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과 실재
 

풍경 #1 : 프로레슬링은 쇼다
 

아직 전국의 가정 모두에 텔레비전이 보급되는 것은 무리였던 시절. 이른 저녁 식사를 마친 동네 주민들은 골목시장 한 구석에 위치한 전파상 앞에 전시용으로 배치된 14인치 흑백 수상기 주변에 모인다. 한 달 전부터 기다리던 한·일 프로레슬링 타이틀 매치. 암울한 정치적 현실에서 숨죽이던 주민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수상기 안의 검정색 팬티를 입은 건장한 두 남자가 사각의 링 안에서 벌이는 사투에 시선을 집중한다.

피가 튀고 살이 찢어지는 처절한 격투 와중에 한국 선수의 우세가 확실해지는 순간, 외부에서 발생한 돌발 상황에 의해 심판이 한눈을 팔기 시작한다. 어느 틈에 일본 선수의 손에는 흉기가 들려있고, 한국 선수는 그 흉기에 맞아 고통의 몸부림을 시작한다. 경기는 순식간에 일본 선수의 우세로 바뀌고 바닥에 쓰러진 한국 선수는 일어날 줄 모른다. 경기는 더 이상 반전의 가능성이 없이 일본 선수의 승리가 확실시 된다. 어느새 현장의 관객과 수상기 앞에 몰려 있던 동네 주민들의 마음은 하나가 되어, 한국 선수에게 포기하지 말고 일어나라고 간절히 외친다. 함성이 최고조가 되는 바로 그 순간, 관객의 바람이 전해졌는지, 이마에 온통 피칠갑을 한 채 쓰러졌던 선수는 기적과도 같이 일어난다. 관객과 시청자 모두는 한 마음이 되어 외친다. “박치기!”
간절한 그 외침을 들었던 것일까? 한국 선수는 일본 선수의 머리를 잡고 강렬한 박치기를 시도하며 극적인 대역전승을 이끌어낸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캐스터가 승리의 원인을 묻자  관객의 성원이라고 대답하던 선수의 말에 모두는 환호성을 지른다. 관객과 캐스터, 선수가 교감하던 그때 그 시절의 프로레슬링. 프로레슬링은 당대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영원할 것만 같은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한 선수의 폭로와 함께 허무하게 종말을 맞이한다. 

“프로레슬링은 쇼다.” 1)

풍경 #2 : 와! 진짜 리얼이야. 나 소름 돋았어
 

텔레비전을 소유하지 않은 가정이 특이해 보이는 시점. 하지만 저녁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가족 모두가 공유하는 안방에 놓인 텔레비전을 외면하고, 노트북·스마트폰 또는 개인 휴대 정보 단말기(PDA) 등 자신이 단독으로 점유하는 정보 수신 장치를 가진 채, 각자의 공간으로 돌입한다. 무리에서 독립된 개인은 기기에 제공되고 있는 수백 개의 정보 서비스 중에 자신이 원하는 프로그램을 선택한다.

선택된 프로그램에서는 여러 명의 출연자들이 휘황한 조명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스튜디오를 떠나, 꾸미지 않은 얼굴과 복장을 한 채 가공되지 않은 자연으로 향한다. 특별한 사전 계획 없이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에 도착한 그들은, 곧 밥을 먹는 것과 잠을 자는 것을 가지고 다투기 시작한다. 조금이라도 맛있고, 편한 잠자리를 찾으려는 출연자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서로의 이기심을 내세우며 격렬하게 대립한다. 대립의 과정에서 선배와 후배, 인기의 다소 여부는 상관없다. 대립이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자 그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우연적 요소에 맡기기로 결정하며, 누가 승자가 되고, 누가 패자가 될지 결정되지 않은 복불복 게임에 몰입한다. 각본이 준비되지 않은 우연적 요소에 시청자는 흥미를 느끼며 초조하게 그 결과를 기다린다.
마침내 승패가 갈리고 출연자의 희비가 엇갈리는 순간, 결과에 놀란 한 출연자의 입에서 프로그램의 대명사가 된 감탄사가 흘러나온다. 그리고 이 리얼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은 당대 최고의 인기프로그램이 된다.2)

“와! 진짜 리얼이야. 나 소름 돋았어.”      

