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간과 매개
 멀리서 기적소리가 들린다. 덜컹거리는 소리로 우리는 열차의 속도와 그것이 은유하는 시간까지 추측할 수 있다. 한 줄기 기적소리처럼 무엇인가를 향한 시도동기는 앞으로 나타날 글의 운동과 속도를 시사한다. 이 글에서는 ‘공간’이 글의 시도동기이다. 왜 공간이 문제가 되는가? 오늘날 예술에서의 공간은 모더니즘의 신봉자들의 말대로 일상의 기억을 떠올릴 수 없게 하는 진공상태의 화이트큐브(white cube)도 아니고, 언젠가는 거품처럼 사라지고야 마는 물질로서의 그것도 아닌 공간에 달라붙은 온갖 기억과 사라진 행위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있는 맥락의 복합체이기 때문이다. 공간을 가능하게 하는 건축이란 바로 그러한 내부적, 외부적 기억의 현현체인 동시에 보다 복합적인 기억과 행위가 가능하게 만들어주는 매개로서의 역할이라는, 적극적 영역에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서구의 근대처럼 도시 공간을 잇는 열차의 기적소리로 시작된 우리의 식민시대를 떠올릴 때 서울역이라는 공간은 그 자체로 하나의 복합적 의미체계를 지닌 맥락의 덩어리다. 1900년 경성역이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이래 1905년 남대문역으로, 1923년에는 다시 경성역으로 바뀌고 1925년에는 지금 ‘구 서울역’이라 불리는 건축의 준공을 보게 된다. 해방 직후인 1946년 경성부라는 일제강점기의 행정구역을 서울시라고 부르기로 한 서울시 헌장이 공포됨에 따라 서울역은 오늘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오늘에 이르게 된다’는 말의 주체가 서울역이라는 공간의 고유명사는 아니니, 앞서 기술한 경성역, 남대문역, 서울역이라는 공간이 상징했던 오브제로서의 건축물은 2003년 12월 완공한 신축 역사와 함께 또 다른 의미의 공간 속에 위치하게 된다. 본래적 의미로서의 서울역은 이제 신축 역사가 감당하고, 여러 이름으로 불리던 르네상스식의 오래된 건축물은 교통의 본거지가 아닌, ‘구 서울역사 복합문화공간’이라는 이름 아래 전혀 새로운 의미화 과정을 거치고 있는 것이다.

머물다 가는 플랫폼만은 아닌
 알다시피 역이라는 공간은 잠시 머물다 떠나는 의미로서의 플랫폼이라는 성격이 짙다. 서울역이라는 공간 역시 새로운 문물과 사람이 도착하고 다시 또 다른 새로운 거점을 향해 출발하는 플랫폼이었고, 그것이 우리의 근대화 과정을 상징하는, 혹은 근대적 수탈을 상징하는 곳이기에 그러한 굴곡의 근대사를 탈각한 ‘문화’라는 콘텐츠를 담아내는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에 플랫폼이라는 말의 의미는 또 다른 해석을 요한다.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곳이라는 원 의미의 역사(驛舍)는 새로운 소통의 장으로서의 역사(歷史)를 준비하고 있다. 하나의 건축이 어떠한 맥락 속에 놓이느냐에 따라 그것은 전혀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기도 하는 바 서울역은 바야흐로 사람과 문화가 만나는, 이주와 부유의 역사에 고별을 고하는 시점에 서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남쪽 오지 시골로 가는 단 하나의 통로였던 그곳의 북적이는 대합실에서 느꼈을 신산함, 반대로 누군가에게는 삶의 터전을 등지고 서울로 향하던 곳의 첫 관문이었을 그곳에서 마주한 새로움의 두려움,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애써 떼어야만 했을 아쉬움, 미지의 세계를 만나기 직전의 두근거림이 역사의 찬 벽에 울리는 공명만큼이나 어지러웠을 그곳이 이제 긴 모색의 시간을 거쳐 또 다른 국면의 시작점에 서 있다.

