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2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꼭 100년 전 독일 표현주의 화가 에밀 놀데(Emil Nolde, 1867~1956)는 베를린(Berlin) 민속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던 한국의 장승을 보고 유화 한 점을 그렸다. 장승의 문화적 맥락은 파악할 길이 없었지만 이 목조(木彫)에 내재된 강렬한 무속의 에너지를 본능적으로 직감한 놀데는 아프리카 댄스 마스크와 장승의 머리를 나란히 배치했다. 여기서 아이를 업은 아프리카 여인은 위압적인 장승 마스크를 뒤집어 쓴 선교사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 그림의 제목 <선교사The Missionary>가 암시하듯이 선교라는 이름으로 타민족의 토속문화를 말살시키는 침략적 제국주의를 조롱하고 기독교의 자기중심적 포교활동을 풍자한 그림으로 읽힌다. 토속문화의 가면을 쓰고 토속문화를 지배하는 서구 식민주의의 교활함을 비판한 것이다.
익명성과 연극성을 동시에 연출하는 가면은 놀데를 비롯한 표현주의 화가들의 주요작품 소재였다. 강렬한 색채와 거친 형상, 디오니소스적 파토스(Pathos)와 비유럽적 원시주의를 표방하는데 낯선 이국의 가면만큼 맞춤한 연물(戀物)도 없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표현주의 화가들은 얼굴을 가면과 같은 형태로 그리기를 선호했다. 그렇다면 이들은 가면을 통해 무엇을 표출하고자 했는가? 그것은 모방과 재현의 원리를 신봉하는 사실주의 예술에 대한 반동이자 자본주의와 기계문명에 대한 도전이며, 고루한 시민계급에 대한 저항이자 세기말 종말론적 위기의식 속에서 자아의 해방을 부르짖는 절규와 다름이 없다. 예컨대 놀데의 <자화상Self-Portrait>은 표현주의 가면의 전형이다. 독행자(獨行者) 놀데의 얼굴에서 평균적인 인간의 정서를 찾기 힘들다. 세계에 대한 근원적 상실감과 이를 극복하려는 초인(超人)의 강력한 의지가 파란 눈빛 속에 격렬하게 채색되어 있다. 표현주의 회화의 대표그룹인 ‘다리파’의 창시자 카를 슈미트-로틀루프(Karl Schmidt-Rottluff, 1884~1976)의 조각 <청적색의 머리>는 뭉크(E. Munch, 1863~1944)의 <절규The Scream>(1893)와 같이 세기전환기 패닉에 빠진 인간의 공포를 시각화했다. 중앙에 못을 박은 고글안경 같은 커다란 두 눈, 고무호스처럼 길게 늘어진 코, 원형으로 벌어진 분화구 같은 입은 황금비율을 추구하는 고전주의 이상과 과격한 단절을 선언하는 표현주의 타이유 디렉트(taille directe)로 손색없다.

조인호의 첫 시집 『방독면』을 읽는 동안 위에서 언급한 세 작품이 맴돌았다. 붉은 장승의 가면에서는 “빨간 마스크”를 쓰고 “불발탄을 어깨에 짊어진 채 북으로 행군하는 한 사나이”「스스로 재래식무기가 된 사나이」의 사투가 생각났다면, 놀데의 자화상의 푸른 눈빛에서는 인류전멸 이후 생존한 최후의 인간이 극지에서 채굴한 “우라늄, 그 숭고한 돌”「우라늄의 시」이 어룽거렸고, 로틀루프의 그로테스크한 두상에서는 이 시집 도처에 출몰하는 ‘방독면’이 떠올랐다. 방독면은 조인호 시인이 무장한 문제의식 전체와 맞먹는 ‘이미지의 중량(重量)’을 함유한 오브제다. 이 시집에서 방독면의 이미지는 여섯 가지 차원으로 변주되면서 심화, 확장된다.
첫째, 방독면은 산소마스크다. 유사시 살포된 독가스를 정화하고 유독성 미립자를 걸러내어 생명을 보호하는 것이 방독면의 임무다. 시인은 기계문명의 부산물인 더러운 미진과 타락하고 부조리한 사회가 내뿜는 유해가스로 자욱한 세상과 독대하기 위해 방독면 뒤에 자신을 숨긴다. 방독면은 자폐적이면서 이기적이다. “훼훼훼 나만 홀로 자물쇠 같은 방독면 안에서 안전했네/방독면에 철컥, 잠긴 얼굴은 그 누구도 알아챌 수 없었네/그 어둠 안에서 벽으로 드나드는 남자 같은/공기를 나만 홀로 들이마셨네.”「괴뢰희(傀儡戱)」 바깥세상은 자멸로 치닫는 아수라장이지만 시인이 착용한 방독면 내부는 “신선한 핀란드산(産) 자작나무 숲속 바람 같은”「최종병기시인훈련소」 시원(始原)의 순결이 아슬아슬하게 유통된다. 요컨대 방독면은 시인의 자존을 옹위하는 게토(ghetto)다. 은폐 속의 낙원이고 오탁 속의 순수다.
