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선재센터의 반원형 전시실 안에 홀로 연착륙한 첨단 우주모선을 닮은 구조물은 2007년 파리(Paris) 퐁피두센터(Pompidou Centre)에서 첫선을 보인 이동식 상영관 ‘H BOX’인데, 이 조립식 상영관 자체가 이 전시의 전부라면 전부이다. 여느 기획전시의 관례를 따르지 않아서 별도의 전시 타이틀조차 내걸지 않은 채, 단지 모바일 전시 프로젝트명H BOX만 내세운 것을 봐도 그렇다. 이동식 박스형 전시실 앞에 붙은 이니셜 H는 명품브랜드 에르메스(Hermes)재단의 앞머리에서 따온 것일 게다. 미술후원 프로그램을 가동 중인 에르메스재단은 2006년부터 싱글채널 비디오 미술품의 제작을 지원하는 별도의 예술지원 프로그램을 돌리는데 이 그것이다. 동시대미술을 향한 명품 브랜드의 지원정책과 순회전시를 용이하게 할 모바일 쇼케이스만 두고 보면, 문화예술 후원과 자사 브랜드 홍보효과를 동시에 도모하는 메세나(Mecenat)의 선한 기획으로 보일 법하다. 한편 외관상 에르메스의 과 유사한 사례로 2008년 세 개 도시를 유람한 명품 브랜드 샤넬의 모바일 아트 프로젝트 <샤넬 모바일 아트Chanel Mobile Art>를 떠올릴 수 있다.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이동형 파빌리온 컨테이너는 미래세계에서 온 비행물체처럼 유선형 발광체의 모양을 취하고 있었다. 더욱이 샤넬 수석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Karl Lagerfeld)까지 행사 선두에서 얼굴마담으로 나선 행사 <샤넬 모바일 아트> 아니었던가. 샤넬의 퀼팅백에서 얻은 영감으로 작품을 제작하라는 미션이
<샤넬 모바일 아트>의 본질이었다.(2008년홍콩전시에 한국작가로는 이불설치작가이 유일하게 참가했다) <샤넬 모바일 아트>가 자사 브랜드 홍보에 역점을 둔 윈윈 프로젝트라면(일곱 개 도시순회가 애초 계획이었지만 세 개 도시순회에 그치고 행사는 중단되었다), 동시대미술 최전선에 있는 영상미술을 후원하는 에르메스의 은 그보다 당대 미술의 실험적 주류와 동선을 같이한다.
동시대 미술의 뉴 트렌드를 넘어, 무시 못 할 주류로 부상한 영상미술을 미래지향적 우주선 모양 전시실 안에서 상영하고 제한된 수의 관객이 모선형 전시실 안에서 관람하는 구조가 의 기획안이다. 물론 에 선정된 아티스트의 실험적 영상미학 덕에 에르메스 브랜드 가치의 상승효과도 기대할 수 있으리라. 비디오가 재현도구로 제도 미술계에 모습을 자주 드러낸 때는 1990년대 중반으로 본다. 어느덧 영상작품은 주류 화단이 회피할 수 없는 미학실험의 주류가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상미술은 여전히 이해의 난맥상에 있고 관람의 즐거움을 안기는 데에 무용하다.