보는 자는 누구인가?
: 시선에 내재한 권력의 향방
 
모든 시선은 권력이 전체적 기능을 수행하는 데 부속품 같은 요소가 된다.
-미셀 푸코,  『감시와 처벌』-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프로레슬링이 한 순간에 몰락하게 된 원인은 ‘쇼’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는 시선의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한 대중의 각성에 있다. 프로레슬링이 대립하는 선수들 사이에 합의된 사항에 따라 합(合)을 맞추는 연출된 경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던 시절의 대중은 자신이 응원하는 선수의 고통과 환희에 몰입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대중의 시선은 경기를 치르는 선수에 주목되어 있으며, 선수의 시선은 대중을 향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즉 대중은 바라보는 주체(subject)이며, 프로레슬링 경기를 치르는 선수는 대중의 시선이 고정된 대상(objet)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본다’의 주체는 대중이며, 대중은 누군가가 자신을 보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할 필요가 없기에 자신의 열광이 수치스럽지 않다. 대중은 자신의 시선이 미치는 세상의 중심이며, 나머지는 그 시선의 대상이다. 판옵티콘(panopticon)3)의 가장 높은 층의 주인이 된 대중은 시선의 권력을 획득하며 자신이 관찰하는 프로레슬링 선수의 행위를 지배한다.
하지만 프로레슬링이 쇼인 경우는 다르다. 쇼라는 단어는 ‘본다’라는 의미를 가진 자동사가 아닌, 타인에게 ‘보여 준다’라는 의미를 가진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타동사이다. 이제 프로레슬링에 있어 선수와 관객 사이에 시선의 권력관계가 역전된다. ‘프로레슬링은 쇼다’라는 명제가 함의하는 바는 대중이 프로레슬링 선수를 보는 것이 아닌 프로레슬링 선수들이 자신들이 연출한 경기를 대중에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대중은 실재하는 현실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선수들이 창출해낸 가상현실을 바라보는 것이며, 선수들은 그런 가상현실에서 허우적대는 대중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이다. 대중은 시선의 주인이 아닌, 시선을 받는 자가 된다. 자신이 감시를 당하는 대상이 된 것을 자각한 대중은 맹렬한 수치심에 휩싸이게 된다. 모든 것을 주관할 수 있는 황홀한 매트릭스에서 무력한 리얼 월드로 귀환한 대중은 당혹스럽다. 대중에게 모욕감을 선사한 대가는 크다. 프로레슬링의 시대는 막을 내린다.

 
불안은 권력을 욕망한다
: 리얼 버라이어티의 탄생
 
진정한 삶은 여기에 부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 안에 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 『전체성과 무한』-
 
프로레슬링의 종말과 함께 독재자의 수직적 권위가 지배하는 전근대를 극복하고, 시민의 수평적 참여를 근간으로 하는 근대를 구성한 대중의 이성은, 이전까지의 미디어가 제공하는 수직적 서사 전달 방식에도 동일한 거부감을 표시한다. 프로듀서와 작가의 극본에 의하여 사전에 계획된 방향으로 시청자에게 전달되는 선형적 서사(linear narrative)는 그 형태가 독재자의 소통의 방식과 묘하게 닮았다. 독재자로부터 정치적 권력을 이양 받음으로써 성장한 대중의 의식은 더 이상 타자에 의해 일방향으로 창출된 것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타자의 시선이 머무르는 대상이 되기를 꺼려한다. 타자가 연출한 가상현실을 향유하는 것은 연출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것을 의미한다. 계몽된 대중은 타자의 시선에 포착되는 것은 타자의 지배 아래로 들어간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대중은 딜레마에 빠진다. 지배하려면 보아야 하나, 지배당하지 않으려면 보지 않아야 한다. 대중은 더 많은 권력을 획득하고 싶지만, 가까스로 획득한 권력을 놓고 싶지도 않다.
이런 대중의 불안은 새로운 양식의 프로그램을 욕망한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탄생이다. 장르의 명칭부터 실재라는 것을 유난히 강조하는 리얼 버라이어티는 최소한의 구성만을 가지고 스튜디오에서 벗어나 출연자들이 일상에서 맞이할 수 있는 가능한 여러 가지 상황들을 날 것 그대로 보여준다. 출연자들은 돌발적인 상황을 맞이하는 데, 매 분기 마다 대본에 따른 행동이 아닌 각자의 의지에 따른 행동을 취함으로써 프로그램은 연출자가 의도한 선형적 서사에서 벗어나 연출자를 포함한 출연자들 중 누구도 프로그램을 통제할 수 없는 비선형적 서사로 나아간다. 현장의 통제가 불가능하다면 그곳에 권력자는 부재한다. 혼돈의 현장 외부에 위치한 대중의 불안은 어느새 희석되며, 현장의 모든 상황을 감시함으로써 판옵티콘의 가장 높은 자리를 차치한다. 그리고 대중은 시선의 권력을 획득한다.
하지만 대중에게는 아직 미약한 불안감이 잔존한다. 프로레슬링으로 대표되는 가상현실이 남긴 집단무의식은 대중의 영혼 깊숙한 곳에 각인되어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대중은 브레히트(Bertolt Brecht, 1898~1956)의 소격효과(Verfremdungseffek)관객이 배우의 연기에 몰입해 동일화되어서는 안 되며 객관적인 입장에서 극을 평가해야 한다는 내용를 학습하지 않았더라도, 본능적으로 프로그램에 대한 몰입을 거부하고 거리를 둠으로써 타자의 시선에 종속되는 것을 방어한다. 이런 대중의 불안감 해소를 위해 프로그램은 연출자의 자막이나 출연자의 입을 통해 끊임없이 대중의 눈과 귀에 메시지를 전달한다. 당신이 보는 것은 가공되지 않은 현실이고, 그것도 그냥 현실이 아닌 소름이 돋을 정도의 진짜 리얼리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주장하며, 권력은 대중에게 있으니 안심하고 프로그램으로 몰입하라고 설득한다. 결국 대중은 그 안에 진정한 리얼리티가 존재하는 것을 의심하면서도 거부할 수 없는 권력의지의 부름에 프로그램 안으로 몰입한다.  

