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이팝이 촉발한 최초의 거리시위
2009년 9월 26일 싱가포르의 번화가인 오차드 로드(Orchard Road)에서는 싱가포르 역사상 최초의 거리시위가 있었다. 싱가포르는 1965년 건국 이래 두 명 이상이 모인 그 어떤 정치적인 집회도 공공장소에서 법적으로 허용된 적이 없는 곳이며, 여전히 이러한 행위는 위법으로 간주된다. 제이워크(Jay-Walk)라고 명명된 이날의 시위는 바로 한국의 아이돌 그룹 ‘2PM’의 멤버였던 박재범의 탈퇴를 반대하고 그를 지지하기 위한 시위였다. 주축이 됐던 싱가포르의 2PM 팬들은 자발적으로 경찰에 이를 신고하고 허가를 받은 후 거리시위를 벌이려 했으나 싱가포르 경찰은 이것을 비정치적인 모임이라 여겼고(혹은 매우 허무맹랑하게 받아들여졌기에) 허가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한 채 그냥 내버려두었다. 법률적으로 혹은 공식적으로는 인정받지 못했으나 명백히 싱가포르 최초의 거리시위가 된 이 제이워크가 한국의 아이돌 그룹 때문에 벌어졌으며, 더구나 그 주체가 싱가포르 십대 여학생들이라는 것은 싱가포르 내 한류 그 중에서도 한국의 아이돌 그룹이 주축이 된 케이팝(K-pop)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한국, 한국인과의 새로운 조우
한국인들에게 싱가포르가 지정학적으로 위치 짓기 어려울 만큼 잘 알려지지 않은 것처럼 싱가포르에서도 한국에 대해서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었다. 다만 제한적으로 혹은 간접적으로 회자되어온 이미지는 거칠고 남성적인 이미지였다. 싱가포르의 초대수상인 리콴유(李光耀)는 그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처음 접했던 한국인은 일본 식민지배자들과 동행했던 일본군복을 입은 한국인들이라고 밝혔으며, 일반 싱가포르인들에게는 1970년대와 1980년대 초반까지도 건설노동자나 엔지니어로 왔던 노동자로서의 한국인에 대한 인상이 전부였다. 이후 1980년대에는 미디어를 통해 한국 대학생들의 시위모습과 남북한의 군사적 대치상황을 주로 접하게 되었고 이러한 일련의 이미지는 거칠고 남성적인 이미지를 심어주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는 2000년대부터 싱가포르로 유입된 한국 드라마는 <겨울연가>나 <가을동화>처럼 감성적이고 배려 깊은 부드러운 남성성을 강조했으며, 심지어 매우 여성적이기까지 한 남성 아이돌 그룹과 과도한 여성성을 강조한 여성 아이돌 그룹의 이미지는 그간 한국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를 급격하게 변모시켰다. 이러한 급격한 이미지의 변화와 더불어 한국이 싱가포르인들에게 매력적인 소구의 대상이 된 데는 국제적 위상의 상승이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아직도 정치적으로 매우 불안정하다고 여겨지는 동남아시아 주변 국가들에 비해 스스로 매우 높은 글로벌 스탠더드(Global Standard)를 갖고 있다는 자부심을 지닌 싱가포르인들에게 한국은 일본과 더불어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국가로서 매력을 느끼게 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가령 한 인식조사에서 싱가포르는 정치적, 지정학적으로 아세안(ASEAN)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에 속해있지만 인구의 75%가 넘는 다수의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은 스스로를 동아시아인으로 정체화하려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났다. 따라서 이들이 일본이나 한국의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방식은 스스로를 문화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좀 더 동아시아적 정체성에 다가갈 수 있게 하기 위해 활용하는 매개체로 볼 수 있다.

싱가포르인들이 한류를 소비하는 방식
싱가포르인들이 처음으로 한국의 대중문화에 관심을 갖게 된 초기작품들은 일본, 타이완, 중국 등 다른 아시아 국가와 마찬가지로 <대장금>이나 <겨울연가>와 같은 드라마들이었으며, 최근에는 <꽃보다 남자>와 같은 드라마와 더불어 아이돌 그룹들이 주축이 된 케이팝의 인기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와 같은 문화상품의 궤적과 맞물려 그 소비주체도 초기 드라마의 주시청자인 주부에서 최근에는 케이팝의 인기에 따라 십대 학생들로까지 그 범위가 확대되었다. 또한 한류는 곧 관광상품으로 이어져 드라마에 소개되었던 제주도와 강원도는 물론 서울 중심의 관광상품이 싱가포르의 중산층이라면 한번쯤은 다녀와야 할 여행상품으로까지 등장했다. 그러나 영어소통이 가능한 영미권이나 유럽으로의 여행이 개인단위에서 이루어지는 반면 언어소통의 어려움이 큰 한국관광은 단체관광이 거의 9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한다. 물론 한국어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여 최근 5년 사이 대학이나 사설학원에서 한국어 강좌가 개설되고 있지만 이는 원어에 대한 이해를 통해 좀 더 적극적인 문화소비에 기여하는 방식에만 머물고 있을 뿐 한국어 자체의 위상이 크게 달라졌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러한 면에서 볼 때 싱가포르인들이 한류를 소비하는 방식은 타이완이나 중국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이것은 한국의 문화콘텐츠를 소비하고 있는 싱가포르의 유통경로와 매체가 타이완과 홍콩(香港)을 통해 주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싱가포르의 한류에 대해 분석했던 대중문화연구가인 켈리 후(Kelly Fu)와 류 카이 쿤(Liew Kai Khiun)은 이러한 구조에 대해 싱가포르의 한류가 중국화(Sinicization)에 기대고 있다고 지적했다. 싱가포르의 인구는 크게 중국계, 말레이시아계, 인도계로 나뉘는데 앞서 언급했듯 중국계가 사회적 다수를 구성하고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세 에스닉 그룹(ethnic group) 간의 사회적 균형을 위해 중립적 언어로서 영어의 사용이 매우 중시되었으나 점점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이 커지면서 표준 중국어인 만다린(Mandarin)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사회적 캠페인이 일기 시작했고 이 와중에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이 쓰는 중국어는 비표준 중국어로서 저평가되기 시작했다.

