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배수아의 글쓰기를 ‘밖’에서 바라보기를 멈추고 그 ‘안’으로 들어가 볼 때인 것 같다. 데뷔 이십 년이 된 중견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배수아에게는 ‘낯선’ ‘이국’의 ‘번역’ 같은 소설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그러나 낯설고 이국적이고 번역적인 글을 쓰는 작가군이 한국문학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지금, 오히려 배수아에게서 ‘익숙한’ ‘고향’의 ‘원본’을 읽어냄으로써 배수아적인 것의 정체를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에게 낯설고 작가에게 익숙한 배수아적인 것은 어떤 중심으로부터 계속해서 원주를 넓혀가며 순환하는 나선의 공간 속에 현재와 과거와 미래를 담는다. 그 운동을 통해 자신의 문학을 구성하는 근원적 물음에 대답하고 문학 밖의 세계에 대해 재구성을 하는 것이다. 이번 소설 『서울의 낮은 언덕들』은 그러한 배수아다움을 읽기에 가장 적합한 텍스트이다.
에세이도 소설도 아닌 글을 쓰겠다는 작가적 선언으로 이방인의 정체성을 확실하게 자리매김했던 『에세이스트의 책상』(2003) 마지막에는 페터 한트케(Peter Handke)의 이런 말이 인용된다. “단지 글을 쓰고 있을 때만이, 나는 비로소 내가 되며 진실로 집에 있는 듯이 느낀다.”(174면)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에게 낯설게 느껴졌던 배수아의 글쓰기는 그 세계 안에서는 가장 익숙한 방식이었으며 자기 자신이 되는 일이었다. 이와 비슷한 언술은 『서울의 낮은 언덕들』에도 등장한다. 주인공 경희는 순수하게 모든 경로를 걸어서가는 여행을 결심한다. “걸어간다는 것은” “지금 이 시대에 행할 수 있는 가장 나 자체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배수아적 익숙함의 표지가 글쓰기에서 걷기로 이동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걷기는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2003)에서 이데올로기나 공동체의 억압에 대응하는 “자발적인 가난”의 자세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육신의 맹목적인 진지함”, “순수하고도 직접적인 진지함”, “그 어느 나라의 국경에서도 거절당하지 않는 그런 종류의 진지함”을 실현하기 위한 걷기는 자기초극을 위해 니힐의 세계에서 가난해지는 것으로 대지에 몸을 맡기는 니체(Friedrich Nietzsche, 1844~1900)의 방식을 닮았다.1) 그래서 “아르카익(archaic)한” 경희의 걷기는 외부를 향한 산책이라기보다는 내부를 향한 순례에 가깝다. 경희의 걷기에 제발트(Winfried Sebalt, 1944~2001)의 영국순례가, 지인의 죽음에 저항하기 위한 베르너 헤르초크(Werner Herzog)의 도보여행이, 투바 유목민을 이끌고 2천 킬로미터의 캐러밴(caravan)통상(通商)이나 성지순례(聖地巡禮), 또는 이 두 가지 목적을 겸하여 무리를 이루어 여행하는 상인을 완성한 갈산 치낙(Galsan Tschinag)의 잔영이 드리워져있는 것은 이것이 어떤 자기초극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걷기는 어떤 충실성(fidelity)이 바탕이 된다. 사회적이고 전통적인 것들이 제시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개별적이고 잉여적인 것들에 충실하면서, 우리는 우연적이며 예측 불가능한 “사건”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혁명이나 개인적인 사랑의 열정 같은 사건과의 마주침은 이전의 관성과 단절하는 기회이다.2) 경희의 걷기는 매 순간을 사건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연한 듯 보이는 사소한 사건들”과 “예외적 사건”들이 이 소설의 거의 전부를 차지한다. 경희의 낭송극은 우리를 베를린의 굴뚝방으로 데려가며, 우주의 중심을 향해 열린 굴뚝방은 또다시 치유사의 방에서 이루어지는 주술의식을 통해 몽골의 고대도시로 이동하고, 몽골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비엔나의 스타벅스가 1970년대 풍 서울로 안내해주는 출입구가 된다. 이들의 연결고리는 꿈과 환상과 샤먼적 현현(顯現)으로 이루어진, “두 번 다시 예전과 같은 형태로는 만나지 못할” 종류의 것들이다.
사건들은 개별성은 살아나게 하면서 연속성과 개연성을 파괴하는 “자의적인 비사회성(asociality)을 구현”한다. 그리고 접두사 ‘a’가 사라지게 하는 사회성(sociality)의 총체는 ‘도시’이다. 『이바나』(2002)에서부터 도시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한 시스템, 칼날 같은 에고이즘들이 응축된 시공간”(69면)이었다. 이번 소설에서 도시들은 그 “사이를 관통하는 보이지 않는 시공의 혈관”으로 연결되고 “이 생에서 저 생으로 건너가는 환생의 정거장”이 된다. 그래서 동양과 서양이라는 공간과 고대와 현대라는 시간을 넘어, 도시는 언제나 억압의 총체이며, 도시인은 고향에서 “인위적으로 잘려” 나와 “새로운 개념의 ‘가난’의 징후”를 보이는 “21세기적 프롤레타리아”이다. 그러나 경희의 걷기로 도시들은 사건이 되며, 그것이 궁극적으로 현현한 것은 “서울의 낮은 언덕”에 핀 “진한 보랏빛의 루핀꽃들”이다. “누구의 고향도 아닌 썩어가는 이 도시의 폐허에 하필이면 루핀의 씨앗을 뿌린 자”는, 이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장소를 고향으로 만들려는 자일 것이다. 그리고 그 불가능한 고향으로부터 배수아의 소설은 시작되고 끝난다.
이 불가능한 고향의 존재를 알리는 것은 목소리이다. 나타나자마자 사라지는 목소리는 “감각으로 이루어진 어떤 원형” 같은 것이다. 끊임없이 서로에게 중첩되고 분열되며 복제되는 인물들은 결국 매우 질료적인 어떤 목소리로만 남는다. 경희의 독일어 선생이 샤먼화 된 미스터 노바디도, 몽골의 반치가 표준화된 것 같은 스타벅스의 동양인도, 유럽 곳곳에 존재하는 마리아들도, 무엇보다도 경희와 경희의 과거인 듯한 경희의 언니와 경희의 미래인 듯한 경희의 딸도, 그리고 이 모두를 알레고리화한 듯한 낭송극 속의 신화도. 모두 인격으로서가 아니라 목소리를 통해서만 “물질의 정직함”과 “물질의 불멸성”으로 자신들을 증명한다. 그래서 목소리는 원본에 가까운 어떤 것이다. 경희가 가지고 다니는 인체 성대 해부도의 외관이 다리를 벌린 여성의 생식기와 놀랄 만큼 흡사하다는 것은, 목소리의 근원이 모든 인간의 고향인 자궁과 맞닿아 있다는 것이 된다.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목소리가 끝나고 시작되는 곳, 그곳을 그녀가 아주 오래전부터 말해 온 “혁명”의 장소라 말할 수 있지는 않을까. 우리는 배수아와 함께 걸으면서 혁명의 익숙한 고향과 만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