종래의 고전매체가 스토리텔링의 구시대적 도구였다면, 시간예술을 탑재시킨 영상매체는 스토리텔링의 폭과 너비를 몇 갑절 신장시켰다. 미술계에 쏟아지는 영상작품의 지위는 20세기 초 기성 오브제의 낯선 제시로 스토리텔링의 새 틀을 짜려 한 레디메이드(readymade) 예술가의 실험과 닮아있다. 둘 다 당대 관객에게 낯설고 어색한 체험을 안겨줬고, 이내 주류로 부상했다는 공통점을 갖는다. 그렇지만 세기 초 레디메이드가 던진 질문이 변모하는 세상에 어울리는 예술 존재론이었다면, 오늘날 화단에 쏟아지는 영상작업은 기왕에 영상 미디어로 자리를 굳힌 영화예술과 견줄 때 변별력 있는 매력을 성취했느냐에 따라 미학적 승패가 갈린다. 하지만 무수한 영상미술은 여전히 무르익지 않은 제도 영화계의 단편영화에 불과해 보이거나, 기성영화 한 편에서 클라이맥스 부분만 따로 편집한 인상마저 드는 게 사실이다.
큐레이터 벤자민 베일(Benjamin Weil)이 직접 선정했다는 작가들은 각국의 유망주들로 구성된다. 은 러닝타임 10여 분 내외의 영상 여덟 점을 쉼 없이 순차적으로 스크린에 투사한다. 하지만 상이한 작가들의 상이한 작품 여덟 점을 하나의 패키지로 묶어서 보는 건 보는 재미와 매력 모두를 감지하기 어려운 처사가 아닌가 싶다. 노련한 손놀림의 장인이 포유동물 박제 한 점을 뚝딱 완성하는 적나라한 제작과정을 기록한 알리 카즈마(Ali Kazama)의 <박제사Taxidermist>(2009)를 보자. 2011년 상영작 여덟 편 중
하나로 포함된 이 작품은 해설이 포함되지 않은 무료한 다큐멘터리물 이상으로 판독되기 어려웠다. 알리 카즈마는 그동안 분야별 숙련사(들)의 업무과정을 밀착 기록한 영상물로 입지를 쌓아왔다. 때문에 이번 출품작 <박제사> 외에 도축업, 도기제작, 제강(製鋼)업 등의 전문가들이 발휘하는 기계적 숙련도를 담아냈다. 그래선지 2009년 겨울 프랑스 북부 루베(Roubaix)의 ‘동시대 미술센터’에서 열린 그의 전시에서는, 숙련사들의 모습을 촬영한 그의 작품들을 동일 전시실의 벽면을 따라 일렬로 배열한 후 동시 상영하는 식으로 전시되었다. 분야별 장인의 리드미컬한 손놀림의 총합을 한 공간에 몰아넣어 알리 카즈마가 몰입한 영상미학의 실체를 응축하려 했던 것 같다. 이에 반해 상이한 여덟 출품작 중 하나로 포함된 카즈마의 <박제사>는 그의 작품 연보로부터 고립되면서, 고유한 기운을 상실한 것 같았다. 단순한 무명 박제사의 전업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같았달까. 마찬가지 효과는 다른 출품작에도 동일하게 영향을 미쳤다. 연극적 인체 움직임에 매력을 느꼈던지 그것을 기록 재구성해온 남화연의 작업도 <당신의 유령을 해치지 마시오(Do Not Harm Your Ghost)>(2010)만 놓고 보면, 작가가 가깝게 지낸 아마추어 무용수의 고백을 기록해서 열거한 느낌 이상을 받기 어렵고, 이 작가의 관심이 스토리텔링과 인체의 전체론적(holistic) 감흥에 꽂혀있다는 사실만을 출연진의 입을 통해 확인하는 것 이상을 기대하기 어렵다. 평온한 가족 나들이와 예기치 못한 무인 정찰기의 폭격 등의 이야기를 짧은 영상에 담은 오머 패스트(Omer Fast)의 <일요일 아침Sunday Morning>(2010)도 그가 이미 <더 캐스팅The Casting>(2007)등에서 이라크 참전 미군의 체험담을 소재 삼았다는 전후 사실을 모른다면, 한 편의 무의미한 영상실험처럼 보일 게다. 상이한 작업 묶음이 초래한 힘의 분산 때문인지, 개별 작품마다의 미완성도 때문인지, 엄선된 여덟 작가들의 작품 패키지는 대학 영화학과의 과제전(展)관람의 수준을 뛰어넘지 못한 것 같았다.

자기존재감이 영롱하게 빛나는 영상작업은 이번 전시에서 쉽게 떠올릴 수 없다. 고층건물 옥상으로부터 추락하는 사내가 슬로우 모션보다 더딘 속도로 창 너머 건물 안쪽에서 벌어지는 일곱 개의 에피소드를 목격한다는, 왕지안웨이(汪建偉)의 <제로Zero>(2010)는 중국 현대미술들의 현주소를 18분 분량으로 압축한 느낌을 받았다. 등장인물들의 무의미한 의식(儀式) 반복, 정사를 위해 탈의 하는 남녀와 헤어 누드 노출, 비전문 배우들의 어색한 연기, 그리고 모호한 서사까지. 급부상한 중국 현대미술의 위상이지만 동시대 미술의 분야에서 후발주자일 수밖에 없는 자가 봉착한 어색하고 과장된 드라마성이 <제로>에 묻어있다.
지난 2010년 제6회 서울국제미디어아트 비엔날레에서 서구 상류층 중년여성들이 미에 대한 자기 생각을 털어놓는 영상 <포에버Forever>(2006)를 통해 경험했던 율리카 루델리우스(Julika Rudelius)는 에서 또 만날 수 있다. 이번엔 십대 미성년 소녀의 인체 움직임에 주목했다. <훈련Dressage>(2009)은 성심껏 얼굴을 단장하는 중이거나 장난스럽게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는 한창 멋 부리고 싶은 어린 소녀들을 주목한다. 사춘기 직전 소녀들이 화장에 몰입한 장면을 보노라면, “이게 대체 무슨 상황 설정인가” 하는 궁금증이 인다. 상황 반전은 연신 거울을 들여다보며 미숙하게 얼굴 화장을 고치던 소녀들이 그들 앞에 놓인 집기를 들고 그들이 있었던 네모난 실내공간을 마구 허무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소녀들은 네모진 실내공간의 네 벽면에 커다란 구멍이 뚫릴 때까지 실내 파손을 멈추지 않는다. 도식적으로 상상하면 마치 화이트 큐브의 권위를 물리력으로 무너뜨리는 어린 전위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저면에 깔린 작가의 의도야 어떠하건 미숙한 화장으로 단장하고 망사스타킹을 입은 어린 소녀들의 무력행사로부터 에로티즘을 느낄 수 있다. 결론적으로 소녀들이 공들여 화장한 이유는 그들을 가둔 공간을 완파하기 위한 예쁜 준비동작이었던 셈이다. 구멍으로 가득 뚫린 실내에 고요한 정적이 흐르자 카메라는 허물어진 실내에서 어색하게 포즈를 취하고 있는 소녀들을 예의 훑는다. 그 와중에도 예쁘게 포즈를 취하려 의식하는 소녀들. 동서 어딜 가도 똑같구나.

이미지 제공_ 에르메스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