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의 그림, 그 은유적 정체를 찾아서
지난해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기획한 <아시아 리얼리즘展>을 관람하면서 다시 한 번 아시아를 성찰해보았다. 지금까지 나는 한국문학 비평가로서 한국문학이란 개별 국민문학의 미적특질에 대한 심미적 이성의 실재를 밝혀내는 데 내 비평의 역량을 담금질해왔다. 그 과정에서 한국문학의 협소한 영역에 국한되지 않고 한국문학을 포함한 아시아문학에 대한 비평적 관심을 쏟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오던 터에, <아시아 리얼리즘전>에 초대된 아시아 화가들의 색의 언어를 통해 문학과 접속할 수 있는 모종의 비평적 통찰을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큰 소득이었다. 그때 보았던 그림들 중 좀처럼 잊히지 않는 그림 한 점이 있다. 인도네시아의 화가 트루부스 수다르소노(Trubus Sudarsono, 1924~1966)의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Women With Chicks>(1960)가 그것이다.
화폭에는 두 여인이 그려져 있다. 의자에 앉아있는 한 여인은 다른 여인으로부터 머리손질을 정성스레 받으면서 입술을 앙다문 채 정면을 응시하고 있는데 두 눈에는 어떤 결기가 서려있다. 이 여인의 표정은 머지않아 어떤 일이 벌어질 텐데 그 일을 의연히 맞이하겠다는, 으레 그 일을 맞이할 준비를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는, 자연스러우면서도 담대한 마음가짐을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그림에서 흥미로운 것은 두 여인 외에 병아리들이 있는데 이 병아리들은 알을 갓 깨고 나왔다는 점이다. 모르긴 모르되 머리손질을 받고 있는 여자의 내적상태가 갓 부화한 병아리로 형상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림의 배경은 짙은 암갈색이므로 하얀 상의를 입은 여인과 하얀 병아리는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암갈색의 배경은 마치 이 여인을 에워싼 모종의 불확실하고 암울한 사위가 그녀의 삶을 따라다니리라는 것을 침묵의 형식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다.
이 한 폭의 그림은 내게 말을 걸어왔다. 좁게는 인도네시아가 겪었고, 겪고 있으며, 이후 겪어야 할 현실이었고, 넓게는 동남아시아(혹은 아시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이후 도래할 그 무언가에 대한, 시각적 은유에 깃든 삶의 진실이었다. 그렇다면 이 은유의 정체는 어떤 것일까. 그동안 한국사회에서 번역된 동남아시아문학의 대표작들을 통해 이 은유의 정체를 함께 생각해보자.

베트남전쟁(혹은 이후)에 대한 문제의식
한국사회와 가장 친밀한 동남아시아 국가는 단연 베트남이다. 동남아시아문학 중에서도 베트남문학이 한국사회에는 비교적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한국과 베트남은 쉽게 끊을 수 없는 역사적 인연을 맺고 있는데 베트남전쟁(1965~1975)은 양쪽 모두의 개별역사에서뿐만 아니라 두 나라 사이의 역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한국에서 번역된 베트남문학 중에서도 베트남전쟁을 다룬 작품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바오 닌(Bao Ninh)의 장편소설 『전쟁의 슬픔』예담, 1999과 반 레(Van Le)의 장편소설 『그대 아직 살아 있다면』실천문학사, 2002, 그리고 휴 틴(Huu Thinh)의 시집 『겨울 편지』문학동네, 2003 등은 베트남전쟁을 정면으로 다룬 문제작들이다. 이들 작품은 베트남전쟁을 핍진하게 다루면서 전쟁의 불가해성과 반인간적 폭력성이 갖는 전쟁의 비극성을 통해 반전평화의 문학적 진실을 드러낸다. 무엇보다 이들 작품이 베트남전쟁에 대한 핍진성을 드러내는 것은 작가들이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여 전쟁의 참상을 직접 경험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북베트남의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하여 베트남전쟁의 승리를 체험하는 가운데 깊이 있는 문학적 성찰을 보여준다. 한국사회는 이들 작품을 통해 그동안 냉전시대의 이념적 질곡 속에서 베트남전쟁을 에워싼 온갖 왜곡에 대한 반성적 성찰의 계기를 갖게 된다. 특히 베트남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자정(自淨)하게 되는데 한국사회를 오랫동안 짓눌러온 반공주의는 북베트남의 인민해방군을 이른바 베트콩으로 호명하면서 인민해방군을 절대악으로서 간주해왔다. 하지만 이들 작품을 읽으며, 다음과 같은 일련의 질문에 대한 성찰을 통해 이와 같은 인식이 얼마나 큰 오해였는지 깨닫게 된다. 무엇 때문에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베트남전쟁이 일어났는지, 그토록 막강한 화력과 경제력을 갖춘 세계 초강대국 미국이 10여 년이 넘는 기간 동안 전쟁을 치르면서 결국 패배한 이유가 무엇인지, 달리 말해 미국을 비롯한 한국이 그토록 이념적으로 적대시한 북베트남이 대승을 거두면서 결국 베트남의 분단을 종식하고 통일의 대업을 달성한 이유는 무엇인지, 그리고 비록 전쟁에서 대승을 거뒀으나 전쟁의 광풍이 휩쓸고 간 자리에 덩그러니 남은 뭇 존재들의 저 먹먹한 어둠 속 심연의 정체는 무엇인지…….
