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정부는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경제성장을 통해 가난으로부터 국민들을 구제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모토로 삼았다. 이러한 기획의 일환으로 ‘지독히 가난하고 불결하던’ 주거환경을 개선하여 한 가구당 근대적 형태의 집을 하나씩 제공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를 위해 1960년에 설립되었던 주택건설개발위원회(the Housing & Development Board)가 주축이 되어 단기간 내에 영구임대아파트를 대대적으로 건설하게 되었고 이는 곧 HDB로 불리게 되었다. 한편, 이 슬럼화되어 있던 마을 단위는 말레이어로 마을을 의미하는 캄퐁(Kam pong)이라고 불렸다. 따라서 사람들은 슬럼화되어 있던 판자촌인 캄퐁에서 근대화된 HDB로 이주하게 되었고, 어떤 중간단계 없이 급속하게 이루어진 이러한 이주는 싱가포르의 과거와 현재의 극명한 대비의 기준점이 되곤 한다. 즉 과거의 가난과 고단함의 상징인 캄퐁으로부터 현재와 미래, 경제발전, 풍요로움, 편안함을 의미하는 HDB로의 전 국가적 수준의 이전이 이루어진 것이다. 현재 싱가포르 전체 인구의 85%가 HDB에 거주하고 있다. 이러한 캄퐁은 그래서 사라져야 하는 것, 잊혀야 하는 것으로 치부되곤 했으나 HDB의 공급이 거의 포화상태에 이른 현재 시점에서 오히려 캄퐁에 대한 노스탤지어적인 기억의 소환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과거 시절에 대한 단순한 그리움의 발현인가 혹은 그 이상의 함의를 지니는 것일까? 이에 답하기 위해서는 캄퐁과 HDB의 비교를 통해 싱가포르의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맥락 안에 이들을 위치시켜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싱가포르의 과거인 캄퐁 그리고 현재인 HDB
동남아시아권에서는 도시화되기 이전 사람들이 모여 살던 작은 마을단위의 공간들을 캄퐁이라 불렀다. 그래서 말레이어로 마을을 의미하는 캄퐁은 싱가포르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에서도 작은 마을을 부르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 집들은 당시 쉽게 구할 수 있는 판자 조각들로 구조를 세우고 열대 나무 잎으로 만든 지붕을 얹혔다. 이러한 집들이 오밀조밀 모여 작은 단위의 마을을 구성한다. 각 마을의 중심에는 보통 사람들이 담소를 나누고 식사를 해결하던 커피하우스와 작은 식당들, 그리고 간단한 생활용품을 팔던 가게들이 전부였다.

캄퐁의 형태에 대한 싱가포르의 사회학자 추아벵홧(Chua Beng Huat)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주요 인종이었던 중국계와 말레이계가 서로 구별적인 캄퐁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 가령 중국계가 많이 살던 캄퐁에선 가구들이 마을에 난 가장 큰 길을 따라 조밀하게 붙어 있는 편이었다면 말레이 계열의 캄퐁에선 가구들이 더욱 독립적인 거리를 유지하며 산만하게 분포되어 있었다. 가장 큰 차이는 젠더별 공간의 사용에 있었는데, 두 그룹 모두 당시에는 여성들의 공적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을 공적 영역과 단절시키기 위한 가구 구조를 각각 보여주고 있다. 중국계의 캄퐁에서는 집의 전면부에 설치된 출입구 쪽에서 이웃 여성들과의 교류와 가사일이 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 출입구 쪽에 베란다와 같은 구조를 설치하여 공간을 확보하는 한편 지나친 노출을 막기 위해서 베란다 주위에 울타리가 설치되어 있었다. 말레이 계열의 캄퐁에서는 주로 집의 뒷면에 마당을 두어 여성의 가사노동이 부엌과 이어지는 이 후면부의 마당에서 주로 이루어졌다. 남성들의 공간과 관련해서는 두 캄퐁 모두 집에서는 멀어질수록 그리고 마을의 중심에 가까운 곳일수록 남성들을 위한 공적 공간들이 형성되어 있었고 그래서 마을의 중심에 위치한 카페와 식당은 여성들이 혼자 접근할 수 없었고 주로 남성들이 잡담을 하며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으로 제한되어 있었다. 이러한 캄퐁의 공간적 구성은 각 인종 그룹의 문화적 실천이 공간적으로 표현된 것이었다.
