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곰팡이와 같다. 그것은 사회를 내부로부터 좀먹는다”(P.32)

인간은 누구나 ‘더 나은 삶’을 희망한다. 이 희망은 본능과도 같다. 그 어떤 악조건 속에서도 사라지지 않으며, 제 아무리 노력한들 결코 충족되지 않는다. 인간이 현재에 만족했던 적이 있을까? 그렇지 않다. 인간이란 본래 끊임없이 결핍을 느끼고, 불만을 터뜨리고, 그럼으로써 스스로 불안을 키워가는 족속이다.

수많은 옛이야기 속에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낙원’들이 등장했던 까닭은 그 때문이다. 에덴, 복지(福地), 극락, 무릉도원, 유토피아……. 이름과 모양과 지향점은 천차만별이지만, 이들 이야기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낙원은 오래 전에 사라져버렸다. 사라지지 않았더라도 우리는 그곳에서 쫓겨났고, 돌아가는 길도 잊어 버렸다. 그리하여 우리는 다만 상상할 수 있을 뿐이다. 발길이 닿을 수 없는 저 멀리에 있으리라고. 아니면 기약할 수 없는 먼 미래에나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고. 이 모든 모호함 속에서 유일하게 분명한 것은, 낙원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낙원에 대한 이야기들은 우리가 누리고 있지 못한 ‘더 나은 삶’에 대한 상상의 결과물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을 현혹하는 거짓말이다. 애당초 존재하지 않았고, 앞으로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낙원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느끼는 결핍이 심해질수록, 불안과 불만이 쌓여갈수록, 불평등과 차별을 느낄수록, 낙원의 도래를 기대하는 사람들의 갈망은 오히려 커진다. 그리고 마침내는 스스로 낙원을 건설하려는 이들이 등장한다. 그처럼 무모한 짓이 또 있을까. 이 척박하기만 한 땅 위에 결코 실현될 수 없는 희망 따위를 심으려고 하다니.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무모한 이들이 인간의 역사를 앞으로 이끈다. 그들의 도움으로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한없이 느리지만 분명하고도 단호하게 한 걸음씩 천천히.

“정부는 더 이상 해결책이 아니었다. 정부, 바로 그것이 문제였다”(P.104)

토니 주트(Tony Judt, 1948~2010)의 주장은 기본적으로 낙원 이야기와 동일하다. 그는 현실에 불만을 느꼈고, 개인의 심성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에서 원인을 찾았다. 지금보다 나은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있다고 믿었고, 나아가 그런 사회를 현실에서 이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결코 쉽지는 않지만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고. 그런 측면에서 그는 ‘발견자’가 아니라 ‘개척자’에 가깝다.

우리의 옛이야기 중에서 같은 포부를 드러냈던 인물로는 홍길동과 허생이 있다. 이들은 모두 차별받는 계층이었고, 스스로 떨쳐 일어나 시스템을 바꾸고자 했다. 홍길동을 도술을 통해서, 허생은 상술을 발휘해서.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새로운 세상을 건설한다. 옛이야기들이 의례 그러한 것처럼, 그들의 땅에 사는 백성들은 모두 행복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들이 낙원을 건설하는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먼저 홍길동은 이미 “수 십 대를 전자전손하여 덕화유행하니,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이 넉넉”하게 살고 있던 율도국이라는 남의 나라를 빼앗아 자신의 낙원으로 만든다. 그러면서 그는 “나라는 한 사람이 오래 지키지 못하는지라”라는 논리로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한다. 그에 비해 허생은 아무도 살지 않던 땅에 도적들을 데리고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농사를 짓고 무역을 한다. 그리고 가르침을 내린다. “어린애가 태어나서 숟가락을 잡을 만해지면 바른손으로 쥐게 가르쳐라. 하루가 앞서도 먼저 먹도록 사양하여라.”

옛이야기가 전하는 이 두 가지 낙원은, 토니 주트의 주장에서 서로 대척점을 이루는 자유시장과 복지국가의 모습과 그대로 겹친다.

홍길동의 나라는 무한경쟁과 승자독식을 기본원리로 한다. 보다 경쟁력을 갖추었다면 다른 사람이 가진 것을 빼앗는 일쯤이야 문제되지 않는다. 홍길동이 왕권을 차지한 이후 율도국은 “국태민안하여 사방에 일이 없고, 덕화대행하여 도불습유”해졌다고 한다. 요즘 표현으로 하면, 경제를 잡고 민생을 살린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충분한가? 이런 사회는 필연적으로 불평등을 내포하고 있다. 경쟁을 통해 누구나 권력을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기득권자들은 차별을 강화하여 경쟁자의 등장을 미연에 차단한다. 결국 사회가 아무리 풍요로워지더라도 백성들은 권력에서 소외되고, 그들의 삶은 자기 의지가 아니라 권력자에 의해 좌우되어 버린다.

