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계획의 전략적 접근방법 중의 하나로 디펜스 플랜(defence plan)방어적 계획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도시공간의 취약적 요소들을 계획의 주요타깃으로 설정함으로써 도시를 감각적으로 관리하겠다는 취지에서 비롯된 개념이다. 송전철탑, 고가도로 밑, 열악한 환경의 밀집주택가 등을 미관개선을 위한 어떤 시도를 통해 양질의 이미지로 변화시키는 작업 등이 곧 디펜스 플랜에 해당된다. 디펜스 플랜은 이 같은 시각환경에 관련된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환경 개선차원에서도 곧잘 적용된다. 우범지역의 조명경관을 극대화시킴으로써 시민치안을 확보하는 방법 등이 대표적 사례라 볼 수 있다. 공공미술 또한 일정 영역에서 이와 유사한 속성을 지닌다. 특히 공공미술 작업을 장소와 관련시켜 적용하는 프로젝트 등에 있어서 디펜스 플랜의 개념은 더욱 중요한 요소로 부각된다. 물론 이렇게 표현된 물리적 이미지는 장소의 정체성에 따라 보다 넓게 사회·문화·정치적 소통의 장으로 확대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동피랑 마을 프로젝트’는 경남 통영시의 낙후한 주거촌 한 곳을 벽화로 장식하는 사업이 주된 내용이긴 하지만 이 사업은 결국 주거환경이 열악한 도시영세민들의 삶의 질을 어떻게 관리하고 개선시킬 것인가 하는 총체적 질문과 연계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20인 작가들, 일거에 붓을 들다 구(舊) 전남도청 리모델링공사 차단막 예술작품화 사업이하 아트차단막사업 또한 디펜스 플랜 개념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공사현장이라는 열악한 이미지에 시각적 쾌적성을 부여하자는 취지로 시작된 이 사업은 총 2,500만 원의 사업비가 소요되었고, 작품의 존치기간은 2년여로 예상되고 있다. 작품의 규모는 높이 19m×길이 150m에 달한다. 사업진행 방식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이 주최하고 광주문화재단이 이를 위탁사업으로 주관하는 형태로 추진됐다. 아트차단막사업이 물론 시각적 이미지 개선만을 겨냥한 것은 아니다. 광주 5·18에 대한 기억의 재생공간으로서 구 전남도청이 지닌 특별한 장소성, 그와 같은 역사적 건물이 아시아문화전당으로 재탄생되는 유의미한 변화, 그리고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구축에 집중된 시민사회의 관심제고 등 다양한 관점이 사업목적에 내포돼있다. 다양한 메시지를 겨냥하고 있는 만큼 프로젝트의 추진절차도 논의구조의 경로를 취하게 됐다. 창작예술품으로서 개별작가들의 독특한 개성이 드러나야 할뿐만 아니라 사업취지가 갖는 메시지를 일관된 느낌으로 표출해야 하는 공감의 장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우선 프로젝트가 지니는 공공성에 따라 다수 작가의 합동창작(합작) 형태가 진행방식으로 채택됐다. 이에 따라 광주지역 내 작가 20여 명이 참여작가로 선정됐고, 두 차례의 워크숍을 개최했다. 참여작가 워크숍에서는 개별작가의 표현 스타일을 유지하면서도 사업목적에서 제시된 통일된 메시지를 어떻게 만들어 갈 것이냐는 문제에 논의가 집중됐다. 그리고 장시간의 토론을 거쳐 한 가지 관점으로 생각이 모였다. 도시는 사소한 일상과 거대한 꿈이 혼존하는 곳이지만 그 일상의 뒤란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우리에게 무엇일까?’라고 가끔씩 자문하는 시민의 사색이 결국 도시의 미래를 규정해간다는 착안이었다. 광주의 정체성과 자신과의 관계를 자문해보는, 이를테면 ‘광주의 문화냄새 찾기’로 명명된 작업테마는 광주의 궤적과 시공, 당대의 일상, 그리고 광주의 꿈을 담자는 구체적인 방법론으로도 의견이 모아졌다.