근대화를 통해 규격화된 고층 주거단지인 HDB는 어떤 면에서는 이러한 전형적인 캄퐁의 구성을 따르고 있다. 여러 HDB 구역들이 모인 타운의 중심에는 커뮤니티센터와 노점식당들을 한 건물에 집적시켜 놓은 호커센터(Hawker Center)가 위치하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중산층이 되는 ‘계급 없는’ 사회와 다문화주의를 표방하는 국가의 기획 하에 계획된 HDB는 그 사회적 구성에서는 캄퐁과 질적으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가령 어떤 면에선 자연 스럽게 인종별로 구별되던 캄퐁이 현대 싱가포르의 HDB에서는 수용될 수 없었다. 인종별로 구별된 HDB 타운이 형성된다면 인종별 갈등이 커질 것이라는 우려에서였다. 따라서 전체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 중국계만으로 한 HDB 구역이 채워지는 것을 막기 위해 일정 비율의 HDB는 말레이계와 인도계 주민에게 우선권이 주워졌다. 호커센터도 그 안에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음식점이 최소 하나 이상 갖춰져야 했다. 특히 할랄음식이슬람 율법에 의해 조리된 음식을 먹는 말레이계와 소고기를 먹지 않는 인도계의 주민들을 위해 이는 중요한 원칙이 되었다.
한편, 계급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둘의 공간구성은 큰 차이를 지닌다. 모두가 가난했던 캄퐁 시절에는 빈부 격차가 크지 않았고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하더라도 마을의 규모가 작고 모두가 마을의 중심부를 거쳐 가야 하는 구조상 빈부 격차가 이들 간의 교류를 크게 갈라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HDB에서는 부의 격차가 나는 이들이 같은 HDB 구역에 거주하더라도 이들 간의 교류가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공간상 구분이 용이해졌다. 가령 열대기후에서는 환기가 잘 안되고 벌레들에게 더 가까운 저층보다는 고층에 대한 선호도가 크기 때문에 고층과 저층 간 계층 차이가 존재한다. 또한 HDB는 저비용으로 대량의 가구를 건설하다보니 매우 기본적인 프레임만을 제공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인테리어와 수리에 따라 주거 공간의 질이 달라진다. 따라서 외관상으로는 같은 HDB에 살고 있지만 그 공간적 실천에 있어서는 계층별 차이가 극명해진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HDB 중심의 활동시간이 많을수록 저소득 계층으로 여겨진다. 가령 고소득 계층은 외식을 위해 호커센터 외에도 많은 선택지가 존재하지만 저소득 계층에는 기본적으로 에어컨이 없는 오픈공간에 위치하여 음식값이 저렴한 호커센터가 거의 유일한 선택지가 된다. 또한 HDB의 1층은 거의 뚫려 있는 빈 공간으로 보이드덱(void deck)이라 불리는데 누구나 신청만 하면 이 보이드덱에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치를 수 있다. 당연히 여유가 있는 계층은 보이드덱보다는 호텔이나 레스토랑 임대를 선호하지만 저소득 계층에게는 이곳이 가장 적합한 선택지가 된다. 또한 주로 이 보이드덱을 일상적으로 점유하는 계층은 일이 없는 노인 계층과 아이들이기 때문에 이들이 공간을 점유하는 동안 다른 이들이 이 공간을 점유하기란 쉽지 않다.

캄퐁에서 근대화된 HDB로의 이전은 가난을 겪은 대다수 싱가포르인들에게는 경제적 풍요의 상징물이다. 따라서 아직도 캄퐁의 판자집과 같은 곳에 인구의 많은 수가 머물고 있는 주변 국가의 국민들에 비해 대다수 국민이 자신의 주택을 갖고 있는 싱가포르인들에게 이는 자긍심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캄퐁 시절에 비해 인위적으로 구성된 HDB에서 서로 다른 인종 간의 갈등이 심화되기도 하였다. 이와 함께, 모두가 중산층이 되는 사회가 아니라 점점 빈부격차가 심해지는 싱가포르에서 HDB는 더 이상 풍요로움의 상징이 아니다. 수영장과 테니스장 등의 더 좋은 시설을 갖추고 소수에게만 제한적인 접근성을 허용한 게이티드 커뮤니티(gated community)로서의 콘도가 부의 상징이 되자 HDB는 더 이상 선망의 대상도 부의 상징도 될 수 없었다.
