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송림동(인천 동구)을 걷는다. 골목길 한 편에는 입춘이 지났는데도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검게 변해 쌓여있다. 낮은 집들, 오래된 기와, 나무 대문, 심플한 가게 간판과 작은 평상, 그리고 먼 미래의 바람처럼 저 멀리 보이는 높다란 아파트들. 송림 4, 6동 철탑이 있던 달동네가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선 지 오래지만, 아직 이곳 송림2동 둘레는 이전의 모습 그대로인 듯하다. 골목길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저 가게는 문을 연 것일까, 닫은 것일까. 저 집은 꼭꼭 걸어 잠궈 놓은 걸 보니 아무도 살지 않는구나. 막다른 길로 접어들어 만난 벽에는 어지러운 낙서들이 비슷한 말들을 내뱉고 있다. 이 길이 아까 그 길인가 싶어 다시 또 길을 걷다가 그곳을 만난다.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서당골)
 도서관이 있을 것 같지 않은 골목길 한쪽에 작은 도서관이 문을 열었다. 열 평이 조금 넘어 보이는 곳. 양쪽 벽 책시렁에는 2,000여 권의 책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가운데에는 너덧 명이 모여 앉을 수 있는 둥근 테이블이 놓여있다.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작은 오디오도 한쪽에 놓여있다. 그리고 안쪽은 컴퓨터와 프린터 등이 놓인 작은 사무실이 이어져있다. 사랑방 같은 아담한 곳이다.
 이 작은 도서관은 ‘상상’지기 김혜영님이 가족과 함께 운영하고 있는 곳이다. 두 아이의 엄마인 그녀는 본인과 가족들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 가까운 지인들이 기부한 책들을 모아서 도서관을 열었다. 그녀는 송림동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고, 지금의 아이들도 그녀가 다닌 초등학교를 다니고 있다.

“이 동네엔 롤 모델이 없어.”
 누군가 던진 이 말이 아마도 이 작은 도서관을 열게 된 계기가 된 듯했다. 이전에도 살았고, 지금도 살아가고 있는 자신과 이웃들이 가지고 있는 이야기들을 잘 알지 못하고, 다음 세대를 살아갈 아이들의 삶을 보듬어줄 마음의 준비도 되어있지 않은 이가 아니었을까.
한 마을에서 오랜 시간 살아간다는 것은 겹겹이 쌓인 마을의 이야기가 곧 자신의 이야기가 되어간다는 것이다. 자신의 아이들과 살아가는 이 마을이 어서 개발되고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이웃들이 서로의 삶을 이야기하며 함께 성장해 갈 수 있는 곳이길 바랄 것이다.

 
 작은 도서관 ‘상상(서당골)’은 2008년부터 조금씩 준비되어 왔다. 2층이 살림집이었고, 1층이 미용실이었던 공간이 비면서 그곳에 가지고 있던 책을 조금씩 모으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자신이 보던 책들을 기꺼이 내어놓았다. 우연히 길을 지나치던 사람들이 들러 책을 보기도 했다. 도서관으로 등록하기 위한 과정은 복잡하지 않았지만, 책들을 정리하고 등록하는 등 소소한 준비들을 틈틈이 해나가는 데에 시간이 꽤 들었다. 그러나 마을에서 천천히 긴 시간을 두고 해나갈 것이기에 급할 것은 없었다.

‘사람이 책이다.’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은 사람이 곧 책이라고 말한다. 책시렁에 빽빽이 꽂힌 책들도 사람이 이야기하고, 살아온 삶의 과정을 담은 것이다. 그렇게 쓰인 책이 책시렁에만 놓여있지 않고 사람과 사람이 나누고 소통할 때 그 의미가 더 커질 것이다. 그래야 그 책은 살아있는 책이 될 것이다. 또 다른 의미에서는 실제 사람이 책이 되기도 한다. 글로 옮겨두지 않아도 사람이 사람을 만나 그이가 가지고 있는 재주를 나누거나, 살아온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다면 새로운 생각과 사고,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2000년 덴마크를 시작으로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리빙 라이브러리(Living Library)가 생각난다. 책 대신 사람을 대출해 주는 것을 말하는 리빙 라이브러리는 ‘사람책’과 대출자가 만나 서로를 이해하고 편견 없이 만나기를 기대한다. 우리나라에서도 2010년부터 공공도서관을 시작으로 다양한 곳에서 시도하고 있고, 주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사람책’으로 참여하고 있다. 그러나 이곳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에서 이야기하는 ‘사람책’은 특정 분야의 전문가가 중심이 아닌 마을의 오래된 생활자로, ‘상상’은 그들의 기술과 지혜, 생활의 역사들을 나누고, 배우고, 느껴가길 기대한다.
 사람등록부를 만들어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사람책’을 쌓아갈 준비를 하고 있다. 이웃들에겐 낯선 형태의 만남일 것이다. 그 옛날엔 마을 안에서 자연스럽게 만나 이루어지던 대화와 배움의 과정들이 도시의 마을에서는 먼 미래의 풍경이 되어버리고 있으니 말이다.
 