이렇게 바오 닌, 반 레, 휴 틴의 작품들은 북베트남의 인민해방군으로 참전한 경험을 토대로 베트남전쟁을 매우 사실적으로 형상화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독자들은 이들 작품에서 아름다운 인간을 발견한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밖에 없는 인간의 저 담대한 위엄이 지닌 평화에 대한 갈망 때문에 죽음의 한계를 초월해버린 인간의 아름다움을 목도한다. 더욱이 우리는 죽은 자들을 대신하여 살아남은 자들이 치욕스러운 삶을 살지 않으려는, 역사적 존재로서의 베트남 사람들 속 역사적 자존감과 무한한 행복감을 만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또 다른 베트남문학이 있다. 베트남전쟁에 참전하지 않은 세대들의 작품은 베트남전쟁 이후 직면하고 있는 베트남의 현실을 다룬다. 그중 호 아인 타이(Ho Anh Thai)의 장편소설 『섬 위의 여자』인천문화재단, 2010와 응우옌 옥 뜨(Nguyen Ngoc Tu)의 장편소설 『끝없는 벌판』아시아, 2007이 번역되어 있다. 두 작품의 밑자리에 흐르고 있는 문제의식은 베트남이 전쟁 이후 국가재건에 총력을 쏟는 과정에서 생기는 현실의 모순을 간과하지 않고 있다. 『섬 위의 여자』의 경우 작품은 표면상 육지로부터 떨어진 섬의 양식장에서 행해지는 노동과 그곳 젊은이들의 사랑을 다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 소설이 정작 전달하고 싶은 것은 베트남전쟁 이후 10여 년 동안 진행된 국가재건 기간 동안 베트남이 어떻게 사회주의적 인간을 도식적으로 만들어나갔는지, 그 과정에서 집단체제가 인간을 어떻게 억압했는지에 대한 일종의 자기 비판적 메시지다. 베트남의 이른바 도이 머이(Doi Moi) 정책베트남식 개혁, 개방정책 이전까지의 경직된 현실이 초래하는 모순을 밀도 있는 구성으로 묘파한 수작(秀作)이다.
그런데 베트남전쟁 이후 베트남의 국가재건 과정에서 초래된 현실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사회주의 국가의 문학 대부분이 그렇듯 국가를 비판하는 것은 국가의 근간을 이루는 사회주의 정치적 이념을 부정하는 것으로 인식된 나머지 자칫 반국가적·반체제적 문학의 혐의로 정치적 숙청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응우옌 옥 뜨의 『끝없는 벌판』과 같은 작품이 갖는 문제의식은 매우 급진성을 띤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으며, 이 작품의 경우 정치적 알레고리로 읽힐 소지 역시 다분하다. 베트남의 도이 머이 정책으로 사회주의 국가 베트남은 시장경제체제로 변환하게 되지만 베트남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며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온갖 부패로 타락한 관료적 사회주의이며, 베트남의 오랜 습속인 전근대적 가부장제의 모순이 베트남사회의 뿌리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는 점을 『끝없는 벌판』은 신랄히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베트남문학이 한국사회에 다양하게 번역, 소개된 것은 아니지만 베트남전쟁 참전세대의 작품과 그 이후 세대의 작품을 통해 베트남에 대한 이해의 길이 한국사회에 생기고 있다는 것은 한국과 베트남 사이 점증되고 있는 교류는 물론, 동남아시아의 맹주인 베트남을 넓고 깊게 이해하는 면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일이다.

   
민주주의 회복과 제국의 폭력
최근 한국에 소개된 동남아시아의 문학 중 각별히 눈에 띄는 것은 네팔 작가 나라얀 와글레(Narayan Wagle)의 장편소설 『팔파사 카페』문학의숲, 2011와 필리핀 작가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Fransisco Sionil Jose)의 장편소설 『에르미따』아시아, 2007, 그리고 버마의 현대시인 시선집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문학들, 2010 등이다. 네팔, 필리핀, 버마의 작품들을 보면서 그동안 이들 문학에 얼마나 문외한이었는지를 새삼 절감한다. 그러면서 이들 문학이 20세기 이후 한국문학이 지속적으로 부딪치고 있는 문제들과 절연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팔파사 카페』, 『에르미따』, 『어느 침묵하는 영혼의 책』에서 심각히 다루고 있는 문제는 각 작품이 딛고 있는 구체적 현실 속에서 탐문하고 있는 역사와 민주주의, 그리고 인간의 해방이다.
