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의 시대(ノルウェイの森)원제 노르웨이의 숲』(1987)는 단순한 문학작품이라기보다는 일종의 브랜드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에 이르는 사이 이십대 초반을 보낸 독자들에게는 문화충격이기도 했지만 낯설고 두려운 세계로 안내해주는 네비게이터이기도 했으니 말이다.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영향은 비단 한국에 그친 것만 아니라 아시아 문화전반에 그 영향을 미쳤다. 심지어 “하루키를 읽는다”가 아니라 “하루키 한다”라는 용어로 동사화되기도 했다. 엄청난 판매부수를 올린 작품이다 보니 많은 이들이 곧 영화화될 것이라 기대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영상으로 만나볼 수는 없었다. 30여 년이 가까운 시간이 흘러 이제야 첫 영화가 선보였다. <씨클로Cyclo>(1996), <그린 파파야 향기The Scent Of Green Papaya>(1995)의 감독으로 유명한 트란 안 훙(Tran Anh Hung) 감독이 이 기대작을 맡았다.
영화 <상실의 시대>는 간단히 요약하자면 나오코키쿠치 린코(菊地?子) 분와 와타나베마츠야마 켄이치(松山ケンイチ) 분의 이야기로 줄일 수 있다.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하자면 키즈키코라 켄코(高良健吾) 분와 나오코, 와타나베의 사건들과 나오코, 와타나베, 미도리미즈하라 키코(水原希子) 분의 사건들로 이분화 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나오코와 와타나베를 연결해준 최초의 사건이 바로 키즈키의 자살이라는 사실이다. 읽고 있던 소설의 중간이 뭉텅 찢겨나가듯 키즈키의 죽음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에게 충격과 상실감을 전달해준다. 특히 키즈키의 연인이었던 나오코에게 그 죽음은 깊은 우울로 자리 잡는다. 그녀는 상실의 늪 안에서 헤매며 빠져나오려 애쓰지만 어쩐지 더 깊이 빠져드는 듯싶다.
소설은 47세가 된 와타나베가 과거를 회상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그러니까 약 30년 전, 그들이 아직 고등학교 시절이었던 때로 시계태엽을 감아보는 것이다. 그 기억의 첫 단추로 스즈키와 나오코가 등장한다. 그리고 대학에서 만난 미도리라는 여성과의 연애담이 이어진다. 영화의 특별한 점은 이 회상이라는 장치를 아예 없앴다는 사실이다. 그들의 이십대는 현재로 그려진다. 그로인해 회상하는, 향수에 젖은 와타나베라는 성숙한 화자는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이십대 화자로 바뀐다. 한마디로 영화의 분위기, 뉘앙스, 아우라가 완전히 달라진 셈이다.

소설 『상실의 시대』의 매력이라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에 대한 애틋함이라고 할 수 있다. 성도 연애도 사랑도 모두 처음이던 시절 사랑한다 내민 손길을, 상대를 자꾸 할퀴기만 하던 앳된 시절의 시행착오가 이제는 장년기에 접어든 남자의 목소리 속에서 일종의 그리움으로 번역된다. 돌아갈 수 없다는 것, 그 과거시제의 불가능성 앞에서 독자들은 나오코와 와타나베의 상실감에 공감했다. 젊은 날은 그렇게 하루하루의 무용한 추억으로 쌓이는 것이구나, 라는 허무주의와 함께 말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서 이십대 청년들의 방황은 그저 성적 호기심에 빠져든 청소년처럼 보인다. 키즈키의 자살이나 나오코의 방황도 거리를 둔다기보다 너무 추상적으로 그려졌다는 아쉬움이 있다. 주인공을 맡은 배역들도 팬시한 차림에 상큼한 이십대를 연출하고는 있지만 어딘가 상실감이랄까 공허감을 담아내기에는 부족한 눈빛을 보여준다. 조금 지독하게 이야기하자면 모두들 작품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지 못한 듯싶다. 감독도 배우도 말이다. 그들은 어딘가로 자꾸만 걸어가며 현재의 방황에서 벗어나려고 한다. 하지만 원작을 찬찬히 읽다 보면 그들은 오히려 상실의 깊은 늪에 점점 더 몸을 맡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상실에는 중독성이 있다. 천천히 가라앉아 현실에서부터 점점 멀어져 ‘나’라는 자아의 틀에 갇히는 바로 그 유폐적 쾌락 말이다.
원작의 영화화는 제2의 창조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와 서사적 구조를 그대로 따른다고 해서 원작의 느낌을 그대로 전달할 수는 없다. 때로는 완전히 현대적으로 혹은 다른 민족의 언어로 번역했을 때 오히려 원작의 의도가 더 절실히 전달되는 경우가 있다. 2011년 개봉했던 <제인 에어Jane Eyre>나 이안(李安) 감독이 연출한 <센스 앤 센서빌리티Scents And Sensibility>(2011)도 그 예시가 될 수 있다. 결국 감독도 제1의 독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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