삶을 이야기하고 싶은 이웃들과의 소소한 모임들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은 어린이 도서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어린이도서관이 아닌 것도 아니다. 어린이든 청소년이든, 처녀, 총각, 아주머니, 아저씨, 엄마, 아빠, 할머니, 할아버지 마을의 누구든 도서관의 문을 두드릴 수 있다. 마을에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상상’지기가 엄마이고, 아빠인지라 그이들과의 모임 활동부터 시작하기 위한 준비를 하고 있다. 도서관을 열기 이전부터 만나오던 엄마들, 둘레 관심 있는 이웃들과 ‘교과서 읽는 엄마’ 모임을 시작한다. 학교를 가기 이전부터 시작되는 사교육의 바람은 무엇이 진정한 배움인지 잊어버린 지 오래다. 엄마들 스스로가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서를 읽고, 연구하고, 나와 이웃의 아이들이 스스로 공부를 해나갈 수 있도록 함께 배우고 공부하자는 마음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아빠로서의 가부장적인 역할이 아닌 자녀와 다양한 방식으로 소통하고, 아빠이기 이전에 삶을 살아가는 한 존재로서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실천하는 아빠 모임도 계획하고 있다.

  
 글을 잘 모르거나 책 읽기를 싫어하는 유치원생, 초등학생을 위한 책 읽어주기 모임인 ‘듣는 책, 보는 책’ 모임, 자기가 읽은 책을 가지고 다양한 생활과 연관시켜 창조적이고 재미있게 수다를 떠는 모임인 ‘책 읽고 수다’ 모임,  그리고 달에 한 번씩 거미줄처럼 펼쳐져 있는 골목길과 문화를 사진으로 담고 읽어보는 ‘골목사진’ 모임도 계획하고 있다. 해마다 따뜻한 6월이 오면 도서관 옥상에서 ‘옥상작은음악회’도 열 예정이다.
 책을 매개로 사람이 만나 즐겁게 소통하고 삶의 대안도 찾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살아있는 도서관이 아닐까.

지역과 소통하기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은 작은 도서관으로 등록을 하고 지역의 자원봉사센터의 협력기관으로 올린 후, 도서관 일을 함께 도울 수 있는 이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개관을 하면서 지역의 학교와 구청, 주민센터 등을 돌며 도서관의 존재를 알렸다. 학교에서는 도서관의 기존 프로그램과 연계하여 함께 할 수 있는 활동들을 찾아보자고 했다고 한다. ‘상상’지기는 정작 도서관 둘레 마을의 한 집 한 집을 두드려보지 못했다며 다시 한 번 떡을 돌려야겠다고 다짐했다.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은 둘레 이웃들이기 때문이다. 하루 하루 삶의 시간을 보내며 마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은 옆집 아주머니, 아저씨이고 앞집 할머니이기 때문이다.
지역과 소통한다는 것은 단순히 지역의 기관과 단체들을 많이 알고, 연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가 누구인지, 삶으로 만나 대안을 함께 이야기하고 조금씩 실천해갈 수 있는 한 사람의 이웃을 만나는 것이 마을을 진정으로 만나고 소통하는 것이 아닐까.
 
사람이 살아있는 도서관을 위하여
 가난한 마을은 가난하기 때문에 모자라고 부족한 것이 있기도 하지만, 가난하기 때문에 부지런하고 손때가 묻은 곳에 생활의 역사가 쌓여가고, 살아있는 삶이 숨쉬기 마련이다. 눈에 보기에 멋들어진 것은 감추어진 진실들이 느껴져 속이 거북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삶의 이야기들은 가난하지만 낡고, 오래된 곳, 사람이 살아있는 곳에 담겨있는 것이다.
요즘 유행처럼 작은 도서관들이 여기 저기 생기고 있다. 인천에서도 지역구와 동주민센터에서 운영하는 작은 도서관이 들어서거나, 대기업에서 후원하여 공간이 깜짝할 사이에 생기고 있다. 인천시의회에서도 간담회를 열어 작은 도서관의 활성화에 대한 필요성을 논하며 체계적인 운영과 지원이 함께 고려되어야 함을 이야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많아지고 있는 작은 도서관에 비해 운영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곳이 많다. 동구는 다른 구에 비해 그 수가 훨씬 적지만, 적고 많음을 떠나 작은 동네에 있는 도서관은 책을 보는 곳이지만, 책만 보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이미 지역의 학교들이 도서관을 갖추고 있지만 그 도서관은 지역과 소통하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아이들은 독서 편식을 하고 다른 맛들이 있음을 함께 이야기할 이웃들을 찾기가 어렵다. 책은 넘쳐나지만, 그 살아있는 이야기들을 발견하고, 나눌 사람이 없고, 삶을 위한 글 읽기와 진정성이 담긴 자발적 주민모임은 늘어나는 도서관에 비해 그 수가 극히 적다.
 살아있는 도서관 ‘상상’은 책이 필요해서 생긴 것도 아니고, 공간이 필요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함께 마을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문을 열었다. 사람이 살아있기 위해 책을 살리고 공간을 살리고, 마을을 살리는 곳이 되길 바란다.
 마을을 살아가는 한 개인이 자기 삶의 진정성으로 시작한 ‘상상’이 작은 마을의 좋은 문화를 이어갈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