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12번째 장편영화인 <북촌방향>은 줄거리로는 도무지 그 세계의 형상이 그려지지 않는 작품이다. 영화가 흘러가는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이렇다. 지방에 사는 감독 성준유준상 분이 서울의 북촌에 도착해서 선배 영호김상중 분를 만나려고 기다리던 중, 고덕동에 사는 옛 애인 경진김보경 분의 집을 찾아가 그녀와 재회하고 다시 이별한다. 북촌에 돌아와 영호를 만난 그는 영호의 후배 보람송선미 분을 알게 되고, 셋은 술집 소설에 간다. 성준은 술집 사장이라는 예전김보경 분이 경진과 똑같이 생긴 걸 보고 당황한다. 영호의 집에서 시간을 보내던 성준은 자신의 첫 영화에 배우로 출연했던 중원김의석 분, 그리고 보람과 다시 소설을 찾는다. 그곳에서 예전을 만나고 눈 내리는 밤, 그녀와 키스를 하고 사람들은 눈 오는 새벽 헤어진다. 또 북촌 거리를 걷다가 성준은 보람, 영호와 소설에 가게 되고, 성준은 예전을 따라 나가 키스를 하고 사람들을 보낸 후, 소설로 돌아와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리고 그녀에게 이별을 고한다.

 
소설을 중심으로 거의 유사한 상황이 세 번 반복되고 있는데, 필자는 그 사이 사이에 ‘다음날’, 혹은 ‘이튿날’ 같은 말을 쓰지 않았다. 영화는 <옥희의 영화>(2010)나 <오! 수정>(2000)에처럼 소제목으로 나뉘지도 않고, 성준은 줄곧 “소설이라는 데를 갔다”며, 마치 매번 처음 가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니까 이 세계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현실적 시간의 층위에 있지 않고, 분명 뭔가 다른 시간을 산 것 같은데, 결국 같은 자리로 돌아온 자신을 발견하게 만드는 그런 이상한 시간의 활동으로 지탱된다. <하하하>(2009)가 정지된 흑백사진의 현재와 움직이는 컬러의 과거로 교차되며 과연 어느 쪽이 시간의 축일까 끝내 고민하게 만들었고, <옥희의 영화>가 같은 배우가 각 장에서 동일한 인물인지, 다른 인물인지를 생각하게 했다면, <북촌방향>은 어쩌면 그 두 영화가 우리에게 던진 궁지를 모두 함축하며 유희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의 축, 그 중심은 사라져버리고 그렇기 때문에 인물들은 직선적인 시간적 층위에 존재하지 않게 되고, 그들에게는 누적된 시간에 의한 관계가 성립할 수 없게 된다. 이를테면 예전이 과거의 경진인지 아닌지 우리는 알 수 없으며, 성준과 예전이 소설에서 세 번 만나는 동안 서로를 알아보고 기억하는지, 아니면 정말 매번 처음 만나는 것인지도 알기 어렵다. 북촌의 비밀은 그런 정황에 근거한 사실 관계들에 숨겨져 있지 않다.
 

<북촌방향>에서 작동하는 시간은 오직 영화적인 시간이며, 그것은 현실적 시간의 층위와 그에 따른 가치의 위계들을 모두 덩어리로 만들고 거기서 다른 무언가의 고유한 활동의 과정을 발견하는 것이다. 거기 언제나 있었으나 틀과 상투의 막 때문에 우리가 그 자체로 투명하게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의 운동. 한 장면에 대해 말하고 싶다. 눈 내리는 새벽녘 술집에서 나온 예전, 성준, 보람, 영호, 중원이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택시를 잡고 있다. 영화는 이 순간을 한 프레임 안에서 잡는데, 새벽의 공기와 눈, 아직 가시지 않은 알코올의 기운, 그리고 미세하게 서로 다른 다섯 명의 몸의 리듬, 이 모든 것들이 서로가 서로에게 반응하며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알려졌듯 <북촌방향>의 예고편은 이 장면의 사운드와 음악은 그대로 둔 채, 시간을 거꾸로 돌리고 흑백을 벗겨낸 것이다. 인물들이 뒷걸음질하고 눈이 하늘로 올라가며 흩어지고 택시가 후진을 해도 이 예고편은 영화 속 그 장면만큼이나 신비롭다. 
 

그러니까 <북촌방향>은 시간의 영화이지만, 시간의 구조로 우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영화이기보다는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 속에서 현실적 시간의 질서가 흩뜨려지고 시간의 축이 거둬진 다음에야 드러나고야 마는 어떤 이행들, 작은 변화들, 세계의 리듬들, 자연의 활동, 우연의 신비를 경험하게 하는 영화다. 그 경험은 생경하고 이상하게도 슬프고 감동적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북촌의 시간을 유령처럼 맴돌고 또 맴도는 성준의 여정이 무섭고 두려워도, 이미 그 여정의 마법에 걸린 자들이 되어 쉽게 북촌을 나서지 못한다.

이미지 제공_ 조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