 
 서울역사의 사적 번호이기도 한 284번이 만나 이름조차 ‘문화역서울 284’로 다시 태어난 작금의 상황은 이처럼 우리 삶 속에 존재했던 본래 의미로서의 서울역과의 이별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는 것이다. 사실 철도역이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는 사실에는 몇 가지의 상징성이 깔려 있다고 봐야 한다. 역은 생활문화의 거점이자 철로가 가진 네트워크로 연계되는 공간으로 문화의 총체로서의 면모가 특히 첨예하게 드러나는 곳일 수밖에 없다. 문화란 인간의 모든 삶의 전반적인 모습을 가리킨다고 한다면 사람과 사람이 만나고, 문물과 문물이 교차하는 역이야 말로 문화의 생성, 변형, 전승이 실시간으로 일어나는 생생한 현장이라는 의미가 깊게 배어 있을 것이다. 더욱이 서울역이라면 그 의미는 배가 될 터, 한 세기의 시간이 쌓인 네트워크는 문화의 이동과 전달을 넘어서 새로운 의미의 문화가 생성되는 현장이라는 특성이 그 공간을 규정하는 키워드일 터이다. 한편으로 여기에 서울역사라는 건축 자체가 갖는 사적 의미가 덧입혀질 경우 또 다른 관점에서의 접근을 요하게 된다. 이 관점은 매우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서울역을 새롭게 단장하고 그 안에 담는 내용이 앞서 기술한 넓은 의미의 문화를 배제한 협의의 문화 개념을 은연중에 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다양함이 공존하는 공간으로 거듭나길
 올 3월 본격적인 복합문화공간으로의 출범을 앞둔 문화역서울 284는 2011년 8월부터 올 2월까지 개관 프로젝트 <카운트다운>을 선보이고 있다. 그 동안 서울스퀘어미디어센터의 공동 프로그램을 시발점으로 지난해까지 공연 프로그램이 있었고, 렉쳐 프로그램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현재 서울역사의 1층과 2층 전관에 걸쳐 전시가 진행되고 있는 이 프로젝트는 중앙홀을 비롯하여 1, 2등 대합실, 귀빈 예비실, 귀빈실, 3등 대합실, 대식당, 이발실, 준비실, 배선실 등 서울역사의 거의 전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깨끗하게 정비된 중앙홀의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김홍석의 <분수>에서부터 각 공간에 설치된 미디어, 회화작품들은 저마다의 존재를 드러내며 역사와의 공생을 모색하고 있지만, 역사 곳곳에 설치된 도리아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 주두의 복합만큼이나 어색한 동거로 보였다. 이러한 부조화는 ‘역사적 사실을 회고하는 노스탤지어와 멜랑콜리보다는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며 새로운 시공간의 탄생을 기념하며 기억의 체험을 보다 다각적으로, 보다 풍요롭게 공유하고자’ 하는 기획자의 의도를 이해함에도 불구하고 옛 서울과 경성역의 공존만큼이나 이질적 감각을 뿜어내고 있다.

 중앙홀과 대합실 등 비교적 공공적 성격의 공간도 그러하거니와 역장실, 귀빈 예비실 등에 설치된 ‘예술작품’들은 오히려 공간 자체에 대한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다가와 소위 ‘문화’와 문화가 어떤 방식으로 만나야 하는가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는 듯한 아이러니조차 느껴진다. 물론 이러한 방식조차 하나의 문화이며, 그것이 어떠한 접점을 찾아 또 다른 문화를 지향해야 하는가 하는 논의를 제공해주고자 했다면 성공적인 사례로 비춰질 만하다. 하지만 전시와 공연만을 위해 마련된 소위 ‘문화 공간’과 원래의 목적에서 변형된 공간이 담지하고 있는 맥락의 상이점을 고려한다면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는 방식으로 보인다. 문화를 단지 어떠한 개념을 굳이 전달하는 하나의 매개로 보고자 하는 의식이 투영되고 있는 그 공간에서 진정 문화는 갈 길을 잃고 부유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결국 건축 내지 공간은 어떻게 의미를 가지느냐의 문제다. 공간이 온갖 종류의 의미와 관계를 맺으려면 많은 설명이 필요하다. 즉 공간이 가지는 신화적 속성-서울역이라는 공간의 건축사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그것이 근·현대 우리 역사에서 차지하는 사적(史的) 특성까지 고려한-뿐만 아니라 더욱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힘과 방향성과 진동을 통해 인간의 삶과 만나는 공간의 세계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일제가 서울역사를 통해 긋고자 했던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물고, 건강한 담론이 교차하는 진정한 플랫폼으로 다시 태어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