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저 깊은 곳에 감회가 서린다. 아주 어릴 적 이제 막 사진을 하겠다고 카메라를 메고 철 만난 메뚜기 마냥 이리저리 뛰어다닐 때, 덕수궁미술관에서 임응식(林應植, 1912~2001) 선생의 고희(古稀)기념 전시를 보았다. 그때는 오로지 덕수궁 안에만 현대미술관이 있던 시절이었다.(현재 국립현대미술관은 과천과 덕수궁 두 군데에서 전시장을 운영하고 있다.)
 당시 예술계에서 ‘사진’의 위상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초라했었다. 때문에 우리나라 최고의 미술관에서 한국 사진가가 고희를 맞아 회고전을 한다고 하니 무척이나 감동스러워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지금도 내 기억에 깊이 각인된 전시 장면이 있다. 미술관 2층 우측 전시실 입구에 만찬장이 차려져 있었고, 음식이 차려진 테이블 중앙에 커다란 얼음 조각이 있었다. 조각의 내용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여름으로 기억되는 시기에 얼음 조각이 보여주는 시선의 충돌이 무척이나 낯설고 의아했었다. 전시된 작품들은 모두가 흑백 사진들이었으며, 커다란 얼음 조각의 투명함을 감당하기에는 힘이 겨워 보였다. 벽에 전시된 사진을 다 보고, 오프닝 행사를 낮은 시선으로 참여하고, 다시 덕수궁 큰 문을 빠져나오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었는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당시 함께 했던 육명심 선생(당시 신구대학교 사진과 교수)이 내게 사진을 본 소감을 물으셨을 때 대답을 했는지, 혹은 어떤 소감을 말씀드렸는지 자세한 기억이 없다. 다만 그날의 모든 것들에 대해 놀라워했던 것만 분명하다. 그리고 사반세기가 흘러갔고, 다시금 같은 장소에서 선생님의 탄생 백주년 기념 기획전시가 열렸다. 전시의 제목은 ‘임응식-기록의 예술, 예술의 기록’이고, 나는 그것을 새로운 마음으로 엿보고/기록하고 있다.
 사진가 임응식은 1912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2001년에 타계했으니 90세까지 산, 일반적인 의미로 본다면 매우 장수하신 분이다. 사진계에서는 원로 작가이며, 교육자 그리고 사진을 알리는 데 많은 공헌을 한 분으로 잘 알려져 있다. 내게는 대학 다닐 때 은사님이기도 한데, 1982년 늦은 나이로 중앙대학교 사진과에 입학하니 명예교수 자격으로 수업을 한 과목 맡고 있었다. 아마, 촬영이론이 아니었나 싶은데 그 강의 내용은 주로 인화와 프린트에 관한 것이었고, 함께 학교 밖으로 자주 촬영을 나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사진가는 시대를 사(事)는 사람이다. 누군들 시대를 살지 않는 사람은 없지만, 특히 사진가는 기록이라는 방식을 통해 그 시대를 다음 세대에 연결하는 작업을 한다. 때문에 사진가가 스친 그 시대의 단면들은 고스란히 사실로 인식되고, 그 사실의 연결로 동시대를 이해하는 순환의 인식이 가능해진다. 물론 사진이 만들어지는 순간 파인더의 밖에서는 전혀 다른 사건이 벌어질 수 있으며, 그 시대의 단면에 대한 인식도 다를 수 있다. 또한 어떤 지점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사실의 의미도 그것을 이해하는 척도도 전혀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진이 지닌 본능적인 문제점은 고스란히 작가를 평가하는 기준에 대입될 터인데 이번 전시의 제목이 심상치 않은 것은 아마도 기획한 사람의 이런 부분에 대한 의식이 작동한 탓이라 생각한다.

