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뉴스를 뒤적거리다 보면, 이북(e-book)이라고 불리는 전자책에 관련된 기사를 많이 접하게 된다. 전자책이란 기존의 인쇄매체와는 달리 인터넷으로 서적을 구입한 후 개인 컴퓨터나 휴대폰과 같은 전자기기를 통하여 읽을 수 있는, 그야말로 정보화 시대의 산물이다. 이러한 전자책은 접근성이 편리하고 인쇄비용이 들지 않는다는 장점으로 인해, 기존의 인쇄매체를 대체할 차세대 출판 시장으로써 많은 주목을 받고 있으며, 그 수요 역시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가깝지만 먼 이웃나라인 일본에서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지하철을 타거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고 있자면, 개인 컴퓨터나 아이패드와 같은 최신기기를 동원하여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리 드문 광경이 아니다. 지하철 안에서 신문을 손 뼘 크기만큼 접어서 읽고 있거나, 서서든 앉아서든 책을 들고 독서를 즐기고 있는 일본인의 모습을 상상하고 있던 외국인 관광객들에게는 편견이 단숨에 사라지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도 불구하고, 세계 제2위의 시장규모를 자랑하는 출판대국 일본에서는, 아직도 많은 이들이 책이나 신문과 같은 기존의 인쇄매체를 선호하고 있으며, 이를 통하여 지식과 정보를 얻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기존의 많은 매체들이 도태되어 서서히 전자화되어가고 있음에도, 일본사회가 여전히 기존의 인쇄매체에 대하여 애착이 각별함을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이를 확인하기 위하여, 인쇄매체에 대한 일본인의 애착과 문화적 저력의 근원지인 도쿄(東京) 칸다(神田) 고서점가에 위치한 도쿄고서회관(東京古書會館)의 한 즉매회(卽賣會)를 찾아가 보았다.

붉은 빛으로 묽든 단풍잎이 두드러지는 도쿄의 한 가을날 오후, 칸다 진보쵸(神保町) 고서점가가 위치한 오차노미즈(お茶の水)역에서 하차하였다. 오차노미즈역을 나와 조금 길을 걷다보면, 야스쿠니 거리와 하쿠산 거리가 교차하는 진보초 사거리를 중심으로 세계적인 고서점가로 알려진 칸다 고서점가 일대가 펼쳐진다. 칸다는 도쿄 중심부 치요다(千代田)구 북동부에 위치한 고서점가를 일컬으며, 스이도바시(水道橋)와 오차노미즈 등에 넓게 분포하고 있는 까닭에, 통틀어 ‘칸다 고서점가’ 혹은 ‘칸다 진보초 고서점가’라고 불리고 있다. 이 일대에는 약 180여 개의 고서점이 이 지역에 밀집되어 있으며, 신간 서점을 도합하면 대략 200여 개의 서점이 자리 잡고 있는, 그야말로 ‘책의 숲’이다.

칸다 고서점가의 역사는 약 130여 년 전의 메이지 시대(明治時代, 1868.10.23~ 1912.7.30)메이지 유신 이후 메이지 천황의 통치 시대를 가리킴로 거슬러 올라간다. 메이지 10년대(1880년대) 당시, 도쿄대학교를 필두로 메이지법률학교현 메이지대학교, 일본법률학교현 니혼대학교, 센슈(專修)학교현 센슈대학교 등이 이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일본 최대의 대학촌이 형성되었다. 그 후로 자연스레 서점이 하나둘씩 생기기 시작하였고, 특히 가난한 학생들을 위하여 전공서적이나 고서를 취급하던 고서점이 늘어나면서 오늘날 세계 최대 규모의 고서점가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한 때는 일본 출판업계의 절반가량이 칸다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고, 일본 전체 고서의 약 3분의 2가량이 이 지역으로 모여 있었다고 하니, 이 지역이 지닌 역사적·문화적 가치는 실히 대단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칸다 고서점가의 문화적 가치를 잘 보여주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하여 도쿄 일대가 거의 초토화되었을 때 진보초 지역은 폭격을 면할 수 있었는데, 이는 서양인 최초의 일본학자로 알려진 당시 하버드대학교 교수 세르게이 엘리세프(Sergei Eliseev, 1889~1975)가 맥아더(Douglas MacArthur, 1880~1964) 장군에게 칸다 진보초 지역에는 폭격을 하지 말 것을 청원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는 폭격으로 인한 일본의 막대한 문화적 손실에 대한 염려임과 동시에 진보초 일대에 보전되어 온 동양 학문의 보고의 문화적 가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칸다 고서점가가 펼쳐지는 진보초 사거리에 다다르게 되면, 독립된 고서점 건물들이 병렬적으로 나열되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띄엄띄엄 포진되어 있는 서점들도 눈에 들어온다. 밖에서 보이는 고서점의 외향은 가시각색으로, 최근에 지어진 듯한 현대식 건물들이 즐비한 반면, 몇 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누렇고 낡은 간판의 고서점도 인상적이다. 칸다 고서점가에서 풍경을 감상하고 있자면, 대부분의 고서점이 한 쪽 방면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목격할 수 있는데, 이는 햇빛으로 인해 책이 누런빛으로 손상되는 것을 보호하고자 애초부터 북향으로 설계하였다고 한다.