쌍방향 참가(Interactivity) : 권력의 이양

권력은 통제이다. 정부는 최대한의 권력을 행사하지 않으면 권력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월레 소잉카, <엔드루 저커먼과의 인터뷰>, 『위즈덤 라이프』-

권력은 그 개념에 내재한 속성상 타자를 통제하고 지배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 한다. 즉 권력은 단지 획득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행사되어야 권력인 것이다. 이는 봉건군주에게서 권력이 대중에게 이동한 현재에도 동일하다. 대한민국의 헌법은 주권재민의 원칙과 주권의 행사방법을 투표라는 형태로 규정하고 있다.
리얼 버라이어티를 통해 시선의 권력을 획득한 대중은 이제 프로그램에 관하여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려 시도한다. 그리고 그 순간 대중은 당혹감에 빠진다. 연출자가 출연자를 지배함으로써 조작이 가능한 선형적 서사를 포기한 리얼 버라이어티는, 연출자의 간섭가능성을 배제함으로써 대중에게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였으나 그 행사방법에 대해 규정하지 않았다. 대중은 프로그램에 자신의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자신의 힘을 확인하려 하지만 그 힘을 전달하는 매개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권력을 획득했다고 신뢰한 대중은 그 힘을 분출하지 못함으로써 무력감을 느낀다.

