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이하 PIFan(Puchon International Fantastic Film Festival)가 지난 7월 24일 열다섯 번째 생일잔치를 마쳤다. ‘시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Re-Start15’라는 슬로건을 내세운 제15회 부천판타스틱영화제는 34개국 221편장편 127편, 단편 94편의 작품을 상영해 아시아 최대의 장르영화제다운 위용을 갖췄다고 자평했다. 이상하게도 국내영화제는 ‘최대’라는 것에 대한 이상한 강박이 있다. 규모의 경제학이 영화제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잣대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PIFan이 진정으로 아시아 최대(그리고 최고)의 장르영화제로 ‘다시 시작하기’ 위해 먼저 떨쳐내야 하는 것이 바로 이러한 규모에 대한 강박이지 않을까?
지역적 한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부천은 영화제가 열리기에 만족스러운 지역이 아니다. 해운대를 기반으로 하는 부산국제영화제는 두말할 것도 없거니와, (아직은 후발주자로서의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제천국제음악영화제 역시 청풍명월로 대변되는 자연경관의 매력을 기반으로 관객을 유혹하고 있다. 실제로 많은 세계적 영화제가 관광지를 중심으로 한다는 사실은 영화와 관광의 접목이 영화제의 성장에 중요한 요인 중 하나임을 증명한다. 이러한 면에서 관광의 요소가 전무한 PIFan은 꽤 치명적인 약점을 안고 있는 셈이다. 서울에서 일반 대중교통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다는 점이 PIFan의 장점이기는 하지만 영화가 상영되는 멀티플렉스 영화관 바깥으로 단 한 걸음만 벗어나도 영화제만의 활기와 역동성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보다 아쉬운 일이다. 영화제가 관광지를 만들 수 없다면 결국 영화제 스스로가 하나의 관광상품이 되어야 한다. 즉 관광지의 부재를 극복하며 페스티벌 특유의 자유로움과 활력을 만끽할 수 있는 이벤트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장마철’이라는 계절적 한계를 역으로 활용한 ‘우중영화산책’은 적절한 이벤트처럼 보인다. 우중영화산책은 영화제 기간 동안 부천상동영상단지 내에 텐트촌을 만들어 영화와 음악을 함께 즐길 수 있도록 한, 신선한 시도였다. 올해 처음으로 시행된 탓에 다소 빈약한 프로그램이 아쉽기는 했지만 텐트촌이라는 특성에 걸맞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뒷받침될 수 있다면 PIFan만의 이벤트로 영화제에 활기를 불어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PIFan만의 브랜드는 무엇인가 물론 이벤트는 이벤트일 뿐 영화를 대신할 수는 없다. 결국 PIFan은 상영작 자체에서 영화제의 매력을 더 부각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PIFan이 1997년 제1회 영화제 이후 2000년대 중반까지 폭넓은 대중적 지지를 확보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보다 프로그램 자체의 개성에 있었다. 호러와 스릴러, 판타지를 중심으로 하는 PIFan의 프로그램은 미지의 작품, 감독, 상상력을 만난다는 설렘이 있었다.
