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틱 in-Cheon

아버지가 만든 세상 속의 아이들

함세덕 작, 백재이 연출 <해연>(떼아뜨르 다락, 7월 3일-12일)

전강희

바다제비라는 뜻의 해연(海燕)은 5월쯤에 섬을 찾아와 여름을 보내고, 10월이 되면 겨울을 날 보금자리를 찾아 떠나는 철새다. 새가 떠나고 나면 머지않아 겨울이 찾아온다. 극작가 함세덕(1915-50)은 추운 겨울이 오기 전을 배경 삼아 <해연>을 집필했다. 이 희곡은 누군가가 찾아오고 떠나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바다제비가 섬을 찾아오고 떠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지만,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이별은 자연의 순리를 따른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아버지들이 만들어 놓은 세상에서 어쩔 수 없이 짊어져야만 하는 형벌과도 같은 것이다.

함세덕이 <해연>을 통해 그리고자했던 세상은 마지막 장면에서, 진숙의 아버지가 읊조리는 대사 “인생이란 운명의 장기판인가 보아. 한참 놀다가 결국은 제각기 말 상자 속으로 들어가게 되구 마나 보더라.”에 압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연출가 백재이가 <해연>을 통해 바라보고자 하는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1947년 작품이 2015년의 무대에 올라간다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하며 극장으로 향했다.

작품을 바라보는 연출가의 시선

인천 중구에 자리한 떼아뜨르 다락은 제12회 정기공연으로 지난 7월 <해연>을 무대에 올렸다. 인천에서 나고 자란 작가인 함세덕은 해안가를 소재로 여러 희곡을 남겼다. 그 중 하나인 <해연>은 멜로드라마적 구성을 지닌 사실주의 극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떼아뜨르 다락에서 선보인 <해연>도 이런 공식을 성실히 따른 작품이다.

공연에 사용된 대본은 1947년 박문출판사에서 나온 희곡집 <동승>에 실린 것이다. 사실 <해연>이 처음 세상에서 빛을 본 것은 194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면서 부터이다. 당시, 조선일보를 통해 1월 30일부터 2월 9일까지 연재되었다. 작가는 그로부터 7년 후, 희곡집을 발간할 때, <해연>을 개작하였다. 개작으로 작품의 전체적인 구성이나 성향이 달라지지는 않았다. 작가가 신경을 쓴 부분은 대사의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대사를 손보니 전작과 비교하여, 인물들의 성격이 더욱 분명해졌다. 1947년 개작본은 체호프의 섬세하게 흔들리는 인물들을 좋아한다는 백재이 연출가가 선택할 만한 대본이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등대가 서있는 해변가가 무대 위에 펼쳐져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띠는 인물은 허드렛일을 하고 있는 윤첨지(이정수 분)와 등대지기의 딸 진숙(이미나 분)이다. 두 사람의 대화는 곧 떠날 준비를 하는 제비이야기, 진숙이 곧 시집가게 될 거라는 이야기 등 시시콜콜한 집안 이야기로 이어지며, 인물들에 대한 정보를 드러낸다.

극장 안으로 들어섰을 때, 무대 한 쪽을 차지하고 있는 등대를 보며 나는 적잖이 당황하였다. 이런 사실적인 세트를 오랜만에 보았기 때문이다. 뒤이어 이어지는 배우들의 말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7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간 말이었다. 말이 앞뒤가 맞지 않는 부조리극 시대를 넘어 포스트 드라마의 시대로 접어든 이 상황에서, 당시의 말을 듣는 것이 꽤나 고역스럽겠다고 걱정하며 작품의 첫 장면을 따라갔다.

극이 진행될수록 배우들의 말이 안정적이게 다가왔다. 여전히 옛 말을 쓰고 있었지만, 공연을 감상하는데 전혀 방해가 되지 않았다. 내 뒷자리에 앉아있던 어린 학생도 나와 똑같은 생각을 했었는지, 처음 말투를 듣고 키득거리던 웃음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함세덕의 작품에 나타나는 밀도 있는 언어의 내밀한 힘 덕도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대사를 처리하는 배우들의 안정적인 호흡과 발성이 큰 몫을 해내었다고 생각한다. 난점을 배우의 연륜이 해결했다고 할 수 있겠다.