한편, 허생이 만든 나라는 공동체정서와 평등을 원리로 내세운다. 땅은 좁고 경제 규모는 작지만 백성들은 서로 공경하고 삶에 만족한다. 그러나 그들은 고립되어 있다. 허생은 자신의 나라를 떠나기에 앞서 배를 모두 불사르며 말한다. “가지 않으면, 오는 사람도 없겠지.” 그는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사회구조는 외부로부터 찾아오는 유혹에 취약하다는 사실을. 하지만 이 행복한 은둔이 과연 언제까지 지켜질 수 있을까? 그렇다면 그들의 낙원은 결코 지속될 수 없는 짧은 꿈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옛이야기의 기록자는 홍길동과 허생이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말했다. 현실의 자유시장과 복지국가도 서로 자신들의 체재가 우월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토니 주트에 따르자면 적어도 둘 중 하나, 어쩌면 둘 다 거짓낙원이기 쉽다. 그는 말한다. “풍요는 미국인들에게 사회주의의 대체재였다. 하지만 이것이 정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일까?”(P.186) “자유가 불평등과 빈곤, 냉소를 낳는 결과에까지 이른다면, 자유가 억압에 승리를 거뒀다는 말로 모든 허물을 덮어 버리려 하지 말고 우리는 자유가 낳은 악폐를 일소하는 데 앞장서야 한다.”(P.150)

왜 변화가 일어나지 않았는지는 이제 명백해졌다. 변화를 상상하고, 계획하고, 실행한 자들이 바로 오늘날 우리가 봉착한 문제를 만든 주범들이었던 것이다(P.165)

홍길동의 나라도 낙원이 아니고, 허생의 나라도 낙원이 아니다. 자유 시장은 위험하고, 복지국가는 위태롭다. 어느 것도 ‘더 나은 삶’에 대한 답이 되지 못한다. 아니, 애당초 낙원이란 실재할 수 없는 것이니, 답을 찾으려는 시도 자체가 무모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포기해야 하는 것일까? 아니다. 그럴 수는 없다. 이룰 수 없다고 희망마저 버린다면, 우리 손에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토니 주트의 주장은 가치를 가진다. 그가 대안으로 제시한 ‘사회민주주의’는 하나의 희망에 불과하다. 비록 그것이 ‘타협의 산물’이고 “이제까지 무시되어 왔던 다수의 목소리를 대변”한 결과라고 하더라도, 지금 우리의 현실에서 바로 실현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무엇보다 적들의 힘은 아직도 강력하다. 권력은 자유 시장을 맹신하는 이들에게 있고, 지도자들은 ‘경제적 효율성과 생산성의 문제에만 집착’하고 있으며, 견제 세력은 분열되어 있다. 무엇보다 절망적인 것은, 그토록 고통을 당했고 지금도 당하고 있지만 대중은 여전히 무지하거나 무관심하다는 사실이다. 불평등한 구조 속에서 이루어지는 경쟁이 얼마나 무모한지, 사회의 경제 발전은 어째서 분배로 이어지지 않는지, 열심히 일하면 할수록 왜 더욱 가난해지는지…… 우리는 이런 문제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고민하더라도 깊이 들어가지 못하고 지래 포기해 버리기 십상이다.

그러나 토니 주트는 아직 포기하지 말라고 말한다. 희망을 잃지 말고 적들에게 맞서라고.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그의 주장은 낙원을 다룬 옛이야기들과 다르지 않다. 옛이야기들이 문학적 상상의 결과인데 비해, 그의 견해는 학문적 분석의 결과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물론 그가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저항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목표는 정치적 통로를 통해 추구해야 한다”(P.169)고 전제하면서, 젊은이들이 정치 제도에 대한 신뢰를 버리지 말고 선거에 참여하기를 당부한다. 다소 거창하기까지 했던 문제 제기와 분석에 비하자면 지나치게 소박하지만, 현실적으로 우리 손에 남은 대안은 이것뿐이다.

현실은 절망적이고 희망은 초라하다. 그러나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우리는 계속 꿈을 꾸어야 한다. 한 사람의 꿈은 공상이지만, 여럿이 함께 꾸는 꿈은 현실이 된다. 희망은 절망 앞에서 초라하지만, 그 절망을 무너뜨릴 수 있는 유일한 힘은 희망 밖에 없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토니 주트가 남긴 마지막 저술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까닭이고, 당장 실현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 나은 삶’을 상상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우리는 세상을 비판적으로 바라볼 의무가 있다. 하지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우리는 그 깨달음을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다들 아시다시피, 철학자들은 이 세상을 오직 이리저리 해석하기에만 바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P.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