이는 거장이라 일컬어지는 영화작가들의 작품을 프로그램의 중심에 두는 부산국제영화제와도 확연히 구분된 PIFan만의 매력이었다. 제1회 영화제에서 상영된 <킹덤The Kingdom>(1994)라스 폰 트리에(Lars Von Trier) 감독, <테시스Tesis>(1996)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Alejandro Amenabar) 감독, 제3회 영화제의 <큐브Cube>(1999)빈센조 나탈리(Vincenzo Natali) 감독, <블레어 윗치The Blair Witch Project>(1999)다니엘 미릭(Daniel Myrick), 에두아르도 산체스(Eduardo Sanchez) 감독 등은 영화제 상영을 통해 매니아층이 형성되었고, 그것이 국내개봉 당시 일반관객들의 지지를 얻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PIFan 상영작에 대한 일반관객의 신뢰를 의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영화인들이 PIFan을 반드시 참여해야 하는 중요한 영화제로 인식하는 효과를 낳게 된다. 하지만 현재의 PIFan은 2000년대 초중반에 비해 자신만의 브랜드 가치를 많은 부분 상실해버린 듯하다. 영화제에서 상영된 영화는 일단 기피하는, 상업영화 지향적인 일반관객의 취향 탓도 있겠지만 개성 넘치고 작품성 있는 영화를 갈망하는 특정관객층에게도 PIFan 상영작(또는 화제작이나 수상작)이라는 인장은 작품선택에 큰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이 현실이다. 올해만 보더라도 각 부문의 수상작이 국내에 개봉할 수 있을지가 의문스러울 뿐만 아니라,(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한 <황해>는 예외다)수상작에 대한 대중적 관심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영화제에서 사소하게 볼 문제가 아닌 듯하다. 더구나 이러한 문제가 고착된다면 여러 국제영화제가 상영작 확보를 위해 경쟁하는 상황에서 질적으로 우수한 작품을 수급하려 할 때 불리한 위치에 설 수밖에 없다. 이처럼 국내에서 PIFan만의 브랜드가 점점 약해지고 있는 상황에서 올해 상영되는 영화 편수가 얼마나 늘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관객이 찾았는지 하는 양적규모로 영화제의 위상을 평가하려는 태도는 그리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이는 국내의 국제영화제가 갖는 고질적인 문제기도 하다)
이는 양적규모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벌써 열다섯 번째 행사를 치른 영화제의 태도로서는 적당하지 않다는 의미다. PIFan 상영작에 대한 대중적 신뢰와 기대를 확보해나가지 못한다면 몇 편의 영화가 상영되든 간에 영화제는 몇몇 매니아들만의 ‘그들만의 리그’로 머물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제 개막식은 패션쇼가 아니다 이번 영화제의 개·폐막식은 기존의 부천시민회관에서 자리를 옮겨 부천실내체육관에서 치러졌다. 개막식의 장소를 바꾼다는 것은 그리 쉬운 선택이 아니다. ‘시민과 함께, 세계와 함께, Re-Start15’라는 슬로건에도 드러나듯 이는 좀 더 많은 ‘부천시민’이 함께하는 대중적인 영화제로 거듭나기 위한 시도였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변화가 영화제 자체의 필요성에 의한 것이었는지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점이다. 실제로 부천실내체육관의 공간적 특성 상 산만한 분위기가 이어져 무대에 집중하기 어려웠고, 더구나 개·폐막작의 관람조건은 최악에 가까웠다. 문제는 이러한 결정이 영화제 자체의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2010년 신임 부천시장으로 당선된 김만수 시장이 조직위원장을 맡게 된 것과 무관해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국내 대부분의 국제영화제는 지자체의 지원 속에 운영되고 있고 이로 인해 각 지역의 지자체장이 영화제의 조직위원장을 맡는다. 물론 영화제의 실질적 지원주체가 조직위원장을 맡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영화제의 운영에 영화와 무관한 정치적 결정의 흔적이 새겨지는 순간들이다. 이번 개막식 장소의 선정이 못내 찜찜했던 것 역시 그것이 개막식 행사의 특성보다는 ‘보다 많은 유권자’ 앞에 자신을 드러내기 위한 정치적 결정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PIFan은 레드카펫 행사를 케이블채널로 중계하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는 영화제가 아니라 패션쇼를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레드카펫 진행자가 출품감독에 대한 기본적 정보나 관심도 없이, 레드카펫에 등장한 배우에게 오늘의 패션 포인트는 무엇인지를 묻는 것으로 일관하는 실황중계가 굳이 존재할 필요가 있을까?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옐로우 저널리즘에 의해 빚어진 것이 아니라 영화제 자체가 기획한 개막식 레드카펫 행사에서 ‘의도적으로’ 벌어졌다는 점이다.
대중의 관심을 이끌어내기 위해 스타를 동원하는 등의 전략을 세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벌써 열다섯 번째 행사를 넘긴 영화제라면 양적성장이나 가시적 효과에 매달릴 것이 아니라 주류영화와 다른 영화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고 그에 대한 수요를 창출하기 위해 고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물론 지자체의 지원이 절대적인 이상, 지자체가 요구하는 가시적, 양적 결과물이 중요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이해하고도 남는다. 하지만 영화제가 존재해야 하는 이유는 통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화에 대한 다양한 담론의 형성과 이를 통한 새로운 영화적 욕망을 발전시키는 데 있다. 그것이 성숙한 영화제가 지향해야 하는 태도다. 아쉽게도 PIFan은 나이만큼 충분히 성숙하지는 못한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