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in-Cheon

모성의 부재와 필요

연극 <세 여자>(차흥빈 작, 손민목 연출, 문학시어터, 2015년 8월 20일-9월 6일)

이주영

1.

평범한 일상 가운데, 우리는 누군가에게 은연 중 배려라는 미명 하에 폭력을 가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배려보다 앞선 자기희생과 이타적 행동에 대한 인정욕구와 그로 인한 폭력은 어쩌면 우리의 생활 속에서 빈번하게 벌어지고 있는 행위일지 모른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가정은 그러한 폭력이 자연스럽게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세 여자>는 세 자매의 이야기를 통해 행복한 가정․가족에 대한 의문, 그리고 배려로서의 폭력적 양상을 무대화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배려를 가장한 폭력과 행복한 가정에 대해 다시쓰기를 시도하면서도 희생의 아이콘으로서 쉬이 생각할 수 있는 어머니란 존재를 무대에 등장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 여자>는 ‘모성의 희생’과 그에 따른 ‘행복한 가정의 유지’라는 익숙하면서도 식상한 대중적 극작 문법을 따르지 않는다. 오히려 작품은 모성을 무대 뒤에 숨기고 전경화되는 것을 차단한다. 세 자매의 엄마는 재혼과 함께 인도로 떠났고, 간간히 세 딸들에게 연락만 하는 정도이다. 모성은 부재하되, 그로 인해 세 자매는 연대한다. 하지만 그 연대가 어딘가 모르게 불안해 보인다.

2.

<세 여자>에서 모성부재의 아픔은, 떠나버린 그 그리움은 부재를 겪고 있는 자들의 연대로 극복되는 듯하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자리를 비운 모성은 모습을 달리하여 어느새 다시 가족 구성원 안, 세 자매의 관계 틈으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뜻밖에도 그 양상이 매우 폭력적이다. 그 텅 빈 모성의 자리에 대리자로서, 모성보다 더 강력한 배려를 보여주는 맏딸 유숙(장윤형 분)은 두 동생의 삶에 깊게 관여하고, 그 관여의 논리를 획득하기 위해 유숙은 전적으로 동생을 위해서라는 역설을 제출한다. 유숙의 이러한 모습은 마치 자신이 아닌 타인을 먼저 생각하고 위한다는 이타적 행위이자 희생정신의 제스처로 비춰진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상대방의 의사와 입장이 제거되었기에 희생과 배려를 가장한 폭력에 다름 아니다. 유숙의 이러한 왜곡되고 과잉된 모성 양상으로 인해 세 자매의 연대에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균열은 말끔한 봉합을 기다리지만, 그 작업이 좀처럼 쉽지 않아 보인다. 저마다의 상처는 균열의 봉합 과정을 지연시킨다. 이혼과 그 과정에서 남편(손인찬 분)으로부터 받은 상처가 여전히 아물지 않은 유숙, 사랑했던 남자인 근우(박진성 분)와의 실연, 임신과 유산이란 일련의 과정, 그리고 그 남자가 자신의 언니와 연인관계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그런 고로 그 남자와의 과거를 숨겨야만 하는 유미(김선 분), 아무것도 모른 채 동생의 전 남자친구와 사귀게 된, 뜻하지 않게 나쁜 언니로 전락해버린 유정(강효림 분). 이러한 인물 간의 부적절한 관계 설정이 다소 신파적이고 억지스러운 상황을 보여주는 듯한 아쉬움이 있긴 하지만 어찌되었건 각자의 상처로 인해, 이 상처가 서로에게 공유되지 않고 자기 안에서 곪고 있기에 이 세 자매에게 더 이상 연대의 공고함은 거부되고 균열만이 가속화될 뿐이다.

연기의 대부분이 진행되는 응접실은 세 자매의 균열과 불안한 심리를 명징하게 보여주는 공간이다. 희한하게도 이 세 자매는 서구적 라이프스타일을 지향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응접실에서 자연스럽게 신발을 신고 생활한다. 이들이 신고 있는 신발은 실내용 슬리퍼가 아니다. 이들은 밖에서 신고 다니는 외부용 신발을 신고 거실 생활을 한다. 응접실은 안락한 집의 내부로 들어오는, 그러면서 이를 통과해야만 외부로 나갈 수 있는 공간이다. 세 자매는 신발을 신은 채 집의 내부와 외부를 잇는 경계의 장소에 모인다. 집 내부에 있으나, 언제든 나갈 수 있는, 신발을 신은 채 실내생활을 하는 세 자매. 응접실에서 신발을 신고 생활하는 상황만큼이나 그녀들의 삶은 매우 불안하고 위태로워 보인다.

