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항구 통영의 3월 풍경은 언제나 북적거리는 축제로 기억된다. 통영국제음악제(TIMF)가 열리는 동안 좁은 거리는 음악회를 알리는 현수막과 포스터들로 넘실대고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는 음악소리와 여행객들의 활기찬 움직임은 이 작은 도시를 금세 축제의 도가니로 변모시킨다.
박경리(朴景利, 1926~2008), 김춘수(金春洙, 1922~2004), 윤이상(尹伊桑, 1917~1995), 전혁림(全爀林, 1916~2010) 등 20세기 최고의 한국문인과 예술가를 배출한 예향. 이곳에서 시작된 아시아 최초의 본격적인 현대음악제가 벌써 10년째로 접어들었다. 작곡가 윤이상에서 비롯되었고, 그를 기리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더 이상 그의 이름을 달지 않아도 이제 윤이상이라는 존재는 통영국제음악제의 살아있는 정신이요, 역사다. 
2011 통영국제음악제의 주제는 전환(Moving Dimension). 실제로 올해 통영국제음악제는 지난 9년의 경험을 밑거름 삼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뮌헨 챔버 오케스트라(Munich Chamber Orchestra)의 수석지휘자 알렉산더 리브라이히(Alexander Liebreich)를 첫 외국인 예술감독으로 영입하여 프로그램 선정뿐 아니라 음악제 전반의 위상을 제고시켰고, 레지던스 제도를 도입해 현재 세계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는 작곡가와 아티스트들을 통영으로 불러들였다. 그 첫 대상자는 작곡가 진은숙과 하이너 괴벨스(Heiner Goebbels), 소프라노 서예리와 피아니스트 이고르 레비(Igor Levit). 이들은 음악제 기간 중 통영에 상주하며, 음악회뿐 아니라 아카데미와 강연, 심포지엄 등의 다양한 형태로 청중들과 만났다.

‘전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이번 음악제는 예년에 비해 다채로운 프로그램들이 눈길을 끌었다. 일반적인 클래식 레퍼토리뿐만 아니라 재즈, 어린이 음악극, 아카펠라 공연 등이 포함되어 있었고, 음악제의 핵이라 할 수 있는 현대음악과 한국작곡가들의 무대 역시 스티브 라이히(Steve Reich) 탄생 75주년 기념공연, TIMF 앙상블의 진은숙과 괴벨스 작품연주회, 힐리어드 앙상블(Hilliard Ensemble)이 연주한 독특한 형태의 음악극 <그 집에 갔지만 들어가진 않았다I Went To The House, But Did Not Enter> 등으로 다양하게 선보였다.
이렇게 야심찬 준비로 새로운 도약을 꿈꾸던 2011 통영국제음악제는 시작되기 직전 뜻하지 않은 암초를 만났다. 개막공연을 하기로 되어있던 잘츠부르크 모차르테움 오케스트라(Salzburg Mozarteum Orchestra)가 돌연 공연취소를 통보해온 것이다. 그것도 출국예정 전날, 연주를 불과 사흘 앞둔 시점에서 말이다. 일본 후쿠시마(福島) 원전사고의 여파로 방사능 위험에 몸을 사린 단원들이 참가를 거부한 결과였다. 그들의 입장을 전혀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또 일방적으로 공연을 취소한다는 것은 쉽게 납득하기 힘들었다. 만약 유럽 어느 지역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더라도 과연 그들이 그렇게 무책임하게 대처했을까.

그리하여 개막공연은 음악제에 참가한 음악가들의 갈라공연 형태인 <알렉산더 리브라이히 예술감독과 좋은 친구들>이라는 자선공연으로 대체되었다. 원래 레퍼토리 중 말러(G. Mahler, 1860~1911)와 진은숙의 성악작품은 관현악 대신 피아노 반주로 서예리가 노래했고, 윤석화가 내레이션을 맡은 어린이 음악극의 일부 및 나윤선과 울프 바케니우스(Ulf Wakenius)의 재즈공연도 선보였으며, 상주 작곡가 진은숙도 무대에 올랐다. 또한 예술감독 리브라이히의 부탁으로 급히 날아온 뮌헨 챔버 오케스트라의 멤버들과 TIMF 앙상블이 함께 윤이상, 버르토크(B. Bartok, 1881~1945), 패르트(A. Part)의 곡들에 이어 바버(S. Barber, 1910~1981)의 <아다지오Adagio>를 마지막 곡으로 연주했다. 일본 대지진 피해자 구호 자선공연에 걸맞은 선곡이었다. 직접 접하진 못했지만 청중 입장에서는 여러 훌륭한 아티스트들의 무대를 한꺼번에 경험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훨씬 흥미로운 공연이었으리라 짐작된다. 물론 모차르테움의 브람스(J. Brahms, 1833~1897) 연주를 기대했던 관객들에게는 아쉬운 일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외국의 유명 오케스트라가 반드시 음악제의 개막공연을 담당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대지진의 여파로 어려운 상황에서 이 갈라공연은 의미 있는 개막행사가 아니었나 싶다. 주최 측이야 취소된 공연을 수습하느라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개막공연을 놓치고 일요일 낮 통영에 도착하고 보니 시내는 온통 사람들로 북적였다. 문화회관으로 가는 길은 마치 서울 도심의 출퇴근 시간처럼 막혀있었다. 그들이 모두 음악제의 손님은 아니었겠지만 음악제 기간 중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임이 분명했다. 오후 다섯 시 윤이상기념공원 메모리홀에서 열린 어린이 콘서트 <나이팅게일>에는 부모의 손을 잡고 온 아이들로 객석이 꽉 찼다고 했다.
