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혹 컴퓨터에 문제가 생겨 본체를 열어보고 너무 단순한 회로에 어리둥절할 때가 있었다. 많은 기억을 저장하고 다양한 형태의 정보를 보여주며 넓은 세계와 연결시키는 컴퓨터가 몇 조각의 플라스틱과 납땜 자국과 엉킨 전선들로 이루어진 기계성을 노출하는 순간, 허탈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반대로 어떤 이들은 문화현상과 시장 상황을 들여다볼수록 너무 복잡하여 어리둥절할 것이다. 케이팝(K-POP) 한류에 대한 은근한 자부심에 따라붙는 당혹감과 의구심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다. 어릴 적에 방의 한쪽 모서리에서 시작하곤 했던 거울놀이로 들여다본 기묘한 세계가 재미와 함께 불안한 감정을 선물했던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작동방식을 알 필요가 있다.

 
소녀시대가 《더 보이즈(The Boys)》를 부르기까지
1990년대 중반 이후 대중음악의 오버그라운드언더그라운드의 상대적인 개념으로 한국에서 만들어진 단어를 ‘균형의 추가 무너졌다’는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다. 그 자리에 3대 연예기획사인 에스엠(SM)과 제이와이피(JYP) 그리고 와이지(YG) 엔터테인먼트의 각축장이 생성되었다. 그들은 라이벌이자 파트너로 서로의 경쟁력을 강화시켰다. 하지만 이 구조가 생산한 반짝 스타들은 그들만의 리그에 갇힌 채로 명멸을 거듭했고, 이 상황이 일대 반전을 맞기까지 지속되었다. 아이돌의 조건은 캐릭터(포장)와 노래(음악)인데, 나름의 정교화 과정을 거치며 음악 상품의 기본 조건을 갖춘 전국적인 스타들은 2007년에야 등장했다. 그들 중 하나인 소녀시대는 적당한 실력과 분명한 캐릭터, 십대에서 청장년층까지 아우른 타깃 설정, 고도의 기획이 결합되어 탄생한 2000년대 아이돌 그룹의 완성형이었다.
소녀시대의 정점이 <지(Gee)>였다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하지만 《더 퍼스트 미니앨범 -지(The First Mini Album-Gee)》(2009)는 타이틀곡을 제외하면 ‘예쁜 리본으로 둘러쳐진 심심한 종이상자’에 불과했다. 수록곡들의 완성도가 상향평준화된 《훗(Hoot)》(2010)에 이르러 비로소 국외에서도 통할법한 수준이 되었지만, ‘눈여겨보지 않은 변화’가 되고 말았다. 2010년은 <슈퍼스타K2>가 걸 그룹 열풍을 압도한 해였고, 대중의 시선이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과 일반인 스타로 옮겨갔던 것이다. 더구나 소녀시대 바람의 한 축이었던 장년 남성들은 불황기에 대중문화의 소비를 위해 열어두었던 지갑을 닫았다. 이어진 <나는 가수다> 등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범람은 약간의 순기능도 있지만 음악의 여러 기준들 중 하나일 뿐인 가창력과 기교로 관점을 획일화하고, 철지난 리메이크 바람을 다시 점화했다는 역기능도 만만치 않았다. 또한 방송 권력의 귀환 혹은 방송사의 연예권력 회수 시도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련의 과정에도 불구하고 소녀시대를 포함한 아이돌 그룹들의 행보는 예정되어 있었다. 국내에서 검증의 시간을 거쳐 국외진출을 모색해온 것이다. 그리고 일본 아이돌을 모델로 했음은 부정할 수 없지만 파워와 카리스마를 더하여 아시아에서만 나올 수 있는 아이돌 타입으로 생산된 소녀시대는 일본과 아시아에서 환영받게 된다. 재미있는 현상은 한국에서 청장년 남성층이 순풍이 되어준 것과 달리 일본에선 젊은 여성층의 바람에 힘입었다는 것, 그리고 국내에서 원더걸스가 일찌감치 빠져나간 이후  다른 경쟁자들이 아니라 자신과 겨뤄왔다는 것이다.

큰 틀의 상황과 앞서 운을 뗀 두 가지 특성이 《더 보이즈》를 설명한다. 뜨내기 팬들이 우루루 몰려들었다가 우수수 떨어져나간 후에도 고정 지지층을 충분히 확보해놓은 소녀시대는 다음 걸음을 밟고 있다. 그간 시도해온 외국인 작곡가 팀의 투입을 넘어 한때 세계적인 프로듀서였던 테디 라일리(Teddy Riley)를 동원한 것은 서구 시장에 어필하려는 마케팅 수법이다. 동시에 기존 팬들을 의식한 안전지향성 곡들도 장착해놓았다. 그 사이에 놓인 질감의 차이가 매우 크기 때문에 《훗》에서 잠시 걸어보았던 기대는 완벽하게 외면 받은 셈이지만, 그들에게는 애초에 음악의 성취가 아니라 시장의 반응이 중요했다. 이것을 보다 면밀히 살피기 위해선 소녀시대가 선두에 섰던 케이팝 한류를 함께 점검할 필요가 있다. 