영상매체가 창출한 이미지 전달의 방향은 여전히 비가역적(irreversible)이며 대중은 프로그램에 참여하지 못하고 출연자들에게 아무런 통제력을 행사하지 못한다. 소통은 연출자와 출연자 사이에서만 이루어지며 대중은 단순한 국외자(bystander)로 남아 그들과 어울리지 못하고 소외된다. 정치적 권력은 민주주의를 달성했으나, 미디어 권력은 여전히 비민주적이다. 권력은 아직 미디어에게 있다. 대중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이 기만당했다는 것을 깨달으며 그 옛날 프로레슬링이 남기고 간 상처를 떠올린다. 리얼 버라이어티 역시 대중에게 보여주기 위한 또 하나의 쇼였던 것이다.4)
권력은 있으나 그것을 행사하지 못해 욕구불만 상태에 빠진 대중의 시선은 마침내 자신의 욕망을 오롯이 발산할 수 있는 공간을 만난다. 그곳에서는 이전의 대중이 열광했던 프로레슬링에 못지않게 처절한 생사를 가르는 운명의 결투가 펼쳐지고 있다. 하지만 프로레슬링과 달리 승자는 프로그램에 잔존하지만, 패자는 그 즉시 삭제되며 더 이상 무대에서 볼 수 없다는 점에서 그 모양새가 검투사들의 경기가 열렸던 고대 로마의 콜로세움과 유사하다.
관객의 환호성의 크기로 패자의 생사를 결정했던 콜로세움의 규칙은 의외로 민주적인 면이 있었다. 콜로세움을 가득 메운 관객은 검투사들에게 단순한 국외자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경기의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효과기(effector)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사각의 링이 아닌 원형무대에 선 현대의 검투사들은 스스로의 역량을 과시하며 그들을 바라보는 시청자에게 자신을 지지해달라며 어필한다. 시청자는 콜로세움의 관객과 같이 그들에게 표를 주거나 주지 않음으로써 프로그램의 플롯에 영향을 미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대중은 드디어 프로그램의 서사를 통제할 수 있는 권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경연이 종료되고 출연자의 처우가 결정되는 순간, 긴장으로 인해 바싹 마른 입술을 질근거리는 검투사들은 자신에 대한 처분을 심리하며, 시청자들의 선호도를 한데 모아 결과를 선고하는 심사위원의 얼굴을 주목한다. 참가자의 생사여탈권을 시청자에게 위임 받은 심사위원은 잠시 동안 자신의 권력을 음미하듯 허락된 시간동안 최대한 선고를 늦춘다. 마침내 클로즈업된 황제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지며 검투사의 운명이 결정되는 순간 살아남은 자의 얼굴에선 환희가 터지며, 그렇지 못한 자는 절망스런 몸짓으로 자리에 주저앉는다. 시청자는 자신이 지지를 보낸 출연자의 결과에 희비를 느낀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 불리는 디지털 시대 콜로세움의 등장은 대중에 프로그램의 서사가 나아갈 바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부여함으로써 프로그램에 대의민주주의의 원리를 구현한다. 그럼으로써 미디어 권력은 그동안 굳건히 지켜오던 자신의 기득권을 대중에 이양하기 시작하며 대중의 열광을 이끌어낸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전성시대다.5)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
: 다중 참여로 인한 다중 결과 

예술에 참여하는 대중의 수적 증가는 참여하는 방식의 변화를 초래한다.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 시대의 예술작품』-
 

대중은 프로그램의 서사가 분기하는 지점에서 자신의 권력을 행사함으로써 그 존재가 미디어 세상에 실재한다는 것을 실감한다. 하지만 다수결 원리에 따르는 대의제의 원칙상 자신의 견해가 언제나 채택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대중이라는 개념은 개인들이 모인 집합체이며, 대중이 소유한 권력에 있어 개인의 지분은 대중을 구성하는 총인원의 수로 나눈 몫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개인의 선택은 대중의 선택과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오디션류로 대표되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대중이 열광하는 지점은 출연자들이 열과 성을 다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는 부분이 아니라, 무대 위에 정렬한 출연자들이 생존하느냐 아니면 탈락하느냐가 결정되는 상황에 있다. 대중의 투표로 승패가 갈라지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의 출연자라는 신분은 그 출연자를 지지하는 대중의 대리인이라 해도 무방하다. 대중은 자신이 지지하는 출연자를 매개로 하여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서사의 방향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출연자의 생존 여부는 그 출연자를 지지한 대중의 의지가 프로그램에 반영되는 여부이기도 하기에 대중의 감각은 출연자의 일거수일투족을 작은 것이라도 놓칠세라 면밀히 관찰한다.
자신이 지지하는 출연자를 관찰하고 싶다는 대중의 욕망을 읽은 카메라는 탈락자가 발표되는 순간의 출연자의 표정을 다양하게 포착한다. 때로는 하나의 화면에 프레임을 분할하는 다중 프레임의 형태로 모든 출연자의 얼굴을 담거나, 때로는 하나의 음성에 출연자의 얼굴만 바꿔 시간을 반복하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카메라는 권력의 담지자인 모든 대중의 욕망을 충족시키려 노력한다. 하지만 카메라의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 발표 이후의 단계에서, 소수 대중의 지지를 받은 탈락자는 더 이상 서사의 진행에 참여할 수 없다. 이는 그를 지지하는 소수 대중의 의지 역시 더 이상 프로그램에 어떠한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수가 공유하는 방송이라는 한정된 자원을 분배하는 과정에서 배분의 기준이 되는 공리주의의 원칙이 작동한 결과이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위해 낙오된 소수의 의지는 소멸한다. 서바이벌에서 살아남지 못하는 자는 출연자뿐만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소멸된 소수의 행복은 이대로 버려져도 괜찮은 것일까?

