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풍찬노숙>의 팸플릿을 보면 이 연극이 “민감한 이슈가 될지도 모르는 ‘혼혈’ 문제를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고 한다. 이른바 코시안(Korean+Asian의 합성어)이라 불리는 혼혈 아이들의 숫자만도 10만 명이 넘었고, 이들이 겪는 차별이 눈앞의 현실로 성큼 다가온 현실에서, 이 연극은 꽤나 시의 적절한 주제를 다루고 있는 듯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연극 속에는 혼혈족과 대립하는 억압의 주체이자 저항의 대상인 순혈족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혼혈족이 겪는 차별과 억압도 단지 등장인물의 대사 속에서만 언급될 뿐이다. 순혈족과 혼혈족 간의 계급적 현실이 극 외부에 존재하다보니 혼혈족들이 처한 상황은 관객의 머릿속에서 차별, 억압과 같은 추상적 단어들로 개념화될 뿐이다. 즉, 공연의 소개 글과는 달리 이 연극에서 혼혈의 문제란 그저 단순한 소재에 불과하다. 실제로 극을 이끌어가는 추동력은 “왕이 죽어야 근대가 온다”고 말하는 문계이원재 분의 근대(국가)에 대한 열망에 있다. 그렇다면, 이미 근대를 살고 있고, 탈근대를 고민하는 시기에 새삼스레 근대(국가)의 기원을 되짚는 이유는 무엇일까? 푸코가 말한 것처럼 기원은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기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를 알게 되면 그것이 해체될 수 있기 때문일까?

 하지만 <풍찬노숙>이 말하는 근대(국가)는 우리가 알고 있는 근대와는 조금 다르다. 근대를 맞이하지 못한 등장인물들이 아파트를 알고, 시스템과 계급을 논하고 있으며, 그들이 입고 있는 의상도 비록 넝마기는 하지만 분명 근대 이후의 스타일이다. 애초에 이 극의 모티브인 혼혈이라는 문제도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근대 국가 속의 현실에서 가져온 것이다. 극 중 현실이 이렇듯 전근대가 아니라 근대에 가까워 보인다는 점에서, 이 연극이 근대의 기원을 되짚으려 한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보다는 이 극이 갈망하는 ‘근대’가 실은 탈근대를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 온당해 보인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큰 북이 표상하는 억압적 질서는 근대 국가의 신화적 폭력에 조응하며, 응보윤정섭 분가 왕이 되기를 결심하고 북을 치는 행동은 그 신화적 폭력을 폐기하기 위한 혁명적 봉기 즉, 신적 폭력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신적 폭력 그 자체만으로 근대를 넘어설 수는 없다. 신적 폭력이 기성의 신화적 폭력을 폐기하는 순간 그것을 대신하는 새로운 권력이 되어 스스로 신화적인 성격을 가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정의를 향한 진일보에 중요한 것은 신적 폭력이 아니라 폭력의 순간, 폭력에 의한 단절의 순간이라고 이야기했다. 문계가 왕을 애타게 찾으면서도 “왕이 죽어야만 근대가 온다”고 주장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의미로 해석된다. 따라서 응보가 일으킨 혁명의 실패는 애초에 필연적인 것이었으며, 중요한 것은 폭력에 의해 시대가 단절되던 그 순간이었다. 문계는 그 순간을 기록으로 남김으로써 그 순간을 영속화하려 했다. 진정한 실패는 그 역사의 기록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역사의 기록을 통해 혼혈족의 상상적 동질성을 확보하고 그에 기반을 둔 근대적 국가를 갈망한다는 점에서 보면 <풍찬노숙>에서의 근대란 말 그대로의 근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라타니 고진(柄谷行人)은 『근대 문학의 종언』에서 근대 문학이 국가라는 집단의 상상적 동일성을 만들어냄으로써 근대 국가의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말한 바 있는데, (그리고 국가가 그러한 동일성을 확고하게 뿌리내린 오늘날에 이르러 근대 문학의 역할은 끝이 났다고 주장한다.) 문계는 근대 국가의 형성에서 근대 문학이 했던 바로 그러한 역할을 자신이 기록한 역사가 똑같이 수행하기를 의도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이 연극 자체도 계급적 대립과 차별이라는 근대의 전형적 상황에 대면한 인물들의 실패를 리얼리즘적으로 그려낸다는 점에서 근대적이지 않은가.

 
 요컨대, <풍찬노숙>에서 말하는 근대란 근대이기도 하면서 근대가 아닌 시대다. 극의 배경이 전근대이면서 또한 근대이기도 한 알 수 없는 시대이듯, 그들이 열망하는 근대 역시 근대와 탈근대가 혼재된 실재하지 않는 시대다. 이러한 배경의 모호함은 이 연극이 신화를 차용하는 이유 중 하나일 테지만, 문제는 그로 인해 이 연극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바가 모호해지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결코 연극은 신화 그 자체일 수는 없고, 연극이 그려내는 신화의 공간이 현실과 조우할 때에 비로소 그 신화는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렇지 못한다면 신화는 그저 단순한 오락으로서의 이야기, 요설에 그치고 만다. 과연 <풍찬노숙>에서 그려진 신화는 언제 어디서 현실과 조우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