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보면 2000년 전후 흥행작들에 등장했던 간첩이며 인민군은 우리의 결핍에 대한 판타지이다. 영화 <쉬리>  (1998), <간첩 리철진>(1999), <공동경비구역 JSA>(2000),   <웰컴 투  동막골>(2005) 등에 등장한 그들에게 우리는 웃음과 연민을 보내며 무척 감동했었다. 혹자는 이를 두고 레드컴플렉스의 극복이라 감격스러워 했지만 대중문화의 관습적 장치들로 불편하지 않게 가공된 그들은 이미 우리가 되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순수’의 표상으로 불려나왔다. 예를 들면 이렇다. <쉬리>에서 최민식이 분한 박무영에 대한 열광은, 비록 그가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 북한공작원이라 하더라도, 신념을 위해 기꺼이 파멸을 향해 돌진하는 비극적 주인공에 대한 감응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이제 우리는 안다. 더 이상 그들이 우리와 다른 별세계 사람들이 아니라는 걸. 2010년에 개봉한 <황해>는, 비록 옌볜(延邊)이라는 공간으로 우회한 것이라 하더라도, 하드코어 장르영화의 관습보다 더 잔혹한 현실 안에 우리도 그들도 모두 함께 있다는 것을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연극 <목란언니>(김은성 작, 전인철 연출) 역시 그들과 우리가 모두 같은 현실 안에 있다는 것을 안다. 남북의 모습이 연극적으로 과장된 단편 단편의 장면으로 빠르게 이어지는 프롤로그. 한편에서는 주님의 은총이 밝혀 준 빛을 따라 자유 대한민국에 왔다는 신앙 간증이 벌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다시 북으로 돌아와 배신자를 품어준 “위대한 최고사령관 만세”를 목메게 외치는 정치 선동이 벌어진다. 각각 금술을 단 융 커튼과 거대한 김정일(金正日, 1942~2011) 초상화를 배경으로 극장 양 끝 쪽무대에서 교차로 전개되는 이 두 장면은 마주보고 서로를 끝없이 비추고 있는 거울 같은 우리의 분단 현실에서 목숨을 걸고 양편을 넘나드는 것이 더 이상 이데올로기도 신념도 아님을 보여준다.

 우리의 주인공 ‘목란언니’는 어떤가. 부모 모두 공훈예술가인 집안에서 평양음악대학을 졸업한 엘리트 조목란정운선 분은 엉뚱하게 밀수사건에 휘말리면서 북한을 탈출하여 남한에 온다. 하지만 목란은 부모를 모셔오기 위해 모았던 돈을 몽땅 사기당하고 자살을 기도한다. 연극은 목란이 깨어나 다시 북으로 돌아가길 결심을 하는 데에서 시작하는데, 목란 앞에는 난관이 있다. 북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오천만 원이 필요한 것. 기댈 곳 없는 혈혈단신 목란이 어떻게 그 큰 돈을 구한단 말인가. 이렇게 목란의 서사 곳곳에서는 밀수, 사기, 거간비 등 항상 ‘돈’이 난관이다.

 한편 여기 거물들이 드나드는 고급 요정 마담 빅마마 조대자황영희 분와 그녀의 세 자녀가 있다. 그녀는 사우디에서 일하다 죽은 남편의 보상금으로 차린 대포집에서 ‘선수’부터 시작해 지금 이 자리까지 왔다. 신산한 시절을 살아낸 억척스런 홀어머니 서사인가. 그렇게 보아 넘기기에 그녀는 심상찮다. 예의 한편 쪽무대 위에는 연극 내내 낡은 나무함이 놓여 있는데 그 안에는 시아버지, 남편을 거처 조대자가 물려받은 둔중한 망치가 들어있다. 조대자는 종종 함을 열어 망치를 꺼내들고는 다 큰 자식들을 앞에 두고 술 팔고 몸 팔아 자식들을 키웠음을 말한다. 고급 요정을 운영하며 권력에 기생하는 조대자의 현재는 바로 그 때문에 정당화된다. 내몰린 삶에서 살아남겠다는 처절한 생존의 의지와 욕망은 부풀대로 부풀어 이제 수단 방법 심지어 목표조차 돌아보지 않고 내달리는 조대자는 기형적인 우리 현대사의 화신 같다. 조대자의 예리한 눈은 목란을 한눈에 알아보고 우울증을 앓는 큰아들의 간병인으로 그녀를 들인다.