 

노스탤지어의 대상이 된 캄퐁
급속한 도시화로 이제 캄퐁은 거의 남아 있지 않은데, 뒤늦게 캄퐁의 보전 필요성을 느낀 싱가포르 정부는 1980년대부터 남아 있던 캄퐁들의 주택들을 헐지 않고 보수하여 보전하기로 하였다. 이들 중 대부분이 실제 주민들의 주거 공간이 아닌 상품화되어 상업시설이 되거나 관광지화되고 있다. 외국인에게는 싱가포르의 전통적 모습을 보여주는 곳으로, 캄퐁에서 살아본 적 없는 젊은 싱가포르 세대에게는 싱가포르의 과거를 체험하는 곳으로, 그리고 과거 캄퐁에서 자란 세대에게는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는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은 싱가포르 금융의 중심이기도 한 도심 한 복판에 강을 따라 조성된 ‘캄퐁 글람(Kampong Glam)’으로 예전 마을의 형태는 거의 사라지고 그 마을의 이름만이 남아 있다. 이곳은 옛 가옥 형태를 복원하여 고층건물들 사이에 유일하게 1~2층의 낮은 가옥 형태를 유지하며 다양한 색채들로 꾸며 놓아 많은 외국인 관광객과 싱가포르의 젊은이들이 밤문화를 즐길 수 있는 바(bar), 클럽, 갤러들로 변형되거나 음식거리화되었다.
최근에는 평일 주요 시간대에 싱가포르의 대표적 방송사인 미디어콥(MediaCorp)에서 자체 제작한 드라마 <캄퐁 타이Kampong Ties>를 방영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캄퐁에서 성장한 두 여성의 일생을 다루고 있다. 중국계 캄퐁이 주 무대로 두 여성의 결혼과 이혼과 같은 개인사와 도시화와 산업화라는 사회적 변동이 맞물려 있는 가운데 캄퐁의 일상생활과 주민들 간의 갈등 및 범죄 그리고 남녀 간의 사랑을 보여준다. 제목에서 보여주듯 그 공간적 설정인 캄퐁은 드라마가 표방하는 시대적 상황, 즉 모두가 가난했던 그 시절에 살아남기 위해 분투하는 개인들의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다. 주로 외국의 인기 드라마를 수입/방영하던 미디어콥이 자체 제작한 드라마를 방영하는 것은 외국 드라마를 통해서는 자국민이 공유할만한 자신들의 역사를 보여줄 드라마를 제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미디어콥이 실질적으로 국가의 의도를 반영하는 유일무이한 방송사임을 감안할 때, 캄퐁이 주요하게 드라마에 등장하여 싱가포르의 과거를 환기시키는 것은 어떤 함의를 지니고 있을까?
올해 싱가포르는 각 지역의 대표의원을 뽑는 선거에서 집권당인 인민행동당(People’s Action Party)이 야당들의 유례없는 도전에 직면하였고 여전히 다수의 의원석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집권의 정당성에 많은 의문이 제기되었다. 여기서 세대별 차이가 크게 나타나는데 1960~1970년대 가난했던 캄퐁 시절을 겪은 세대들이 HDB를 건설하는 등 지금의 경제성장을 이룬 인민행동당 여전히 지지하는 반면, 과거의 가난을 경험하지 않는 젊은 세대는 현재 시점에서 형식적 민주화보다는 실질적인 민주화를 원하면서 집권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다. 그간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과정을 ‘불필요한 정쟁’으로 여기며 사회적 분열을 초래하기보다는 경제성장을 통해 싱가포르 국민들에게 부를 안겨줌으로써 그 정당성을 유지하려 했던 집권당에게는 자신들의 정당성을 설득하기 위해서 과거 자신들이 얼마나 가난했는지를 상기시키는 것이 중요했을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캄퐁은 바로 그 가난했던 과거를 상징하며 동시에 분열이 아닌 진정한 커뮤니티가 살아 있던 시절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캄퐁이라는 과거는 단지 과거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현재에도 환기되고 미래를 만들어내는 사회적 기제의 한 부분으로 작동하고 있다. 그러므로 과거와 역사에 대한 관심 그 자체가 경계되어야 할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문화적 재현에 담긴 정치적, 사회적 함의에 대한 성찰이 함께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