둘째, 방독면 내부는 소우주다. “방독면 안, 그곳은 쥐색으로 물든/또 다른 우주”「괴뢰희」다. 방독면의 안경은 혼탁한 세계에서 좌표를 잃고 부유하는 시인을 환상적인 몽유의 세계로 안내하는 비상구다. 현실논리가 쾌락원칙에 의해 위태롭게 여과되는 필터이자 자아의 골방이 또 다른 세계의 광장으로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된 이상한 통로인 것이다. 여기 방독면을 쓰고 우주로 돌격하는 앙팡 테리블(enfant terrible)을 보라. “너희들은 어렸을 때부터/영웅들의 가면을 쓰고 놀았고/나만 홀로,/이상한 방독면을 쓰고 있었지/(…)//방독면을 뒤집어쓴 채 밤거리를 헤매는 몽유의 세계야, 나는 매일 밤 꿈속의 너희들로부터 끝없이 달아났고 내 앞엔 환한 비상구가 뚫려 있었고 언제나 나는 뛰던 자세 그대로 막 문을 통과하던 참이었네.”「괴뢰희」 요컨대 방독면은 현실의 한복판에서 현실의 경계를 넘는 ‘초현실’의 기제다.
셋째, 방독면은 외계인의 징표다. 로틀루프의 <청적색의 머리>처럼 우스꽝스러운 방독면을 뒤집어쓰면 인간은 외계인으로 변신한다. 어쩌면 시인은 모두 지구에 불시착한 미확인생물체일지 모른다. 지구인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물을 보고,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동세를 읽고, 사물의 배후에 잠복한 의미에 이름을 부여하는 우주가객(歌客)이 바로 시인이 아닌가. “너는 화성의 외계 생물체인지 모른다//불시착한 행성의 인간들 틈에 섞여 부유하며 살아간다 너는 사물의 편에 있다 특수부대의 스나이퍼처럼 사물과 한 몸이 된다.”「사물의 편」
넷째, 방독면은 미래주의 철가면이다. “철의 자궁”에서 태어난 시인의 부적이다. “내가 처음 태어나던 날, (…) 유아세례를 받듯이 방독면을 뒤집어썼고, 그 순간부터 어떤 누구도 내가 우는 모습을 볼 수 없었다.”「불가사리三」 서정적 자연미를 노래하는 나약한 포유류 같은 시인은 사절이다. 그에게는 철인(鐵人)은 곧 시인이다. 그가 강력한 철의 미학을 예찬하는 이유다. 시인은 단언한다. “나는 증기기관보다 아름다운 예술을 본 적이 없다.”「불가사리三」 이 프로파간다(propaganda)는 20세기 초 필리포 마리네티(Filippo Marinett, 1876~1944)의 <미래파 선언> 제4강령과 아주 흡사하다. “포탄 위에라도 올라탄 듯 으르렁거리며 질주하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케(Samothrake)의 승리의 여신상보다 아름답다.” 의식의 흐름이 강력한 증기기관처럼 기동하는 ‘철의 사나이’ 조인호 시인이 작성한 ‘최종병기시인의 긍지’ 목록 첫 번째 규율은 이렇다. “하나, 나는 찬란한 최종병기시인정신을 이어받은 무적시인이다.”「최종병기시인훈련소」 이와 연동해 마리네티의 미래파 제7강령을 보자. “싸움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 공격성이 없는 작품은 걸작이 될 수 없다. 시는 미지의 힘들을 인간 앞에 굴복하도록 만들기 위해 가해지는 폭력적 타격이다.” 이렇게 보면 조인호 시인은 전통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의 원리로 숭배한 20세기 초 이탈리아 미래파의 한국산(産) 변종이다. 요컨대 방독면은 옥쇄(玉碎)를 각오한 미래파 최정예 시인의 투혼을 상징한다. 방독면을 착용하고 파시스트적 가속도로 돌진하는 조인호 시의 운동에너지는 위험하지만 그런 만큼 매혹적이다.