 
슈뢰딩거의 고양이 : 가능 세계의 맞춤형 서사
 
모든 부분에서 세계와 동일하지만, 특정한 존재의 상황만 바뀐 가능 세계가 있을 것이다.
-고트프리트 라이프니츠, 『단자론』-

사진기의 발달은 회화의 역사에 인상파의 존재를 새겨 넣었다. 이처럼 산업기술의 발전은 때때로 예술 양식의 혁명을 견인하기도 한다. 이런 원리는 방송 프로그램에도 적용될 수 있다. 정보처리기술의 혁명은 방송정보를 전달하는 매체를 변화시킴으로써 프로그램의 서사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방송정보를 대중에게 전달하는 매체의 수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던 시절은 한 대의 텔레비전 수상기를 다수의 사람들이 공유하는 형태로 나타난다. 매체를 독점할 수 없는 개인은 군중에서 분리될 수 없으며, 분리되지 못한 개인의 의사는 독립하여 존재할 수 없다. 개개인의 욕망을 하나하나 충족시켜줄 수 없는 상황에서 방송은 평균적 대중의 의사를 추정하여 그에 해당하는 서사를 제시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기술력이 부족하던 시절의 서사는 당연히 결과가 고정된 선형적 서사가 되며 권력의 향방은 방송에 위치한다.
하지만 고도산업사회가 이룬 기술력은 더 이상 매체의 공유를 강요하지 않는다. 기술발전에 따른 매체와 정보의 증가는 그 증가한 숫자만큼 미디어의 권력을 약화시킨다. 방송이 대상하는 목표 시청자의 범위가 불특정 다수의 군중에서 소수의 특정집단으로 축소되는 것도 그 일환이다.이른바 타깃 시청률 개인은 노트북 또는 스마트폰과 같이 영상을 전달받을 수 있는 다양한 매체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선택하여 그것을 독점할 수 있다. 개인이 매체를 독점한다는 의미는, 방송이 전달하는 영상을 다수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 군중에서 독립한 개인과 방송이 일대일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이 부분을 착안한다면 성황리에 유행중인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앞으로 진화하는 방향을 예측할 수 있다.
개인 맞춤형 서사의 등장이다. 기술의 발달은 매체를 타인과 함께하지 않으며 성장한 새로운 세대를 잉태했고, 그들은 이미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Massive Multiplayer Online Role Playing Game)’을 통해 실시간 쌍방향으로 진행되는 개인 맞춤형 서사에 길들여져 있다. 게임에 접속한 플레이어는 게임 속 자신의 캐릭터를 통해 서사의 방향을 결정하는 점에서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구성과 닮았다. 하지만 자신의 선택이 소수에 속한다고 해서 캐릭터가 삭제되지 않는다는 점은 중대한 차이다. 소수의 의지는 게임 속에서 소멸되지 않으며, 서사의 분기점에서 다수의 의지와 다른 방향으로 자신만의 서사를 중단 없이 진행해 나간다. 자신이 만들어가는 게임의 플롯 속에서 개인은 대중에게서 온전히 분리되어 자신의 실존을 끝없이 확인한다. 대중이 어느 것을 원할지는 자명하다.
권력은 미디어에게서 대중으로 이동하고, 대중이 소유한 권력은 대중을 구성하는 개개인에게 다시 이동한다. 즉 권력은 매체를 점유하는 자를 따라 이동한다. 그러므로 미래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은 게임의 형태를 띤 채로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출연자가 다음 단계 진출에 성공한 미래와 탈락한 미래, 두 개의 가능한 미래는 기술의 발전으로 인하여 매체 안에 동시에 존재할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이 중첩된다면 가능한 미래는 수백 또는 수천 가지의 미래가 하나의 시간에 현전하게 된다. 개인은 가능한 수많은 미래들 중에서 자신이 원하는 미래를 선택하며 개인이 원하는 서사를 진행한다.
매체와 정보가 홍수처럼 흘러넘치는 시대는 시선의 권력이 개인에게 이양된 시대이다. 권력자가 된 개인은 더 이상 미디어가 전달하는 서사에 종속되지 않으며, 자신이 원하는 서사를 욕망한다. 권력의 또 하나의 속성은 추종자를 거느리는 것이다. 미디어가 권력이던 시대는 개인이 미디어의 추종자였다면, 개인이 권력자가 되는 시대는 미디어가 개인을 추종하게 된다. 미디어는 권력자인 개인의 욕망을 온전히 충족시킬 수 있기를 욕망한다. 먼 미래의 방송은 오직 한 사람만의 시청자를 위한 방송의 형태가 될 가능성이 높다. 이것이 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최종 진화적인 모습이 아닐까?