나라얀 와글레는 네팔이 당면하고 있는 정치사회적 문제를 회피하지 않는다. 흔히들 네팔을 히말라야의 자연과 등치시키면서 인간의 비루한 삶의 현실과 거리를 둔, 어떤 초월적 자연의 비의성을 탐구하는 나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작가는 『팔파사 카페』를 통해 지금까지 네팔에 대해 극히 부분적인 것만 상징 조작된 이와 같은 점과는 전혀 다른 현실적인 문제들을 만나도록 한다. 네팔의 지식인이자 화가인 작중인물은 네팔의 히말라야 구릉지대에서 반정부투쟁을 벌이고 있는 마오이스트(Maoists)들과 그곳의 마을 사람들을 만나면서 네팔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직시하고 어떻게 하는 것이 네팔의 평화를 모색하는 일인지를 성찰한다. 여기서 인상 깊게 읽은 대목은 작가에 의해 히말라야 구릉지대가 반정부투쟁을 치열히 벌이는 삶의 현실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구릉지대는 인간의 삶과 동떨어진 초월적 자연의 비의성으로만 이뤄진 세계가 결코 아닌 것이다. 네팔 작가의 시선에 의해 포착된 네팔의 자연은 인간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숭고한 곳이되, 그곳은 네팔 사람의 삶의 터전으로서의 자연이지, 삶과 격절된 신비만으로 이뤄진 땅이 아니다. 때문에 마침내 화가가 그려내고 있는 팔파사 연작들은 네팔 속 오욕의 역사를 지워내고 그 역사 속에서 상처받은 사람들을 치유하여 새로운 민주주의로 향하는, 희망의 색으로 채워진 그림이다.
이러한 면모는 필리핀의 국민작가라는 칭호를 듣고 있는 프란시스코 시오닐 호세의 장편소설 『에르미따』에서도 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필리핀이 겪은 언어절(言語絶)의 역사적 참상에 전율하도록 한다. 주인공 에르미따는 일본제국주의가 필리핀을 점령했을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참히 겁탈당한 필리핀 귀족여성으로부터 버림받은 사생아로 그녀는 출생의 저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창녀의 삶을 선택한다. 이후 여성의 성적매혹을 최대한 무기삼아 정·재계 유력자들의 권력을 빌어 자신의 천박한 삶을 조롱했거나 아예 외면하려한 사람들에게 복수를 감행한다. 여기서 작가는 에르미따를 통해 독자들에게 공격적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창녀의 삶을 선택한 에르미따를 반윤리적이라고 하여 비판할 수 있는가. 당신은 창녀인 에르미따의 복수행위에 깃든 그녀의 진정성을 이해할 수 있는가. 당신은 모든 것을 다 이룬 에르미따가 여전히 무언가에 쫓기고 마음의 평화를 이루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는가. 작가는 이와 같은 물음들 속에서 그녀의 저주받은 삶에 대한 이해의 틈을 낸다. 에르미따의 내적심연에 똬리를 틀고 있는 제국의 폭력에 대한 분노와 그것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 없이 창녀로서 그녀의 삶이 갖는 진정성을 온전히 이해하는 일은 쉽지 않을 터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서운 암시를 던진다. 만약 당신이 에르미따의 삶을 온전히 이해했다면 그토록 벗어나고자 한 제국의 질서에 그녀가 더욱 친친 옥죄어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동남아시아문학의 활발한 소개를 기원하며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인도네시아의 그림 <병아리와 함께 있는 여자>의 은유적 정체를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 비록 한정된 작품이지만 한국에 번역된 베트남, 네팔, 필리핀, 버마 등의 동남아시아문학은 20세기 이후 각자가 직면한 구체적 현실 속에서, 정치사회적 근대를 추구하는 도정에 마주치는 숱한 어려움들을 문학적 진실로 드러내기 위한 힘든 싸움을 하고 있다. 어디 하나 이 싸움을 순탄하게 그리고 자명하게 수행하는 곳이 없다. 20세기 동남아시아에 짙게 드리운 타율적 근대를 슬기롭게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절실히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최근 아시아문학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고 있는 것을 계기로 동남아시아문학에 대한 관심 역시 커가고 있는 것은 분명 고무적인 일이다. 아시아의 구성원으로서 아시아를 이해하는 일은 사람을 이해하는 일이며, 그것은 곧 삶과 현실을 이해하는 일이다. 동남아시아의 문학이 지금보다 더욱 활발히 한국사회에 소개됨으로써 동남아시아의 삶과 현실을 넓고 깊게 이해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