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하는 그리고 변화할 수 있을 것 같은 ‘봄’에 연극, 미술, 음악, 영화, 퍼포먼스 등 현대예술 전 장르가 상호교류하는 잔치 ‘페스티벌 봄’이 5년째 열리고 있다. 페스티벌 봄은 그간 질적으로 뛰어난 공연을 꾸준히 선보이며 극장을 새로운 실험실로 정의할 수 있었다. 이번 행사에서 가장 많은 기대를 모았던 개막작 르네 폴레슈(Rene Pollesch)의 <현혹의 사회적 맥락이여, 당신의 눈동자에 건배!Here's Looking At You, Social Context Of Delusion!>는 취소되어 아쉬움이 크지만 여러 수작이 그간의 실험성을 이어갔다. 그중 주목할 작품은 토시키 오카다(岡田利規)의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Hot Pepper, Air Conditioner, And The Farewell Speech>, 서현석의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였다. 임시직 여직원이 구조조정으로 해고를 당하는 드라마를 다룬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는 한마디로 엉뚱한 극사실주의다. 1장은 비정규직 여성이 회사를 그만두게 된 상황에서 동료 비정규직 사원들이 송별회 준비를 위해 ‘핫페퍼’를 뒤적인다. 2장은 추위에 민감한 정규직 사원이 일방적으로 온도를 낮추는 다른 직원 때문에 힘들어한다. 3장은 해고를 당하는 비정규직 사원이 등장하여 동료들 앞에서 고별사를 한다. 이야기는 뻔하고 단순하다. 그러나 이 뻔한 이야기 앞에서 관객은 당황한다. 왜냐하면 등장인물의 몸짓과 대화가 일정 지점에서 정박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미끄러지기 때문이다. 그들은 같은 말을 반복하면서 대화의 내용과 전혀 상관없는 과장된 동작을 반복한다. 그들의 몸짓은 대화보다는 배경음악을 따라 움직인다. <핫페퍼, 에어컨, 그리고 고별사>의 대사는 시시콜콜하면서 세밀한 일상적 언어를 그대로 가지고 오지만, 몸짓은 이에 반대급부로 향하면서 무대를 비언어적으로 만든다. 이는 언어위주로 진행되는 극과의 대결이며, 일본사회의 부조리를 극대화한다.
서현석의 장소 특정적 작업인 <헤테로토피아>의 무대는 ‘세운상가’다. 서현석은 관객들에게 을지로3가역에서 세운상가에 이르는 짧은 산책로를 제공한다. 을지다방, 경주장, 수정다방, 청계탕, 유토피아다방을 거쳐 세운상가에 다다른다. 시작은 누군가와의 통화를 하면서부터다. 그는 워크맨과 뉴에이지풍의 명상프로그램이 담긴 테이프를 관객에게 제공한다. 이어폰을 착용하고 재생버튼을 누르면서 명상프로그램은 작동한다. 그리고 관객은 시간에서 이탈한다. 을지다방에 도착하기 이전의 누리던 현재의 시간과, 강요한 것은 아니지만 그 시간에서 벗어나 있는 듯한 을지다방 안의 시간 모두에서 벗어나 모호한 지점으로 향한다. 그리고 첫 번째 지시문이 관객에게 전달된다. “삐 소리가 난 후, 빨간 버튼을 누르세요.” 녹음을 지시했고, 예상했지만 관객은 소리의 증폭을 경험한다. 이는 워크맨이 아닌 관객의 몸에 소리가 저장되는 듯하다. 또한 평소에 대수롭지 않았던, 아니 의식하지도 않았던 자신의 발소리, 저 멀리서 들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문 여는 소리, 자신의 목소리 등을 의심하고 의식하게 한다. 현재의 모든 것들은 시간의 흐름에서 벗어나는 기이한 경험이다. 무대가 아닌 현실세계를 산책하기에 관객들은 예상하지 못한 우연적 요소와도 만나게 된다. 즉 지나가는 자전거를 만나기도 하고, 철공소의 기계소리를 듣기도 하고, 누군가의 대화를 듣기도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의심했듯 현실세계의 모든 요소들을 의심하게 된다. 어느 것이 극의 요소이고 어느 것이 현실의 요소인지 모호해진다. 극과 현실, 의도와 우연이 뒤섞인다.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세운상가의 옥상이다. 군악대의 연주도 끝이 났다. 이제 다시 시간의 흐름으로 돌아온다. 근대화의 표상인 세운상가, 한 건축가의 꿈과 좌절이 혼재하는 공간, 소멸의 시간을 기다리는 그곳에서 시간의 탈구를 경험한 관객이 바라보는 서울은 바로 자신의 모습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