 
 기록이란 단어는 생전에 선생께서 늘 사진의 본질이라고 강조하던 말이다. “사진이란 인간생활의 기록이고 진실이다.” 자주 하던 표어 같은 말씀이다.  
 그는 1930년대부터 사진을 작업했다. 집안이 다소 부유했던 덕에 어려서는 당시로는 귀했을 바이올린을 공부했고, 우연한 기회에 얻게 된 카메라로 사진을 시작했는데 그 때 나이가 20대 초반의 일이다.
 전시는 이 시기부터 1960년대까지를 ‘예술사진에서 사진예술’이라는 부제를 달아 일제강점기를 살아가는 젊은 사진가의 시선을 보여준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 시절 만연하던 모더니즘 혹은 모더니즘적 태도로써의 작업이 눈에 띈다. 몇 장의 사진에서는 픽토리얼리즘(pictorealism)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독특한 사진경향으로 회화적 감성을 사진 영역에 끌어들인 회화주의 예술사진적인 접근과 동시에 빛에 대한 공부로써의 작업, 조형적인 문제의 탐구 등이 이 시기 사진들에서 보이는 특징이다.
 그리고 이후부터 1980년대까지를 모아 ‘문화재와 예술가의 기록’이라는 부제로 기획하였는데, 이는 경제 활동이 필요했던 시기이며, 동시에 한국적인 것 혹은 우리 것에 대한 의식이 싹튼 결과일 것이라 생각한다. 공초 오상순(空超 吳相淳, 1894~1963)을 촬영하면서 담배 끝에 연결된 화초의 줄기와 잎을 연기처럼 연상하게 한다거나, 안익태(安益泰, 1906~1965) 선생을 촬영하면서 배경의 가로선이 악보/오선지를 연상하게 하는 등의 처리는 단지 재치만은 아닐 것이다. 그가 지닌 시-지각적 감수성이 사물의 조형적 표식을 가능하게 했을 것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당연히 학습된 결과일 터인데, 그래서인지 슬그머니 캐나다 작가인 조셉 카슈(Yousuf Karsh, 1908~2002)가 생각난다.

  
 전시는 다시금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를 묶어 ‘명동, 명동사람들’이라는 소제(小題)로 진행되었다. 선생님은 종군(從軍)하신 적이 잠시 있다. 이때부터 폐허로 변한 명동을 기록하기 시작했고, 2001년까지 반세기가 되도록 애정을 가지고 작업했다. 그는 명동을 ‘한국사회 변화의 축소판’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이때의 사진들은 대부분이 스냅사진들로 거리에 스치는 풍경을 마치 이방인처럼 낯선 태도로 기록했다. 때론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다. 아마도 서양의 사진들을 접하시면서 당시 세계사진계를 풍미하던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Henri Cartier Bresson, 1908~2004)의 영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돌아가신 이경성(李慶成, 1919~2009) 전 현대미술관 관장이 이미 1979년에 그렇게 비교한 일이 있기도 하다.1) 내 기억 속에도 선생님께서 명동을 다니시며 촬영하던 모습과 그 경험을 가지고 수업시간에 우리들에게 버스표 가격과 필름 한 컷의 가격이 동일한 것을 비유하며 절약을 강조하던 일이 생생하다. 그리고 이 명동 작업들 중 최근의 것들은 유족들이 소장하고 있는 필름을 요즘 유행하는 디지털 방식이 아니라, 그가 애용하던 아날로그 방식 그러니까 젤라틴 실버 프린트(gelatin silver print)를 하여 과거 사진들과 함께 전시를 한 것은 의미가 있다.

  
 마지막으로는 두 개의 소품전시가 있다. 하나는 <작은역사展: 임응식과 초기 부산사진>이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기억의 헌사>라는 전시로 함께 활동했던 동료들과 가르침을 받은 후배 제자들이 촬영한 초상사진, 유물과 생전에 쓰던 책자 등등이 있다. 워낙 많은 사진들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하나하나 거론하며 작가의 의중을 엿볼 수는 없다. 다만, 사진이라는 매체의 특성과 그가 살아온 시대의 흐름을 집어보면서 작가의 작업 세계를 포괄적으로 음미하는 일은 무척 흥미롭다. 특히나 사진을 삶의 기록이자 진실한 어떤 것으로 파악했던 그이기에 당신이 정착해 놓은 시간의 단면들은 그의 삶에 대한 이해 태도를 마치 거울처럼 그대로 반영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