3.

주지하듯 <세 여자>에는 어머니란 존재가 등장하지 않는다. 세 자매의 엄마는 재혼과 함께 새 남편과 인도로 떠났고, 유미의 현 남자친구인 태왕(하상욱 분) 또한 엄마 없이 삼촌(윤원기 분) 밑에서 자라온 인물이다. 이들의 불안한 현재의 삶을 품어줄 모성은 당장 그들의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 어찌 보면 이들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모성을 찾으려는 태도를 취하지 않는 듯도 보인다. 하지만 작품은 세 자매와 그녀들의 엄마 사이의 물리적 거리, 태왕과 모성의 죽음을 통해 모성찾기가 얼마나 지난한 작업인지, 혹은 그것이 어쩌면 불가능할지 모른다는 불안을 은연 중 드러낸다. 그리고 오히려 세 자매의 경우에는 불안을 더 공고히 하는 또 다른 폭력적 모성이 존재할 뿐이다.

세 자매에게 모성은 온화한 음성과 포근한 내음, 그리고 따스한 어루만짐 등 육체성이 제거된 채 오로지 편지를 통해 활자로서 존재한다. 유미의 남자친구인 태왕도 그녀들과 별반 다르지 않다. 보이스피싱으로 경제적 곤란에 처한 태왕은 삼촌에게 자신의 고민을 공유하기보다는-비록 그 돈이 삼촌으로부터 나왔다고 하여도- 이러한 사실을 감추고 은폐시켜야 한다. 또한 스님과 경쟁관계에 있는 신부인 삼촌의 다소 과장된 모습에서 앞서 언급한 모성의 육체성은 유감스럽게도 철저히 부재하여 보인다. 그렇다고 그는 여자 친구인 유미에게 모성을 기대할 수도 없다. 그녀 또한 여전히 전 애인을 잊지 못하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모성찾기의 길이 꽉 막혔다. 모든 인물이 불안을 지니면서도 그들 곁에는 불안과 아픔을 포용해주고 위무해줄 모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 불안을 불식시켜줄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다. 작품은 산뜻한 마무리를 거부한다. 불안과 아픔, 모성 대리자의 폭력에 대한 저항이 한계에 도달했다. 은폐하고 외면했던 모든 진실이 밖으로 분출한다. 더 이상 균열의 미봉책이 불가능한 단계에 이르렀다. 유미와 유정, 그리고 이 두 여자 사이에 위치한 근우, 그리고 이 모든 관계를 감추려고 부단히 노력했던 유숙. 모든 은폐와 균열의 지점들이 이 세 자매 앞에 쏟아져 나왔다. 해피엔딩은 없다. 이들 사이에 용서와 화해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각자의 삶을, 그 삶이 그릇되어 보일지라도 그 어떤 개선의 희망조차 보이지 않은 채 세 자매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불행한 채로 말이다.

4.

작품의 제목이 세 ‘자매’가 아니라 세 ‘여자’다. 의미심장하다. 작품 내에서 세 여자의 관계가 자매로서 명확하게 제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매는 여자로 제시된다. 작품은 더 이상 가족의 연대를 거부한다. 가족 구성원은 가족으로 뭉치고 연대하기보다는 타인과 타인의 관계로 이동 중이다. 그러하기에 타인의 태도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해야 한다. 타인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는 선행과 배려는 폭력이 될 수 있다. 이러한 관계 이동 양상을 필연적인 시대의 흐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하지만 작품에 드러난 모성의 부재는 또 다른 해석의 지점을 제공한다. 균열은 현재진형이다. 균열을 매끄럽게 봉합하기 위해서는 모성이 필요하나 어디에 있는지 잘 보이지 않는다.

너무도 힘들고 아픈 시기이다. 상처가 아물기 전에 또 다른 상처가 생긴다. 잔인하리만치 끝을 모른 채 상처의 연쇄는 지속되고 있다. 위로와 위무, 치유가 필요한 시절이다. 균열을 말끔히 봉합하지 못한 채 불안을 안고 상처를 입은 채 각자 위태로운 삶을 살아가는 세 자매의 모습에서 어딘가 모르게 기시감이 느껴진다. 상처를 감싸줄 모성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다. 하지만 <세 여자>의 인물들처럼 어디서 찾아야 할지, 어떻게 찾아야 할지, 그 길이 잘 보이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