다섯째, 방독면은 표현주의 가면이다. 시인은 철의 제국에서 태어나 철의 사나이로 제련된 개조인간이지만 동시에 철의 도시를 증오하며 결연히 맞서 싸우는 “태고의 동굴 속 원인(原人)”「형상기억합금」이다. “방독면을 쓴 채/터널 끝 형상기억합금과 조우하던 순간/거대한 기계 앞에/원인은 알몸으로 우뚝 서 있었다//기계가 달려들 때마다 그는 도구를 휘둘렀다 기계의 비명이 스파크처럼 파지직 튕겨나갔다.”「형상기억합금」 기계문명에 대한 광적인 부정이 녹색자연으로의 도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시인은 강철도시 한복판에서 문명을 내파(內波)하기 위한 게릴라 전략을 세운다. 문명과 대결하는 표현주의자들의 전형적인 해체전술이다. 오스트리아 표현주의 시인 알베르트 에렌슈타인(Albert Ehrenstein, 1886~1950)은 메트로폴리스 빈(Wien)을 향해 이렇게 절규한다. “도시를 파괴해 버려라!/내가 너희들에게 바라건대, 기계들을 부서 버려라./미친 듯이 뻗어있는 레일들을 깨뜨려 부숴버려라!/너희들이 있는 곳은 신성이 모독된 곳.”알베르트 에렌슈타인, 「빈」 표현주의 원시인의 가면을 대물림 받은 조인호 시인은 21세기 신자유주의 유령이 승승장구하는 도심 한복판에서 해머를 붙잡는다. 자본주의의 견고한 우상을 두들겨 부수기 위해 망치를 든 것이다.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선, 편의점, 나는 망치를, 들고, 음료수가 진열된, 냉장고, 앞으로, 달려간다. 망치로, 냉장고 유리를, 내리친다. 쨍, 울리는, 소리는, 얼음 가시처럼, 고막을 찌른다, 산산조각 난, 유리들, 나는 닥치는, 대로, 망치를 휘두른다.”「빙하기때려부수기」 요컨대 방독면은 반문명의 기치 아래 똘똘 뭉친 표현주의 육탄돌격대의 훈장이다.
여섯째, 방독면은 최후의 인간(시인)의 수호신이다. “방독면이 없는 사람들이 모두 죽은 후 우리만의 세계를 건축하자.”「불가사리二」 시인은 핵전쟁과 세균전으로 인류가 전멸한 후 살아남은 최후의 인간만이 신세계를 건설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 최후의 인간은 응당 시인이어야 한다고 공약한다. “핵폭발(Ω) 후/오로지 한 인간만이 살아남는다. 태양처럼 홀로 빛나는 존재, 그는 최후의 인간, 그는 최후의 시인, 그는 오메가 맨이다.”「최후의 인간」 오비디우스(Ovidius, B.C. 43~A.D. 17)의 불후의 시권(詩權) 선언문 이례 시인의 권리장전이 이보다도 강건하고 찬란한 적은 없다. 오비디우스는 『변신이야기Metamorphoses』를 마치며 책의 말미에 다음과 같은 후기를 붙인바 있다. “시인의 예감이 그르지 않다면 단언하거니와,/명성을 통해 불사(不死)를 얻은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시의 권리보장은 고사하고 시인의 생존권마저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오늘날, 조인호 시인의 이 무모하고 대담무쌍하며 배은망덕하고 이기적인 선언 앞에 속절없다. 어쨌든 그의 몸에는 한 세기 전 표현주의 돌격대의 열혈이 흐른다. 표현주의자들은 문명의 종말을 경고하면서 동시에 ‘신인간’의 출현을 예고했다. 표현주의는 인류전멸의 묵시록적 디스토피아와 신인류 탄생을 예언하는 메시아적 유토피아가 동침하는 불륜의 침대였던 것이다. 이 극과 극의 양보할 수 없는 팽팽한 긴장에서 조인호 시의 강렬함이 용솟음친다. 시인은 오늘도 “인간개조의 용광로 최종병기시인훈련소”에서 방독면을 뒤집어쓰고 거친 숨을 몰아쉬며 혹독한 신병훈련을 견딘다. 끝까지 살아남아 시의 영토를 수호하는 무적의 아방가르드 파천황(破天荒)으로 거듭나기 위해.
다시 1912년, 미래주의 운동의 기수 마리네티는 독일 표현주의 운동의 대부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 1776~1841)과 함께 무개차에 동승해 베를린의 대로를 누비며 <미래파 선언문> 전단을 환호하는 군중 앞에 뿌렸다. 그리고 외쳤다. “우리는 젊고 강인한 미래주의자들이다. 우리를 보라! 우리는 아직 지치지 않았다! 불, 증오, 그리고 속도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우리 심장은 아직 닳지 않았다! 우리는 별들을 향해 저항을 투척하리라!” 그로부터 꼭 한 세기가 지난 2011년, 대한민국의 어느 불 켜진 중환자실에서 임종을 지켜보는 한 시인은 비정한 세상을 향해 나지막이 포효한다. “이 참혹하고 그 어떤 동정심도 없는 세상 속에서 더 이상 시인이란 나에게 없었다. 그러므로 세상에 시란 존재하지 않는 어떤 불가능이다. 내가 존재하지 않는 시를 쓰는 것은 오직 강해지기 위해서였다.”「시인의 말」 소란스럽고 화려한 마리네티의 카퍼레이드보다 질풍노도의 혁명을 예비하는 적막의 순간이 더 무섭다. 신자유주의 시장의 물신(物神)을 교란하고 한반도 분단체제의 악령을 유린할 표현주의 돌격대 소속 미래주의 특전사는 이렇게 임관되었다. 이 사람을 보라(Ecce hom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