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고지전>에서 병사들은 농사꾼처럼 싸운다. 마치 들판에 일을 나가듯 전투에 나가 고지를 점령하고 하루 일을 마치고 집에 오듯 고지를 내주고 돌아온다. 그렇다고 거둘 것이 있는 것도 아니다. 있다면 적과 아군의 시체뿐. 그래도 병사들은 게으름피우지 않고 부지런히 나가서 싸운다.
영화의 이야기는 간단하다. 휴전협상이 교착상태에 빠진 2년 반 동안 뺏고 빼앗기고를 반복한 애록고지‘Aerok’은 Korea를 거꾸로 한 가상의 고지 이쪽과 저쪽의 이야기를 담는다. 그들은 누구이고 원래 어떤 인물들이었으며, 전쟁이 그들을 어떻게 바꾸었고 어떻게 죽어갔는지를 그린다.
영화는 줄곧 전장을 달린다. 심지어 그들의 상상력도 전장을 떠나지 않는다. 김수혁고수 분과 강은표신하균 분가 함께 포로가 되었다가 헤어진 의정부전투, 신일영이제훈 분과 사라진 소대원의 비밀이 담긴 포항전투 등 모두 전장이다. 전장을 벗어나는 순간은 차태경김옥빈 분의 사진 속 한 장면뿐이다.
<고지전>은 전쟁영화다. 단순히 전쟁을 다룰 뿐 아니라 그 전쟁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파생 전쟁을 다룬다. 내면의 전쟁과 외면의 전쟁, 보이는 전쟁과 보이지 않는 전쟁, 나의 전쟁과 너의 전쟁, 아군끼리의 전쟁과 적군끼리의 전쟁, 수많은 전쟁이 펼쳐지는 전쟁의 각축장이다.
그 수많은 전쟁은 영화에서 재해석된다. 김수혁은 전쟁은 적이랑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이랑 싸우는 것이라고 했다. 전쟁초기 김수혁을 포로로 잡았던 인민군 장교 현정윤류승룡 분은 “니들이 와 판판이 지는 줄 아나? 왜 싸우는지를 모르기 때문이지”라고 조롱했지만 역설적으로 현정윤은 잊고 김수혁은 찾는다.
흔히 말하는 자기 자신과의 싸움은 전쟁에서는 사치다. 신일영 대위는 매일 모르핀 주사를 맞는다. 육체를 마비시키면서 자신의 감성까지 마취시킨다. 리더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그는 자기 자신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마비시킨다. 그것이 중대원 중 가장 어린 축인 그가 중대원을 무리 없이 이끌 수 있는 비결이다.
영화는 전쟁의 이면을 다룬다. 아니 겉껍데기를 벗기고 속살을 내보인다. 그 속살은 추악하다. 전쟁영웅으로 이등병에서 대위까지 진급한 신일영은 어느 모로 보나 전쟁영웅이다. 그러나 그는 아군에 치명적인 해악을 가한 전범, 그중에서도 A급 전범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병사들은 그의 ‘죄’ 때문에 그를 더욱 믿고 따른다.
김수혁 역시 마찬가지다. 그에게 군형법을 적용한다면 ‘상관살해’, ‘간첩죄’, ‘명령불복종’ 등 적용할 수 있는 항목이 너무나 많다. 그러나 그는 신일영과 마찬가지로 전쟁영웅이다. 자신의 죄를 묻는 강은표에게 그는 뇌까른다. “나 대신 네가 이들을 살려낼 수 있으면 나를 쏴라”라고.
병사 중 누구도 이들을 욕하지 않는다. 그들의 ‘악’이 자신을 살리는 ‘선’을 행했기 때문이다. 관객도 마찬가지로 동화된다. 김수혁의 말처럼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적이 아니라 전쟁과 싸웠기 때문이다. 사람이 살아남을 수 없는 전장의 현실이 그들에게 면죄부를 준다. 그들이 행한 모든 악은 전쟁에 대한 ‘무조건반사’였을 뿐이다.
전쟁이란 경계가 흐려지는 것이다. 어디까지가 전장이고 어디서부터 아닌지, 누가 아군이고 누가 적인지, 모든 경계가 흐려진다. ‘고지점령’이라는, 가장 의미 있는 일로 받아들여지는 일조차    당사자인 병사들에게는 가장 무의미한 일로 받아들여진다. 그 흐려진 경계선상에서 소통의 물꼬가 트인다.
그러나 그 소통은 결코 화합으로 승화되지 못한다. 전장에서 핀 우정과 사랑에 남과 북의 병사들은 서로 총칼로 화답한다. 상황에 몰리면 전장에서 되돌려줄 수 있는 것은 총알과 칼날뿐이다. <고지전>이 남기는 가장 깊은 메아리는 바로 이 지점에서 나온다. 어렵게 나눈 공감과 교감도 전쟁이라는 가혹한 상황의 무게를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고지전>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남북분단 상황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과 싸우는 것도, 자기와 싸우는 것도 아니라 인생과 싸우는 것이다. 인생의 무의미와 싸우는 것이다. 사람들이 의미를 부여하든 말든 그 무의미와 싸우기 위해 농사를 짓듯 전투를 치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