대(우)의 첫 싱글앨범

마지막으로 성적비하의 문제다. 한국인 여성에 대한 성적비하를 제국-식민지 시대의 불쾌한 사건들까지 소급시키는 것이 얼마나 유효한 설명일지는 모르겠지만 ‘제국=남성, 식민지=여성’이라는 불변의 도식이 현재까지 사라지지 않고 얼마나 남아있는지를 점검하는 일은 필요하다. 오랫동안 일본에 체류해본 경험이 있거나 일본인들과 조금이나마 허심탄회하게 대화를 나눈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한류가 있기 전까지 일본 내에서 한국여성에 대한 스테레오타입(stereotype)화된 이미지는 ‘기생’이나 ‘마사지에스테(エステ)’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느꼈을 것이다. 이러한 이미지가 1990년대 이후 점차 개선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일부 남아있다는 것 또한 사실인 모양이다. 올해 초 케이팝 붐(boom)의 날조설이라는 이름으로 인터넷 상에 유포된 만화에서 카라와 소녀시대가 성상납을 했다는 묘사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면 제국의 정서구조는 아직도 어디선가 똬리를 틀고 있는 듯하다.

리저널 네트워크는 어떻게 작동하는가
여기서 일본의 음악산업, 나아가 연예산업 전반을 한국의 가수와 그룹들에게 일본어 가창과 현지체류를 ‘강요’하고 그 마음속에 제국적 심성구조를 가지고 있는 사악하고 비도덕적인 악마로 묘사하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단지 최근 일본에서의 케이팝 붐이 ‘한국어로 노래 부르는 한국인 가수와 그룹들이 별다른 현지 프로모션 없이, 또 일본에서 여론의 공격 없이 만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현실과 너무나 다르다는 점이다. 일본 음악산업계의 입장에서는 현재의 구조적 불황 하에서 높은 비용을 투자해 자국의 아이돌을 길러내는 것보다 한국에서 이미 훈련되고 대중성이 검증된 아이돌을 스타로 만드는 것이 경제적이고 효율적이었을 것이다.

록 타이거스(좌)와 보드카 레인(우)

현재 한국의 음악산업은 일본 음악산업의 하나인 탤런트 풀(talent pool)로 기능하고 있다. 영국을 비롯하여 비(非) 미국 서양의 아티스트들이 미국시장을 위한 탤런트 풀로서 기능하는 글로벌 네트워크(global network)와 비슷하게 동아시아에서는 일본시장을 중심으로 하는 리저널 네트워크(regional network)가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네트워크를 파워가 대등한 주체들의 평등한 관계라고 할 수는 없다. 실제로 내가 만나본 한국 음악산업의 한 파워맨은 아시아 네트워크에서 한국의 지위가 ‘콘텐츠 공급자’라고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한편으로 한국 음악산업의 콘텐츠 기획과 제작능력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배급이나 금융 등의 비즈니스 파워는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음악산업의 교과서적 담론에 의하면 전자는 후자에 비해 불확실하고 리스크가 큰 비즈니스 영역이다. 이렇듯 현재 음악산업의 아시아 네트워크에서 한국이 담당하고 있는 역할은 화려하고 찬란해 보이지만 극도의 불안정성과 불확실성 또한 담보된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대중음악이 팔려야 할 상품 이전에 진솔한 감정을 담은 예술이라고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하고 낭만적인 발상일까. 일반적으로는 그렇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신념을 가진 음악인들이 우리 곁에 존재하고 있으며, 더불어 최근 이런 흐름을 인디(indie)라고 부르는 것 또한 알려져 있다. 더구나 한국인들에게조차 널리 알려지지 않은 인디밴드들이 최근 국경을 넘어 활동하는 양상도 관찰되고 있다.

산업과 근면한 노력의 경계
일본을 찾은 한 주 동안 한국의 인디밴드들이 각각 별도의 기획으로 일본의 밴드들과 세 종류의 합동공연을 가졌다. 장기하와 얼굴들, ‘록 타이거스’, ‘보드카 레인’, ‘크라잉 넛’이 그들이다. 이들이 연주한 레퍼토리는 자신들이 한국에서 했던 그대로 한국어 가사로 되어 있었으며, 몇 곡만 성의차원에서 일본어로 부르는 정도였다. 일일이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국의 인디뮤지션들이 외국에서 공연을 하거나 음반을 발매하는 일, 역으로 아시아 다른 나라들의 인디뮤지션들이 한국을 찾는 일은 일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재즈나 힙합 등 다른 비(非) 인기 장르까지 고려한다면 훨씬 더 많은 사례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대형 음반사와 기획사들이 외면하는 음악들도 나름대로 국경을 넘어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나 문학 등 다른 문화적 형식들도 마찬가지다. 이에 대해 “그게 돈이 되겠느냐”, “그걸로 국위가 선양되겠느냐”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 최근 한국사회의 분위기라면 여기서 글을 마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돈이 되지 않고 국위가 선양되지 않더라도 음악인들을 돕고 이들의 음악이 국경을 넘어 이동할 수 있도록 열성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 동일한 이유로 외국의 음악인들을 돕고 그 음악을 국내로 불러오려고 노력하는 사람들도 있다. 위에서 언급한 한국 인디밴드들의 일본공연, 그리고 한 달 뒤 일본 인디밴드들이 한국을 찾아 공연을 가진 것은 이러한 노력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예일 것이다. 이러한 노력을 무엇이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위 현상을 ‘산업’이라는 관점에서 보는 것이 최근의 사회적 분위기에 부합할 것이므로 그러한 관점을 취해보도록 한다. 그런데 인더스트리(industry)라는 단어에는 ‘산업’이라는 뜻과 ‘근면’이라는 뜻이 함께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보자. 영어단어 암기의 악몽을 떠올리게 하고 싶지는 않지만 이 명사의 형용사형에는 두 종류가 있어서 우선 인더스트리얼(industrial)은 ‘산업용의’라는 뜻이고, 인더스트리어스(industrious)는 ‘근면한’이라는 뜻이 있다는 것도 기억날 것이다. 영국문화 연구의 비조(鼻祖)인 레이먼드 윌리엄스(Raymond Williams, 1921~1988)의 말을 빌자면, 우리가 산업이라고 번역하는 단어에는 ‘생산과 교역의 제도’라는 뜻뿐만 아니라 ‘지속적 응용과 노력이라는 인간의 속성human quality of sustained application and effort’이라는 뜻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로는 다소 어색할지 몰라도 위 구분을 원용한다면 현재 한국과 일본의 대중문화 교류에서 관찰되는 현상도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는 관료적으로 통제되고 지휘되는 ‘산업’의 논리에 따라 움직이는 흐름이고, 다른 하나는 열성적인 수용자들끼리 경계를 넘어 접촉하는 ‘근면한 노력’으로 움직이는 흐름이다. 한 가지 예만 들자. 1997년 재일교포 작가 강신자일본명 쿄 노부코(姜信子)가 이끄는 한 문화단체의 근면한 노력이 한대수를 초대하여 후쿠오카(福岡)에서 공연을 갖게 하지 않았더라면 한대수와 그의 음악은 한국인들에게 다시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이상은과 강산에가 일본에 알려질 수도 없었을 것이다. 즉 결론은 후자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라면 공공의 공간이 일국을 넘어 국제적으로 구성되는 현실에 보다 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