 
180여 개의 고서점이 소장하고 있는 수많은 고서들은 겉으로는 무질서 해 보일지언정, 실은 내부적으로 철저한 질서를 바탕으로 정리되어 있다. 칸다 고서점가는 문학, 철학, 사회과학, 연극, 자연과학, 예술, 양서 등 거의 모든 분야의 서적을 망라하고 있으며, 서점마다 취급하는 전문분야에 따라 상세하게 나뉘어져 있다. 또한, 진귀한 고서 혹은 절판 도서가 곳곳에 보물처럼 숨어있는 까닭에 축제나 즉매회가 열릴 때면 아침부터 전국에서 모인 애서가, 장서가들로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이러한 칸다 일대의 고서점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 각 점주들이 학자에 버금가는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수년간 고서점을 운영해 온 그들은 그 누구보다도 고서적에 무한한 애정을 쏟아온 애서가이자, 오랜 기간의 종사로 인해 학자 못지않은 지식과 열정을 지닌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오후 세시 경에 도착한 도쿄고서회관은 고서를 취급하는 장소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세련된 현대식 건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도쿄고서회관은 도쿄고서조합의 사무실이 위치한 곳으로 지하 1층에 일반인들도 참가 가능한 즉매회를 정기적으로 개최해 오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즉매회에 전시된 고서들을 열람하기 전에 개인 소지품과 가방을 전부 카운터에 맡겨야 했는데, 도난 방지용이라기보다는 방문자들로 하여금 편하게 구경하고 열람하도록 하는 일본인들의 배려라는 느낌이 강하였다. 기회가 닿아 관계자와 담소를 나누어 보니, 거의 매주 주말에 열리는 즉매회마다 13~14개의 고서점이 한 팀을 이루어 번갈아 가며 참가하고 있으며, 평균 방문자수는 통계를 매기고 있지 않는 관계로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한다.
회장 내에 한 발을 들이니, 시대를 거슬러 올라간 듯한 고서 특유의 냄새가 방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장소를 가득 메우고 있던 헌 책들 속에서 세월의 잔상이 느껴진다. 그 와중에도 약 50명 남짓한 사람들이 각각 관심 분야의 서적을 손에 얹힌 채 책에 몰두하고 있는 모습이 눈길을 끈다. 대부분 중년 남성이 주를 이루었고, 중국어로 대화하는 사람들이나 옛 신문을 뒤적거리고 있는 파란 눈의 서양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는 등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세계 각국의 애서가들이 오로지 고서에 대한 애정 하나로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쭈그려 앉아 책을 보는 사람들, 장시간 서 있었는지 허리를 두드려가며 보물을 찾듯 엽서를 뒤지는 사람들, 돋보기로 글씨 하나하나를 확인해가며 담론하는 사람들. 마치 시공을 초월하여 옛 시대에 대한 감상에 흠뻑 젖어 있는 듯 해 보였다.

즉매회장에서 수많은 고서를 구경하고 있다 보면, 한 가지 확연하게 눈에 띄는 점이 있다. 바로 책들이 신간 서점 못지않게 자로 재듯 질서정연하게 정리되어 있고, 그 상태 또한 너무나도 훌륭하다는 것이다. 일본의 고서들은 대부분 서점의 손을 거쳐 꼼꼼히 비닐에 포장되어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여 새 주인을 맞이할 준비를 갖추는데, 즉매회에 출품된 서적 또한 예외 없이 정성들여 포장되어 있음은 물론, 책 제목 및 저자명을 확인하기 쉽게 하얀색 라벨이 붙어져 있었다. 낱개로 한 권씩 들추어 보더라도, 겉보기엔 세월의 흐름으로 인해 먼지와 때가 수북이 쌓여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운 서적들도 안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김이나 접힘의 흔적이 거의 전무하다 싶을 정도이다. 이는 정성과 공을 들여 책을 보존하고 시장이라는 매개를 통하여 고서에 새로운 가치를 부여하여 재활용을 생활화하는 일본인의 지혜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였다.

짧지만 칸다 고서점가에 매료되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칸다 고서점가에서는 언뜻 보기에 쓸모없는 책일지라도, 오랜 세월에 걸친 보존 및 관리를 거듭하여 오늘날 제 가치가 입증되고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칸다 고서점가로 대변되는 일본의 고서점가는 고서에 대한 오래된 애정의 결과물이자, 그 누구에게나 열린 애서가들의 집합체이다. 대학촌의 가난한 학생들을 위해 개업한 칸다의 고서점가는 어느 덧 생사와 시공을 초월한 세대적 교감의 장으로 변모하여 일본 사회에 안착해 있었던 것이다. 식을 줄 모르는 고서에 대한 수요 또한 기존 인쇄매체를 향한 일본인들의 각별한 애착의 표현이자 일본의 문화적 저력이었다.
가끔 칸다 고서점가 일대를 떠올리면 즉매회에서 펼쳐 본 한 책에서 모습을 드러낸 바싹 말라있던 은행잎이 생각나곤 한다. 메이지 시대 때 발간된 책이었기에, 제 멋대로 그 시대의 은행잎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기억이 난다. 당시 책 주인이 무슨 뜻과 의도를 품고 은행잎을 끼워 넣었는지는 모르겠다. 적어도 그 마음이 전달되었음은 분명하고, 고서점가에서의 필자의 추억 역시 그에게 전달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져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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