중국화된 한류
특히 싱가포르에서 케이블 채널을 제외한 기본채널은 영어가 표준어로 쓰이기는 하나 각각의 에스닉 그룹을 위해 중국어, 말레이시아어, 인도어로 된 프로그램만을 송출하는 채널이 있으며, 이 중 중국어 채널은 일찍부터 자국의 프로그램보다는 홍콩과 타이완의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홍콩과 타이완에서 먼저 인기를 얻게 된 한국 드라마나 영화가 중국어로 더빙되거나 자막을 달고 싱가포르에 방송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때 한국 드라마나 영화는 싱가포르인들이 쓰는 지방어가 아닌 표준 중국어로 더빙되고 중국어 자막이 붙는 형식이다. 따라서 싱가포르에서의 한국 문화상품들은 초기부터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 의해 주로 소비되기 시작했으며, 이것은 역으로 다른 에스닉 그룹의 접근에 대한 장벽으로 작용했다. 그러나 모든 작품들이 중국어로만 번역되는 것은 아니다. 가령 한국판 <꽃보다 남자>처럼 영어소통이 더 용이한 십대들이 주로 보는 트렌디 드라마의 경우 영어자막이 더 우선시된다.

그러므로 한류의 중국화란 마치 한국의 문화콘텐츠가 중국의 문화상품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마치 한국에서 1980년대 대부분의 만화영화들이 일본 제작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원류가 지워지고 막연히 서구의 작품으로 인식되는 방식) 그 자체는 한국의 것으로 인식되고 소비됨에도 불구하고 그 유통경로의 특수성과 영어/중국어 중심의 번역 시스템으로 인해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게 더 용이한 접근성을 제공하는 동시에 비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게는 장벽으로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최근 들어 이러한 장벽효과는 거의 사라졌거나 미미하다고 여겨진다. 이 분석이 6년 전인 2005년에 이루어졌고 이후 한류는 최근 국내에도 많이 알려졌듯 중국어권인 홍콩, 타이완 및 중국대륙을 넘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등 대부분의 동남아시아 국가들에서도 보편적으로 인기를 얻고 있다. 물론 아직도 싱가포르의 공영채널에서는 한국 드라마가 영어와 중국어 위주로 서비스 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적극적인 관심을 갖고 한류의 소비자가 된 비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게는 이미 인터넷, 케이블 채널, DVD와 같은 대안적인 선택지가 많이 존재하므로 초기에 지적되었던 장벽은 거의 사라진 셈이다. 한편 동남아시아의 지정학적 조건에서 보았을 때 더 많은 공연장과 풍부한 문화적 인프라를 가진 싱가포르는 한국스타들의 쇼케이스, 팬미팅, 콘서트 등의 주요장소로 활용되며 주변 동남아시아 국가의 팬들에게는 한류의 중간거점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한류는 다양한 대중문화의 한 조류일 뿐
한류의 인기가 갑작스럽게 회자되면서 동남아시아와 유럽에서의 한류가 제2의 한류붐으로 인식되고 있긴 하나 한류는 이들의 일상을 지배하는 독점적 문화상품이 아니라 그간 꾸준히 소비되어 온 영미권의 대중문화는 물론 강한 개성으로 항상 차별적인 정체성 형성의 좋은 기제가 되어 온 일본 대중문화와 끊임없이 경합해야할 다양한 대중문화의 한 조류로 봐야할 것이다. 특히 싱가포르는 영어가 공식 언어로서 자국의 대중문화산업은 아직도 그 규모가 작고 이렇다할만한 문화콘텐츠 역시 미비한 반면,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항상 영미권의 대중문화가 곧바로 수입되어 꾸준히 소비되어 왔다. 특히나 어렸을 때부터 영어가 제1언어였던 1980년대 이후 출생한 젊은 세대들은 더빙이나 자막 등의 아무런 여과장치 없이 곧바로 영미권의 음악, 드라마, 영화를 소비해왔고 이들에게 중요한 매체 역시 자국의 매체보다는 야후(Yahoo)나 유튜브(Youtube) 등 실시간 소비를 도와주는 인터넷에 치중되어 있다. 또한 인도계나 말레이시아계 싱가포르인들은 영미권은 물론 각자의 문화적 자원이 풍부한 인도, 말레이시아의 대중문화와도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싱가포르에서의 한류는 영미권의 대중문화는 물론 인도, 말레이시아, 그리고 중국계 싱가포르인들에게 여전히 중요한 일본, 타이완, 홍콩의 대중문화와 끊임없이 경합, 공존하며 소비되는 대중문화의 한 조류로서 존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