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신히 하루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일에 쫓겨 식사 시간을 넘긴 지 오래이지만 공교롭게 냉장고에는 남은 반찬이 아무것도 없는 날. 그렇다고 재료 손질부터 음식 장만을 하기에는 의지도 에너지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 음식점에 들르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었고 게다가 어느덧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국물 생각이 나는 저녁. 그럴 때면 나도 모르게 편의점으로 발길을 돌려 손에 들고 나오게 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컵라면. 물을 끓여 붓고 3분만 기다리면 몸도 마음도 따뜻하게 해주는 국물과 적당량의 요기할 거리를 제공해주는 마법의 컵. 뜨거운 김을 호호 불며 순식간에 한 컵을 비우고 나니 문득 궁금해진다. 단 3분의 기다림으로 나를 보듬어준 컵라면, 과연 누가 언제 어떻게 만든 것일까?

즐거움이 담긴 음식의 간편한 소비 - 
컵라면의 역사
 

일본에서 컵라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71년이었다. 일본의 라면, 특히 인스턴트 라면의 선구자로 불리는 닛신(日淸)식품의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 1910~2007) 회장이 수차례의 시도 끝에 발명에 성공한 결과였다. 훗날 닛신식품의 사장이 되는 안도 모모후쿠는 일본식민지 시기의 타이완에서 태어난 청년이었다. 이후 일본의 관서지방을 중심으로 섬유, 군수, 염전 사업 등을 전전했던 그는 전후 일본이 겪어야 했던 극심한 가난 속에서 인스턴트 라면이라는 사업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패전 후 극심한 식량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던 일본을 부족하나마 구제했던 것은 미국으로부터 받은 원조 물품, 그리고 빵과 면의 보급을 가져온 밀가루 원조였다. 특히 상설 시장 등에서는 저렴한 가격에 따뜻한 국물로 배를 채울 수 있는 라면 가게가 성행하여 일본인의 가난한 배와 마음을 채워주고 있었다. 안도 모모후쿠 회장은 이러한 라면의 인기를 보고 따뜻한 물이 있으면 집에서도 간편하게 먹을 수 있는 라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생각에 다양한 시도를 거듭하였고, 마침내 세계 최초 인스턴트 라면인 ‘치킨 라면’을 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후 안도 모모후쿠 회장은 닛신식품을 정식으로 설립하고 인스턴트 라면 사업으로 나날이 성장을 거듭해갔다. 컵라면의 발명을 향한 시도는 치킨 라면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우연한 계기로 시작되었다. 치킨 라면의 수출을 위해 미국에 방문하여 상대 회사 간부에게 시식을 권유하던 중, 미국 회사 측이 일본에서 사용하는 대접 대신에 머그컵에 라면을 부수어 담아 먹는 것을 보고, 언제 어디서든 뜨거운 물만 있으면 따로 용기를 준비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컵라면을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를 얻었던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용기 개발에서부터 라면을 용기에 흐트러지지 않게 넣는 법 등 다양한 기술 개발을 거듭하여 1971년 마침내 컵라면을 세상에 내어놓게 되었다.
 

컵라면이 세상에 나온 1970년대 초반의 일본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잿더미’에서 ‘부흥’, ‘소득 배증’의 시대를 필사적으로 달려온 후 오사카만국박람회(1970)를 성공적으로 완수하고 이른바 고도경제성장시대 성숙기의 문턱을 넘으며 간신히 한숨을 돌리기 시작한 시기였다. 당시에 유행했던 ‘모레츠까라 뷰티푸르에(モ?レツからビュ?ティフルへ)’맹렬(猛烈)함에서 아름다움으로(beautiful)라는 광고 카피처럼, 삶과 시대의 가치가 급속히 소비와 문화를 중심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던 때이다. 특히 식생활 면에서는 컵라면과 햄버거1)로 상징되는, 즉 간편하고 값이 싸고 무엇보다도 새롭고 즐거운 기분이 담겨있는 현대적인 음식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이는 동시에 이제까지의 식생활에 담긴 의미를 좀 더 가벼운 놀이의 방식으로 전환하고, 나아가서는 젊은 여성들의 가사로부터의 제한적 해방까지도 의미하는 것이었다.

