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위기 이후 대중문화의 화두가 아버지였듯이 일본에서도 오랜 경기침체와 대량 구조조정으로 생겨난 실업난으로 인해 흔들리는 아버지가 대중문화의 화두로 자리 잡았다. 한국 ‘아버지 붐’의 중심에 있었던 조창인의 『가시고기』는 올봄 일본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지기도 했다. 제목은 <굿 라이프-고마워요 아빠, 안녕>. 뿐만 아니라 우에토 아야(上?綾)일본 영화배우가 등장하여 시리즈물로 방영되고 있는 소프트뱅크의 휴대전화 광고-아버지는 개, 오빠는 흑인, 그리고 어머니와 딸은 ‘평범한 일본인’이라는 설정-도 가정에서 아버지의 역할이 어떻게 비춰지는지를 반영하는 광고다.
영화에서도 이런 현상을 반영이라도 하듯이 부자관계를 다룬 작품들이 등장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프린세스 토요토미Princess Toyotomi>다. 400년 전 일본의 역사를 바꾼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이 바로 그것인데, 유신은 일으켰지만 자본이 없던 메이지정부는 상대적으로 부유했던 오사카(大阪) 상인들의 도움을 받기 위해 오사카가 독립국임을 인정한다. 이후 400년 동안 오사카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 사실을 전달하고 대대로 자신들이 독립국임을 믿으며, 해마다 5억 엔한화기준 약 70억 원 상당의 정부예산을 받아 이를 유지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이 예산은 사단법인 오조(OJO)오사카성유적지정비기구라는 곳이 관리하며 서류상으로는 다른 곳에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오사카는 오코노미야키, 타코야키, 그리고 꼬치튀김, 왁자지껄한 아줌마들과 호피무늬를 즐겨 입는 것으로 유명한 도시다. 이 도시의 사오십대 중년남성들은 토요토미 가(家)의 마지막 후손이 어딘가 살아있고 그 후손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 호롱박이 내걸리면 자신들은 봉기해야 한다고 믿으며 일상을 보낸다.
영화는 이런 내용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내각은 물론 사법부와도 독립된 정부기관 회계감사원에서 감사원 세 명이 도쿄(東京)에서 오사카로 파견되어 보조금의 사용출처를 감사하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되는데 파견된 감사원 세 명은 빈틈없고 꼼꼼한 일처리로 ‘귀신’이라고 불리는 마츠다이라오카다 마사키 분, 영국인과 일본인의 혼혈로 아직 신입이지만 일처리는 인정받는 아사히츠츠미 신이치 분와 엉뚱하지만 가끔 기적을 일으키는 도리이아야세 하루카 분다.
영화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川家康, 1543~1616)가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의 오사카성을 함락시켰던 전투, 오사카 여름의 진(大阪 夏の陣)을 모티프로 하여 영화의 시작과 마지막을 ‘오사카 여름의 진’ 일부분으로 재현하고 있지만, 영화전반에 걸쳐서는 메이지유신이 역사적 배경으로 등장한다. 일본은 메이지유신 이전 각 지역별로 자치제를 꾸려 살아가고 있었으나 메이지유신으로 인해 도쿄 중심의 통일국가로 재편성된다. 여기에서 주목할 또 하나의 사실은 메이지유신으로 일본의 가부장제 역시 천황제를 주축으로 재편성되었다는 사실이다. 가부장제의 재확립은 이 영화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다.
독립 오사카국의 총리는 마츠다이라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면 남자들은 봉기하고 여자들은 집에서 그들이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400년 동안 자신들이 믿어온 운명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오사카국 총리의 아들은 여자가 되고 싶다며 여학생용 교복을 입고 학교에 가서 갖은 왕따와 놀림을 당한다. 그(그녀)가 지켜야 하는 것은 공주, 즉 ‘프린세스’지만 그는 오히려 프린세스에게 도움을 받는다. 프린세스를 마지막에 지켜낸 것은 그가 아니라 감사원 도리이인데 이름도리이는 신사입구의 신성한 출입문을 뜻한다에 걸맞게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기적을 일으킨 것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프린세스를 지켜내야 하는 중년남성들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흘러간다. 이들은 현재 일본의 갈 곳 없는 아버지들을 대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프린세스와 이를 지킨 도리이 중심의 이야기가 아니라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마츠다이라가 이야기의 중심이 된다. 부모의 이혼으로 어머니와 함께 오사카에서 도쿄로 이주해 도쿄대학교를 졸업하고 관료가 된 마츠다이라. 아버지는 죽기 직전 그에게 연락을 하지만 마츠다이라는 바쁘다는 이유로 아버지와 마지막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오사카의 아버지들은 죽기 전 아들에게 자신들이 지켜온 역사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아들에게 그 권리를 건네주는 것이 마지막 의무였던 것이다.
영화는 토요토미 가의 마지막 후손이 정말로 오사카에 살고 있는지 아닌지를 명시하지는 않는다. 영화 속 프린세스라고 추정되는 여고생은 영화의 중심이 아니라 상징적 존재다.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의 가부장제가 천황가를 중심으로 재편성되었고 전후에는 천황가가 상징적 존재로 바뀌었음에도 가부장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듯, 영화 속 프린세스도 실존여부와 관계없이 어딘가에 살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로 존재한다. 프린세스라는 제도 아래 오사카국의 남성들은 가부장제를 지키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이다. 이렇게 부자관계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이 영화에서 마키메 마나부(万城目?)의 원작에 있던 판타지와 코믹성을 적절하게 배합한 부분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또한 원작에서는 남자들만 오사카국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설정이었지만 영화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모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또한 유사시 광장에 모여 집회를 열 권리는 남자들에게만 있다는 설정으로 원작보다 더 공고한 가부장제를 표방한다. 결국 400년 동안 이들이 지켜온 것은 ‘프린세스 토요토미’가 아니라 프린세스 제도를 가능하게 한 황권과 그 밑에서 견고해진 일본의 가부장제였던 것이다. 칸사이(關西) 지역의 지역색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부장제에 묻혀 지역색이 잘 드러나지 못한 것은 또 다른 아쉬움으로 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