미디어비평상 당선소감
 

문화기호의 차이가
개개인의 사고를 경로화 시키는 과정을 그리는 문화비평
 

김대현

어부가 생선의 구분에 있어 명태와 대구의 차이에 민감하듯이, 문화비평을 시도하는 사람이란 문화가 빚어내는 다양한 기호들에 대해 다른 사람에 비해 조금 더 민감해야 하는 것은 분명할 것입니다. 사회구성원이 공유하는 문화기호들의 미세한 차이 가 개개인의 사고를 어떻게 경로화 시키는지에 대한 글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에 대해 당선이라는 즐거운 소식이 전해짐과 함께 느껴진 감정은 앞으로 자신의 글에 대한 자기검열을 할 필요가 없다는 홀가분 함이었습니다. 글을 쓸 때 가장 먼저 염두에 두는 사람이 자기 자신이 아닌 타인이 된다는 사실은 자 신이 산출한 글에 대한 검토와 책임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미루는 것과 동일한 것이기 때문 입니다. 이러한 자기검열에 대한 부담을 덜어 주신 심의위원들과 <플랫폼>에 감사를 드립니다. 그와 동시에 앞으로 써질 것들은 온전히 스스로의 책임 이라는 것 또한 명확히 인식하고 있습니다.
먼저 부모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그분들이 아니었다면, 프로레슬링으로 시작하는 글에 대한 기본적인 생각은 아예 떠올릴 수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형과 누나를 비롯한 가족 친지들 에게도 마찬가지로 감사를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글의 첫 독자이자, 미흡한 부분들에 대해 냉철한 지적을 해준 아동청소년문학비평가인 신지영 평론 가에게 특별한 고마움을 전합니다. 그의 독려가 없었다면 이 글은 이전의 수많은 단상들처럼 머릿속 에서만 맴돌다 사라졌을 뿐, 결코 활자화 된 산물로 나타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미디어비평상 심의평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청자의 힘이 계속 상승하는 현상으로 진단
 

이영미 (대중예술평론가, 연극평론가)
 

이번 공모에는 응모작이 크게 늘었고 글의 수준도 전반적으로 크게 향상되었다. 매우 반갑고 고무적인 현상이다. 특히 응모작들이 다루는 대상이 일정한 경향을 보이고 있었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는, 응모자들이 재벌 소재 드라마, 서바이벌 혹은 리얼리티 프로그램, SNS 등 최근 미디어와 방송의 중요한 이슈와 프로그램 경향을 잘 포착하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글의 분석과 주제가 비교적 상식적인 평론이 많다는 것은 다소 아쉬운 지점이다. 그르지 않은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나 이야기하고 있는 평범한 이야기라면, 구태여 새롭게 글로 쓸 필요는 없다. 평론도 창의적 활동이며, 남들이 하지 않는 이야기, 남들이 잘 보지 못하는 지점을 뽑아내는 창의성이 요구된다. 대체적으로 작품·프로그램이 아닌 미디어 자체에 대한 글에서 이런 경향이 더 두드러졌다. 그런 점에서 송지연 씨의 「표류하라, ‘나는’ ‘거기에’ ‘있다’-디지털 미디어의 끝과 시작」은 글을 풀어가는 방식이 다소 독특하여 주목할 만했으나 분석의 논리성이 그리 치밀하지 못했고, 역시 주제의 평이함이 흠이었다. 그에 비해 텔레비전 드라마에 대한 평론은 미디어 자체에 대한 평론들에 비해 비교적 분석이 풍부했으나 논증에서 사용된 예가 보편타당성을 잃은, 다소 자의적인 맥락 짓기가 많았다. 그중 전기태 씨의 「지옥도와 성역, 재벌드라마가 구축한 ‘그들만의 리그’ : 2010~2011년 방영 재벌드라마에 대한 제언」은 최근의 재벌 소재 드라마가 재벌이라는 성역의 해체와 관련이 있는 한편, 여전히 현실에 대한 체념의 태도를 지니고 있다는 주목할 만한 결론을 내린 점이 돋보였다. 단 글의 전개에서 줄거리 소개에 많은 분량을 쓰는 등 응집력이 떨어지고, 글이 거칠다는 흠이 있었다.
두 명의 심사위원이 이의 없이 합의한 당선작인 김대현 씨의 「디지털 시대의 콜로세움-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화」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단지 그 자체로만 분석하지 않고 리얼리티를 요구하는 시청자의 힘이 계속 상승하는 현상으로 진단해낸 것, 이를 프로레슬링으로부터 최근의 시청자 참여 서바이벌 프로그램과 롤플레잉 게임까지 넓게 아우르며 맥을 잡아 설명해낸 스케일이 돋보였다. 단 텔레비전 프로그램과 게임이라는 이질적 형태의 문화를 같은 맥락으로 연결시킨 것이 다소 무리이다 싶다.
작년에 당선작을 내지 못해 섭섭했는데 올해는 좋은 글들을 풍성하게 만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내년이 기대된다.