컵라면을 경험하세요 - 컵라면박물관
 

2011년 9월, 요코하마의 국제센터 옆에 모던한 디자인의 새로운 건물이 등장하였다. 닛신식품의 창립 회장 안도 모모후쿠를 기리는 동시에 그가 발명한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의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컵라면박물관이 바로 그곳이다. 컵라면박물관은 총 5층 건물로 건물 면적이 약 4,000평방미터, 각 층의 실 면적을 합하면 약 1만 평방미터에 이르는 규모를 자랑한다. 탁 트인 1층의 로비에서 표를 사 들고 올라가면 나타나는 2층의 전시장에 이르면, 안도 모모후쿠와 인스턴트 라면, 그리고 컵라면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첫 번째 전시장은 2011년 현재까지 닛신식품에서 생산해온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이 실물로 전시되어 있다. 전시실의 네 면을 빼곡히 메운 인스턴트/컵라면들을 둘러보며 너무도 당연한 생활의 일부가 되어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의 역사를 새삼 실감하며 이동하면 나타나는 것이 미니 극장이다. 이곳에서는 안도 모모후쿠의 일생과 라면에 대한 열정, 현재에 이르기까지의 노력과 아이디어,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의 제작 공정과 원리 등을 재미난 애니메이션을 통해 가볍고 쉽게 접할 수 있다. 미니 극장을 나서면 안도 모모후쿠가 오사카에서 처음 인스턴트 라면을 발명했던 집과 그의 역사가 보다 자세하게 펼쳐진다. 벽면 가득 전시되어 있는 그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읽어 내려가는 어른들과 곳곳의 전시물을 직접 만지고 움직이면서 그의 일생을 경험해보는 아이들이 빼곡했던 전시장은 안도 모모후쿠의 아이디어만큼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3층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을 직접 만들면서 경험할 수 있는 두 곳의 체험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 치킨라면 팩토리에서는 안도 모모후쿠가 세계 최초로 만들어낸 인스턴트 라면을 직접 만들어보는 경험을, 컵라면 팩토리에서는 닛신식품의 대표 컵라면 ‘컵 누들’의 패키지를 직접 디자인하고 컵라면의 내용물을 자신의 기호에 맞게 선택함으로써 말 그대로 ‘나만의 컵라면’을 만드는 경험을 해볼 수 있다. 내가 방문했던 날은 태풍의 북상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말 그대로 나들이하기에 적절하지 않은 평일 오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곳 컵라면박물관, 특히 3층의 체험 코너에는 나만의 컵라면을 만들어보고자 하는 사람들로 그야말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사전 예약이 필수인 치킨라면 팩토리는 이미 보름 후까지 예약이 가득 차 있었던 것 또한, 이곳이 일본인들에게 새롭게 사랑 받는 장소가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게 했다.
 

박물관과 재단 사무실이 자리하고 있는 5층을 제외하면, 일반인이 즐길 수 있는 곳은 4층의 월드면 로드와 컵라면 파크까지이다. 컵라면 파크는 미끄럼틀 등의 거대 놀이기구를 인스턴트 라면 제작이라는 테마를 중심으로 꾸며놓은 공간이다. 컵라면 파크가 아이들이 보다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도록 고안된 박물관 안의 작은 테마파크라면 월드면 로드는 세계의 면 요리를 마음껏 맛 볼 수 있는 또 다른 테마파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어느 해변가의 음식 시장에라도 와있는 기분이 들게 하는 월드면 로드에서는 이탈리아, 카자흐스탄, 중국, 한국, 베트남, 타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의 대표적인 면 요리를 맛볼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의 컵라면은?
 

1층의 관련 상품 숍까지 구석구석 둘러보고 나오는 것으로 안도 모모후쿠와 인스턴트 라면, 그리고 컵라면의 이야기는 끝을 맺었다. 인스턴트 라면과 컵라면의 발명을 위해 안도 모모후쿠가 쏟아 부었던 에너지와 창의성은 그 고갈되지 않음의 측면에서만이라도 과연 감탄할 만했다. 게다가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고 간단하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컵라면의 존재가 가지는 의미는 발명된 후 4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하다. 하지만 박물관을 나서면서 오히려 궁금해지는 것은 사실, 이제부터의 컵라면이었다. 더 이상 신속과 간편함이 예전만큼의 가치를 가질 수 없는 이제, 속도보다는 방향을, 경쟁보다는 공존을, 이동보다는 머무름을 다시 생각해야 하는 지금의 시기에, 컵라면은 다시 어떠한 모습으로 변해야 가야 할까. 컵라면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게 또한 동일한 질문이 향하는 것을 되새기며 컵라면박물관을 나섰다.

이미지 제공_ 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