밤 아홉 시에 열린 재즈보컬 나윤선과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의 공연장도 열기로 가득했다. 나윤선의 뛰어난 가창력과 무대 장악력이야 익히 알려진 바였지만 <강원도 아리랑>, <마이 페이버릿 띵즈My Favorite Things>에서 <브렉퍼스트 인 바그다드Breakfast In Bagdad>, <아벡 르 텅Avec Le Temps>에 이르기까지 그녀가 들려준 노래 하나하나는 민요, 영화음악, 록, 재즈, 샹송, 실험음악이라는 경계를 넘어 그 자체로서 하나의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기타리스트 울프 바케니우스로 인해 더욱 빛이 났다. 그 조그만 기타 하나에서 어떻게 그토록 다양한 질감과 색채의 소리가 울려나올 수 있는지, 또 어떻게 그토록 스펙터클한 음악이 뿜어져 나올 수 있는지. 존경에 찬 나윤선의 소개에서도 느껴지듯 이 둘의 깊은 음악적 교감과 우정이 빚어낸 듀오무대는 앙코르 곡으로 들려준 나윤선의 메탈리카(Metallica) 해석만큼이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월요일 두 시 공연은 진은숙과 괴벨스의 작품으로 구성된 TIMF 앙상블의 현대음악 연주회. 그럼에도 많은 청중들이 찾아왔다. 2002년부터 매년은 아닐지라도 꾸준히 음악제를 방문했는데 이번 평일 낮 공연 청중의 면면을 보니 그간 이 음악제의 고정관객이 상당히 많이 확보되어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눈길을 끌었던 진은숙의 출세작 <말의 유희Akrostichon-Wortspiel>(1991~1993)는 기교적으로 매우 어렵지만 특유의 유머러스함이 흥미로운 작품인데 이 곡을 노래한 서예리는 고난도의 음악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탁월하게 소화해냈다. 진은숙의 또 다른 곡 <구갈론-거리극의 장면들Gougalon. Scenes From A Street Theatre For Ensemble>(2009) 역시 그녀의 음색에 대한 감각 및 풍자적 재능이 돋보이는 곡이었다. 한편 괴벨스의 곡들에서는 전자음향이 두드러졌다. 첫 곡 <질투La Jalousie>(1991)가 어느 소설에 나온 소음을 토대로 한 것이라면 마지막에 연주된 <샘플러 모음곡Samplersuite>(1994)은 샘플러에 녹음된 전자음향이 처음부터 끝까지 기악앙상블과 함께 등장하는 작품이다. 간혹 이런 류의 곡에서는 기술적인 문제로 전자음향이 나오지 않아 연주가 중단되는 경우가 있다. 이번에도 그런 일이 발생했는데 덕분에 청중은 1악장을 두 가지 버전으로 반복해서 들을 수 있는 행운을 누렸다.
비록 1박 2일의 짧은 체류였지만 통영국제음악제는 언제나 새로운 음악과 더불어 통영의 멋진 풍광과 맛스런 음식까지 체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통영이라는 열악한 인프라를 지닌 지역에서 국제음악제를 계속 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쩌면 기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프랑스 남부의 조그만 마을이 파블로 카잘스(Pablo Casals, 1876∼1973)로 인해 음악제의 중심이 되었고, 오스트리아와 헝가리 접경의 외딴 지역이 기돈 크레머(Gidon Kremer)가 불러들인 연주자들로 인해 일 년에 몇 주간은 실내악의 메카가 되지 않았던가. 통영이라는 지역은 작곡가 윤이상의 고향이라는 상징적 의미뿐만 아니라 한국예술의 자존심으로서의 문화자본 또한 충분히 지니고 있다. 가시적인 성과나 경제적인 이익만을 지나치게 염두에 두기보다는 긴 안목을 가지고 우리의 고유한 문화예술 자본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각계각층에서 지원을 아끼지 말았으면 한다. 통영국제음악제가 세계적 수준의 특색 있는 음악제로 우뚝 설 수 있다면 그것은 통영을 넘어 대한민국 전체의 문화적 자산으로 자리매김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미지 제공_ 통영국제음악제 서울사무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