 
케이팝 한류의 오늘이 있기까지
케이팝 한류, 더 들어맞게는 ‘한국 아이돌 열풍’은 일본과 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과 미국에서도 화제이다. 그 실체를 실감한 바 있다. 단, 광범위한 이야깃거리이지 광범위한 듣는 거리는 아니다. 미국·유럽·일본은 대중문화의 다양성이 발달한 사회로 아이돌 시장이 팝·록·재즈 시장을 한국처럼 완전히 압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그런데 언론의 전달 방식과 (쏠림이 심한) 한국의 상황에 대입하여 이해하는 관성 때문에 증폭되어 받아들여진 측면이 있다. 기사의 다양성보다 자극적인 이슈를 확대재생산하여 클릭 경쟁을 심화시키는 포털시대의 영향도 있다. 또한 방송사와 연예기획사의 공조도 눈에 띄는데, 예를 들어 MBC처럼 메인뉴스 시간에 ‘국외 한류 팬 열광’을 보도하고, 이어 공연실황을 편성해놓는 식이다. 우리는 남의 잘못과 부족함을 밝혀내는 데에 탁월한 재주를 가지고 있다. 가끔은 조건 없는 지지를 거부하는 심리를 조건 없이 지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미디어의 파상공세와 정보의 편중은 이러한 심리의 작동을 중지시킨다.

폄하가 아니다. 현황만으로도 충분한 성공이다. 아이돌을 통한 해외 음악시장의 확대는 2000년대에 정체된 국내 음악시장의 극복이 동인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 이전인 1990년대부터 조직적으로 시도되어 왔다. 에스이에스(SES)와 보아는 처음부터 국외시장을 겨냥하여 기획된 대표 사례들이다. 그러나 단발성에 그치거나 특정 국가에 제한되었고, 그들만의 리그로 추락한 국내 아이돌 시장의 산물이라는 이유로 지지받지 못했다. 하지만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구체화된 전략을 수립하면서 상황이 달라진다. 작곡가의 세대교체는 음악의 완성도 향상에 기여했다. 이어 팝과 가요를 혼합하고 일본의 특화된 아이돌과 서양의 보편형 스타의 장점을 취합·절충한 한국형 아이돌이 탄생한다. 여기에 SNS로 시차가 사라지면서 한국 아이돌이 직수출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발굴부터 모든 과정을 통합하여 관리하는 한국형 연예기획사 시스템은 개발독재의 고도성장과 같은 효과를 발휘했고, 어린 가수들에게 실수할 기회는 거의 없어졌다. 이 시스템의 순기능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하지만 한계를 지적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일부 기획사 주도의 케이팝 현상을 경제 가치로만 평가하는 와중에 연예계 병폐의 개혁은 길 잃은 달팽이의 속도로 늦춰졌다. 잘못된 계약 관행과 인권·노동권 문제는 ‘자발적 산업역군’의 후광 뒤로 밀려났다. 흔치 않게 표면화된 사례가 소녀시대의 소속사인 에스엠과 제이와이제이(JYJ)의 분쟁이다. 아이돌 시대의 부활과 케이팝 한류를 주도하는 한국형 연예기획사의 후진성과 어두운 면을 노출했고, 특정 기획사와 지상파 방송의 결탁 양상도 확인시킨 사건이다. 하지만 동시에 팬들이 나서 시스템에 문제를 제기하게 된 것처럼, 동방신기 사태로부터 이어진, 일종의 팬덤 소비자 운동을 촉발한 계기도 되었다.
그럼에도 시장의 관점으로 한류와 아이돌과 기획사를 다루어온 미디어는 기억의 정치와 비슷한 효과를 유발했다. 박정희 시대에 대한 향수가 의도된 기억의 선택과 배제와 관련 있듯이 대중은 성공과 환호만을 선택적으로 전달받아야 했다. 사실 소녀시대를 포함하여 케이팝 한류를 주도하는 아이돌 그룹들 중 여럿은 외국인 작곡가들이 만들어준 노래를 부르고, 외국인 안무가가 만든 춤을 추고 있는데도 대중이 원하는 것은 우월감, 그것이 전부인양 취급받는다. 이렇게 다소 높게 책정된 기준과 만족감을 유지하기 위하여 쓸데없는 에너지를 낭비하도록 내몰고 있는 것이다.

 
환상과 진상의 이중 회전체
편파성은 불충분하다는 뜻이다. 미움 받든 고움 받든 다른 시선이 필요하다. 재벌화된 몇몇 대형 기획사의 성공은 음악의 다양화와 다수의 창작여건 개선과 무관하다. 그런데 문화예술지원을 담당하는 당국은 그 이름이 무색하게 한류지원에 큰 재원을 쏟아 부으려 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 기여한, 이른바 대중문화평론가들과 기자들은 컴퓨터 앞에 앉아 다른 글거리를 찾고 있을 뿐이다. 덕분에 ‘아래로부터의 확산과 지속’, ‘장르 다양성의 확보’, ‘내부교류와 일상의 예술’, ‘일방진출이 아닌 쌍방교류’와 같은 조언은 마치 완전히 별개의 동네에서 말해져야 할 개념들로 치부된다.
소녀시대는 필요한 존재이다. 케이팝 한류는 흥미로운 현상이다. 다만 소녀시대는 응원해야 할 유일한 존재가 아니며, 케이팝 한류는 공공의 재원과 시선을 독점해야 할 현상이 아니다. 숙녀시대가 된 소녀시대는 이제 삼촌 팬이 아니라 ‘더 보이즈(The Boys)’, 즉 소년들을 호명한다. 실제 그 대상은 ‘소년들을 호명하는 소녀들에 환호하는 소녀들’이다. 하지만 더 나은 음악으로 더 넓은 시장에 호소하려한 이번 앨범은 어정쩡한 절충에 그치고 말았다. 진상만으로도 의미 있는 한류에 대한 과한 기대 역시 같은 결과를 초래할지 모른다. 이렇게 소녀시대의 존재방식과 케이팝 한류의 증폭방식은 환상과 진상의 이중 회전체 안에서 맞물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