연출가는 극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재해석하기보다는 원작자인 함세덕의 텍스트를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함세덕의 입장에서 그 시대의 눈으로 인물들의 관계를 샅샅이 파헤쳤을 것이다. 이런 수고가 이번 공연에서는 좋은 결실을 맺었다고 생각한다. 극은 옛날이야기를 전해 듣듯이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그 안에서 충돌하는 인물들의 사정이, 오늘날 보면 별일이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관객이 큰일인 것처럼 느낄 만큼 충분히 설득력이 있었다.

<해연>의 세상, 그 안의 아이들

<해연>의 줄거리는 대략 이렇다. 진숙과 세진(류일선 분)은 양가 아버지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나 오누이의 정을 쌓아가고 있다. 이를 눈치 챈 세진의 아버지 안의사(최윤준 분)가 진숙의 아버지인 등대지기(방용원 분)를 만나기 위해 팔미도로 들어온다. 한 바탕 난리 후, 세진이 집을 나갔다는 사실을 모두가 알게 된다. 어른들이 자신의 위치로 돌아간 사이, 세진이 사공(황동욱 분)에게 부탁하여 섬으로 들어온다. 둘은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이 오누이의 정이 아닌 이성을 향한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극은 진숙과 세진이 이부남매라는 사실을 등대지기의 말을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입센의 <유령>에 나오는 오스왈드와 레지네가 떠오른다. 선대의 부도덕한 잘못으로 오스왈드와 레지네가 이루어질 수 없었던 것처럼, 진숙과 세진의 비극도 아버지 세대가 만들어 놓은 세상 속에서 탄생한 것이다. 바다제비가 떠난 이 섬에 머지않아 겨울이 닥칠 것이다. 진숙과 세진에게 겨울을 가져온 것은 바로 아버지들이다.

함세덕은 <동승>에서도 보았듯이, 등장인물의 성장기를 자주 소재로 다룬다. <동승>이 소년의 성장기를 다룬다면, <해연>은 소녀의 성장기를 보여주고 있다. 백재이 연출가도 소녀 진숙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극중 인물들의 심리적인 긴장감은 소녀와의 관계를 매개로 표출된다. 이 극은 어른 세대의 질서에 도전하는 다음 세대의 이야기이다.

야심차게 ‘도전’이라는 단어를 꺼내들었지만, ‘순응’이나 ‘억압’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법하다. 도전이라고 하기는 어딘가 힘이 빠져있는 느낌이다. 진숙과 세진의 반항이 아버지들의 세상을 뒤흔들 수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해내기에는, 나의 상상력이 부족하다. 무언가에 도전하기에는 하루하루를 살아내기도 빠듯한 2015년의 젊은이라면, 승리하는 상상력, 혹은 의지가 당연히 결핍되어 있지 않을까? 아버지 세대에게 연타로 맞아 실패의 경험이 내면화되고 있는 요즘 세대에게 이 극의 결말은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정해져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무대 위의 진숙과 세진도 오늘날의 젊은이처럼 보였다. 극의 마지막 대사인 윤첨지의 대사 “저 앞에서 셋째루 짝을 잃구 어리둥절하구 있는 게 바루 우리 암눔이다. 그 뒤에 따르는 것이 새끼들이구... 인제 정말 겨울이 오나 부다”가 이런 생각에 확신을 더해 준다. 극 초반에 역시 윤첨지가 언급했던 “겨울이 길면 길수록 오는 봄이 반가운 법이란다”가 무색하게도 전혀 떠오르지 않는다. 이 공연이 가지고 있는 동시대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고 한다면 이런 ‘희망 없음’을 꼽겠다.

이 연극은 원작에 대한 이해도가 높은 작품이다. 연출가와 배우에게서 느껴지는 텍스트에 대한 신뢰는 객석까지 고스란히 전달되었다. 관객도 안정감을 가지고 작품을 대할 수 있었다. 그 결과, 텍스트 자체가 지니고 있는 문학성이 어느 정도 답보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 이외에, 작품을 더욱 효과적이게 드러낼 수 있는 다른 표현 수단들을 만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기도 하다. 아쉬움을 다음 작품에서 달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