교훈을 남긴 합동창작의 난제들 구체적인 방향성이 설정되긴 했지만 각각 개성이 다른 20인 작가의 손길이 어떠한 연계성을 갖고 통일된 이미지를 만들어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여전히 난제였다. 밑그림을 그리고 그곳에 함께 색을 입히는 벽화제작 방식이 손쉽게 떠올랐지만 일찌감치 논의에서 밀려났다. 그런 제작방식을 택한다면 굳이 합동창작의 틀이 필요하겠느냐는 것이 대다수 작가들의 의견이었다. 길이 150m에 달하는 화폭의 규모 때문에 지루하고 답답한 그림이 될 것이라는 반대론에도 힘이 실렸다. 결국 작가 개개인의 스타일이 충분히 발현될 수 있도록 10분의 1로 축소된 화폭에 매달려 일거에 동시작업을 한 후 1차 완성된 그림에 필요한 이미지를 다시 추가해 보정하는 제작과정이 하나의 대안으로 도출됐다. 이 같은 단계별 제작방식은 아트차단막의 제작공정에도 어울리는 일이었다. 차단막의 규모 상 ‘축소화폭에 그림그리기→스캐닝→컴퓨터 그래픽→실사출력’과 같은 단계별 공정이 어차피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미지 추가와 보정작업은 컴퓨터 그래픽 과정에서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과제였다. 테마와 제작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자 이틀 뒤인 4월 26일, 20인의 작가들은 곧바로 제작에 들어갔다. 작업은 구 도청 앞 광장에 위치한 쿤스트할레(kunsthalle)문화마루 전시홀에서 이뤄졌다. 2014년 완공예정인 아시아문화전당의 쇼케이스 기능을 갖도록 설치된 쿤스트할레 홀은 각종 문화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시민친화적 공간이라는 점에서 전략적으로 채택됐다. 실제로 그날 작가들의 전 작업과정은 많은 관람객들과 언론인들의 뜨거운 관심 속에 진행됐고, 방송뉴스는 물론 다음날 몇몇 조간신문의 1면 머리사진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작가들은 작업공간 한편에 쌓아 둔 막걸리를 마시면서 농부들처럼 일했기에 1차 작업은 하루 만에 완성됐다. 그리고 다음날 곧바로 품평에 들어갔다. 작가, 아시아문화중심도시추진단, 그리고 광주문화재단 관계자가 상호의견을 모은 합평회에서는 세 가지 정도의 아쉬운 대목들이 주요 얘깃거리가 됐다. 우선 아트차단막이 걸릴 구 도청건물이 광주 5·18항쟁의 핵심공간이라는 사회사적 의미가 미약하다는 지적이 제기됐으며, 초기 논의단계부터 우려했던 대로 개별작가들의 작업을 잇는 스토리텔링이 부실하다는 점, 화폭의 면별로 분산된 이미지가 혼란스럽다는 점 등이 논란거리가 됐다. 컴퓨터 그래픽 과정을 통해 이 같은 문제점들을 보정하자는 합의를 이끌어내는 일은 그러나 순탄치 않았다. 일정부분 작가들의 개성이 훼손되는 일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공공미술이 존중해야 할 다중의 가치를 내세우며, 공감대를 만들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기울였지만 합의에 이르기까지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을 정도다. 고민스럽고 난감한 시간들이었으나 유익한 체험이기도 했다. 다수의 작가들이 참여하는 합동창작의 경우 절차와 과정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작업 전 논의단계에서 더 밀도 있게 충분한 토론이 이뤄졌다면 더욱 자연스러운 결론이 유도됐으리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과물에서 지적된 부실한 대목도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 당연하다.
기억의 재생을 창조의 동기로 아트차단막사업은 그렇게 해서 최종안이 마련됐다. 6월 10일 실사를 위한 그래픽 CD가 마침내 구워졌다. 사업구상에서부터 두 달 남짓 적잖은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차단막 설치현장에 세워질 안내패널의 문구 속에는 참여작가들을 비롯해 프로젝트를 추진한 주체들의 고심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도시는 사소한 일상과 거대한 꿈이 혼존한다. 꿈은 물론 일상의 뒤란에서 가끔 던지곤 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라는 시민의 사색에서 시작된다. 광주는 우리에게 무엇일까? 도시는 늘 숱한 일상이 풍기는 다양한 삶의 냄새에 가려져있기에 그 답을 찾기는 쉽지 않겠지만, 지난 광주의 궤적과 시민의 소망 속에 존재하는 미래 광주의 모습에서 ‘나와 광주’로 이어지는 관계의 일면을 포착할 수 있을 것이다. 20인 작가의 숨결이 담긴 구 도청 아트차단막작업은 낯익은 과거와 낮선 미래, 기억과 꿈의 파노라마 속에 살아가는 시민의 삶을 담자는 의도에서 비롯됐다. 전래되어진 농경사회의 우직한 민중정서, 피와 땀이 밴 치열한 사회변혁의 몸부림과 그 상처들, 상처의 치유를 통한 일상의 회복,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 비상하고자 하는 시민의 의지가 그곳에 담겨있다. 기억의 재생이 창조의 동기로 작용하는 선순환구조를 통해 도시는 생명을 영위한다. 20인 작가들은 그렇게 광주를 얘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