 <목란언니>에서는 남과 북을 가로지르고 베트남전, 일제 치하를 거슬러 오르는 인물들의 전사가 쇼, 액션활극, 우스꽝스러운 무언극 등의 막간극으로 펼쳐진다. 이렇게 연극은 시공간과 스타일을 한껏 확장하지만 무대는 한 번의 전환도 없다. 극장 한 가운데 사면이 관객으로 둘러싸인 무대를 놓고 빼곡히 세간을 채워 넣은 이곳은, 아무런 전환도 없이, 탈북자 브로커 김정일(그는 북에서 쓰던 김평산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이 이름으로 개명했다)박지환 분의 집이 되고, 조대자의 술집이 되고 또 집이 된다. 그뿐이랴. 이곳은 조대자의 세 자식 허태산윤상화 분, 허태강안병식 분, 허태양연보라 분 각각의 방이다. 백일 만에 떠나버린 연인을 잊지 못해 시시때때로 손목을 그어대는 우울증 환자 허태산이 초점 없는 눈으로 앉아 있는 방, 현실에 진저리치면서도 무기력하기만 한 철학과 교수 허태강이 술에 취해 있는 방, 무명작가의 삶을 지긋지긋해 하는 허태양이 애인인 선배의 시나리오를 고쳐 쓰며 대박을 꿈꾸는 방이다. 연극은, 한편으로는 시공간을 확장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렇게 인물들의 공간을 내밀한 실내공간으로 한정한 채 관객이 둘러싸고 있는 사각의 무대 위에서 겹겹이 쌓아간다.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는 그렇게 한 사람 한 사람의 내밀한 삶에까지 침범해 들어온다.(이 지점에서 창호지문을 배경으로 4대에 걸친 한 일가의 일상을 거슬러 오르며 식민지 시절에서 현재까지 역사의 굴곡을 그린 박근형의 <대대손손>이 떠오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목란은 이 모든 그악스럽고 불안한 겹겹의 삶들을 관통해 간다.

 순수하고 당당하고 똑 부러진 목란이 술집 아가씨가 아닌 술집 마담 아들의 간병인이 된 것은 다행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 위기를 넘겨야 절정과 결말에 이를 수 있다는 조대자의 호언장담에도 그녀는 몰락하고 목란 역시 몰락한다. 그러나 비극은 없다. 목란은 타락한 세상을 구원할 희생양도 아니고 신념을 향해 돌진하는 비극의 주인공도 아니다. 그녀는 조대자 일가의 구원자가 되기를 뿌리치고 그들에게서 자신의 몫 오천만 원을 구해 떠난다. 그러나 그녀가 도착한 곳은 어머니가 살고 있는 조국이 아니다.

 <목란언니>는 다양한 스타일의 재기발랄한 장면, 리듬감 있는 빠른 장면전환 그리고 울림 깊은 아코디언의 라이브 연주까지 소극장 무대를 꽉 채우며 활기 있게 진행된다. 목란 역의 정운선은 우리가 그리는 그 모습처럼 당찬 북한 처녀를 보여준다. 그 때문인지 화려한 옷을 입고 짙은 립스틱을 바르는 마지막 장면은 연민을 자아낸다. 그러나 더 이상 판타지는 없다. 그들과 우리는 훨씬 가까워졌지만 그들도 우리도 흔들리는 세상에서 흔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