미디어비평상 심의평

대중의 욕망과 권력을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실력이 눈길을 끔
 

이택광 (문화비평가, 경희대학교 영미어학부 교수)
 

이번 플랫폼 미디어비평상 투고작들은 예년에 비해 높고 고른 수준을 보여주었지만 대체로 대동소이한 주제들을 비슷한 형식으로 다루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띄었다. 글솜씨가 평준화되면서 문제의식도 너무 많은 부분들을 서로 나누어가진 것이 아닌지 우려스러웠다. ‘비평’이라고 한다면, 대상에 대한 비판적 접근이 필수적일 것인데, 이런 접근이 무조건적으로 대상을 ‘부정적으로 파악’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비판적이라는 것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 따라서 천편일률적으로 비평의 대상에 대해 비판적인 시선만을 고집하는 것도 또 다른 획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가 있긴 했지만 그래도 군계일학은 있는 법이다. 심사자의 눈에 공통적으로 드는 세 편을 각각 선정했는데 거기에 두 편이 겹쳤다. 그중 하나가 전기태 씨의 「지옥도와 성역, 재벌드라마가 구축한 ‘그들만의 리그’: 2010~2011년 방영 재벌드라마에 대한 제언」이었다. 재벌드라마에 대한 전형적인 접근법이 아쉬웠지만 드라마의 내용을 재기술하는 방식으로 일관한 다른 비평에 비해 투고자 자신의 분석이 돋보였다는 점에서 일단 눈이 갔다. 그러나 역시나 전체적으로 흐름이 재벌드라마의 형식 분석에 매몰되어 있다는 점이 한계로 다가왔다. 병렬적으로 재벌드라마들을 비교하기보다 드라마의 형식을 만들어낸 근본적인 원인에 대한 철저한 분석이 부족했다는 느낌이다. 그 다음 작품으로 문준영 씨의 「마음 속 리모컨의 정의란 무엇인가」도 눈에 들어왔다. 이 투고작은 ‘리모컨’이라는 사물을 중심으로 그 개념과 효과를 파고들었다는 점에서 참신한 소재가 돋보였다. 리모컨을 ‘주체의 상실’이라는 측면에서 고찰하고 이 논의를 마이클 센델(Michael Sandel) 열풍과 연결 짓는 것은 돋보였지만 연결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난점을 보였다. 두 논의가 따로 놀고 있는 느낌이었다. 비록 선에 들진 못했지만 충분히 가능성 있는 투고작이라는 점에서 격려를 보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당선작으로 선정한 김대현 씨의 「디지털 시대의 콜로세움-리얼리티 프로그램의 진화」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독창적인 시선으로 분석, 비평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얻었다. 적절한 이론적 접근을 통해 비평의 층위를 심도 깊게 구성해냈고, 이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을 효과적으로 개념화해냈다. 대중에 대한 정의가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대중의 욕망과 권력을 이론적으로 연결하는 실력이 충분히 눈길을 끌만했다. “시선의 권력이 개인에게 이양된 시대”라는 식으로 단언해버리는 바람에 증명되어야할 부분이 주장으로 끝나는 문제점이 있고, 이로 인해서 결론부분에서 좀 더 설득력 있는 분석이 펼쳐지지 못했다는 것이 아쉽긴 하지만 단단한 비평적 관점이 이런 결점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 투고자 모두의 건필을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