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안대회 교수가 고서판매상으로부터 입수한 『북상기(北廂記)』를 학계에 소개하여 그 대략의 내용은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문을 볼 수 없어 궁금하던 차에 번역본이 나와 흥미진진하게 읽어볼 수 있었다. “그로테스크한 사랑을 극화”했다는 역자들의 해설처럼 알록달록한 책표지는 한 폭의 춘화도(春?圖)를 연상시켰다. 실제로 18세의 꽃다운 기생 순덕과 61세의 늙은 시골선비 김낙안, 그리고 40세의 퇴기 봉래선과 늙은 유배객 이양진이 벌이는 노골적인 성애 장면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어울리지 않는 사랑이 어떤 굴곡을 거쳐 어떤 결말을 맺을지 읽는 내내 궁금했다. 독자의 호기심을 잡아끄는 작가 역량이 예사롭지 않다는 반증이겠다.
물론 우리 고전소설사에 파격적인 사랑을 그린 작품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늙은 선비와 젊은 유부녀의 사랑을 다룬 『절화기담(折花奇談)』이라든가 『포의교집(布衣交集)』 등은 이런 부류의 작품이다. 그곳에서도 남녀 간의 아찔한 정사 장면을 아슬아슬하게 그려낸 바 있다. 파격적인 사랑의 설정, 그리고 과감한 성애 묘사. 하지만 『북상기』는 이들을 훨씬 뛰어넘고 있었다. 모두 19세기에 산출된 작품들이다. 그런 애정소설이 가능했던 까닭으로는 명·청대 중국 소설계를 휩쓸던 이른바 인정소설(人情小說), 특히 음사소설의 유입과 그 충격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지금도 노골적인 성애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서상기(西廂記)』라든가 『금병매(徐廂記])』에 대한 열풍은 그때도 대단했다. 이덕무(李德懋, 1741~1793)는 “요즘 소년들은 『금병매』를 보지 못하면 큰 수치로 여기고 있다”고 증언한 바 있고, 이상황(李相璜, 1763∼1841)은 『서상기』를 너무나 좋아하여 “책을 덮고 나서 상상하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혼이 녹는 것 같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실제로 『북상기』라는 제목은 『서상기』를 염두에 둔 이름이다. 뿐만 아니라 작품 곳곳에서 『서상기』, 『금병매』를 비롯한 명·청대의 인정소설들의 묘사라든가 모티프들이 활용되고 있다. 이들 소설이 몰고 온 영향력의 자장 안에서 『북상기』가 창작되었다는 부동의 증거이다. 현재 『서상기』가 유입되어 조선독본으로 만들어진 이본만도 25종이 넘을 정도이다. 원작 그대로 필사한 것, 현토(懸吐)를 단 것, 한문으로 주해한 것, 한글로 완역한 것, 한글로 초역하거나 개역한 것 등 각양각종의 형태로 다양한 독자의 요구에 부응했던 것이다. 그런 가운데 아류작이 만들어지기도 했고, 때론 단순한 모방을 넘어선 수작이 나오기도 했다. 조선전기에 『전등신화(剪燈新話)』가 전래·애독되다가 김시습에 의해 『금오신화(金鰲新話)』라는 빛나는 전기소설이 창작되기도 했던 것처럼.
세계제국이던 명·청대의 우량한 문화문명은 동아시아 각국을 그렇게 끊임없이 뒤흔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현상은 문명 중심의 영향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던 주변부의 운명일 수도 있다. 중심을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그런 비애. 하지만 그런 현실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필요도 있겠다. 세계적 수준의 걸작을 향유하면서 안목을 높이고, 급기야 그걸 넘어서려는 강한 창작 욕구가 발동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결혼하지 못한 노총각과 노처녀를 조정에서 짝 지워준 이야기를 전해들은 이옥(李鈺, 1760~1815)은 그 즉시 『동상기(東廂記)』(1791)라는 희곡으로 담아내고, 동고어초(東皐魚樵)라는 인물은 젊은 기생과 늙은 선비의 사랑에서 곧바로 『서상기』를 떠올리며 『북상기』라는 희곡을 지었던 것이다. 『서상기』와 견줄 만한 작품을 창작해 보겠다는 욕구가 심저에 깔려 있었음에 분명하다. 최근에 발견된 『백상루기(百祥樓記)』라는 작품의 작자 정상현(鄭尙玄)은 “문자의 변환은 특히 『서상기』에서 많이 가져왔으나 허구에 의해 만들어낸 것 중에는 『서상기』보다 나은 것이 많이 있다”고 자부할 정도였다. 이런 자부가 실상에 부합하는가는 진지하게 따져보아야 하겠지만, 그런 행위를 모방 또는 아류로 치부해버릴 일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 『북상기』가 명·청대의 음사소설을 연상시키는 노골적 성애 장면으로 주목받고 있지만, 거기에만 주목해서는 안 된다. 작품 곳곳에는 19세기 조선의 인정세태들이 곡진하게 묘사되고 있는 바, 그 어떤 기록에서도 이처럼 생생한 모습을 접하기란 쉽지 않다. 순옥이 침선비로 뽑혀 올라가게 되자 뇌물로 빼내는 장면, 골패놀이를 하는 장면, 기방에서 이루어지는 낯 뜨거운 정사 장면, 바둑을 두며 담배 내기를 하는 장면, 노비를 매매하는 절차 장면 등은 조선후기 풍속의 파노라마라 부를 만하다. 그런 사실적인 시정세태 위에서 이들의 사랑이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그들의 사랑은 색다른 실감과 진진한 재미를 안겨다 준다. 하지만 순옥의 곧은 절개와 김낙안의 들끓는 연정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랑은 좀체 읽는 이의 공감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파격적인 인물 설정, 노골적인 성애 묘사 때문만은 아니다. 사랑의 진정성과는 거리가 먼, 아니 사랑을 은밀하게 훔쳐보며 낄낄대는 작가의 시선이 시종일관 개입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게 묘미라면 묘미이겠지만. 성리학이라는 이념의 두께를 뚫고 남녀의 욕정을 당당하게 드러냈다는 신선한 충격에도 불구하고, 그리하여 심노숭(沈魯崇, 1762~1837)과 같은 문인은 그런 걸 천하의 제일가는 정취(情趣)라고 극찬했지만, 참을 수 없을 만큼 가볍고 유흥적인 사랑 놀음처럼 읽히는 것이다. 그래서 읽고 난 뒤에 왠지 씁쓸한 기분이 남는 것인지도 모른다.
『북상기』는 백화로 쓰인 희곡 고유의 어휘와 문장, 조선후기 풍속을 반영한 독특한 문체로 인해 읽어내기 까다로운 작품이다. 그런 점에서 한문학자와 명·청 희곡 전문가가 힘을 모아 자연스럽게 읽히도록 번역하고, 상세한 주석과 해설로 친절하게 이끌어주고 있는 오랜 노고에 대한 고마움을 잊을 수는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