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니 파퀴아오(Manny Pacquiao)를 한국 독자에게 소개한다면 “필리핀의 박지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두 선수의 배경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리핀 출신의 이 권투 챔피언과 한국의 축구 선수는 동시대에 존재하는 아시아 출신 글로벌 스포츠 선수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 둘은 그 성공의 정점에 서 있다. 매니 파퀴아오는 현재 세계 권투 챔피언 랭킹(Pound for pound boxer 랭킹 기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미국복싱기자협회(Boxing Writers Association of America)는 “2000년대 최고의 파이터(2000s Fighter of the Decade)”로 매니 파퀴아오를 뽑았다. 공식적으로 그는 여덟 개의 체급에서 세계 챔피언십을 보유하고 있는 전무후무한 기록의 선수이다. 이러한 수상경력과 함께, 링 밖에서 이룬 다양한 공로를 인정받아 필리핀 내외에서 수많은 상을 받기도 했다.

 
부, 명성, 그리고 권력
아시아 출신 글로벌 스포츠 선수들의 성공은 곧 수입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매니 파퀴아오와 박지성 모두 각자의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내며 큰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2011년 <포브스Forbes>지는 매니 파퀴아오를 그해 가장 높은 수입(약 250억 원)을 올린 운동선수로 발표했다. 박지성은 이보다는 낮으나 같은 해 축구 선수 중 상위 100위 안에 드는 수입(약 70억 원)을 올렸다. 그러나 이 수치는 그들의 부수입을 제외한 것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광고 수입을 놓고 볼 때, 두 선수 모두 세계 유명 스포츠 브랜드인 나이키(Nike) 광고에 출연하고 있다. 박지성은 2007년, 나이키와 12년의 장기 광고계약을 하면서 자신의 연봉과 거의 비슷한 금액의 광고수입을 기록했다. 파퀴아오는 나이키와 2008년 자신의 이름을 딴 스포츠 의류 브랜드를 시작하면서 약 200억 원의 수입을 올렸다. 나이키 외에도, 이들은 다수의 글로벌 기업들과 광고계약(박지성은 질레트, 삼성, 아시아나항공, 금호타이어 등, 파퀴아오는 휴렛팩커드, 헤네시, 맥도날드, 산미구엘 등)을 맺고 있다. 그러나 박지성은 활동기반을 한국이 아닌 영국의 축구 클럽에 두고 있는데 반해, 매니 파퀴아오는 그 기반을 필리핀 내에 두고 있어서 광고 외에도 다양한 쇼비즈니스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다. 따라서 다음 경기를 위한 훈련을 제외한 시간에는 영화 제작, 텔레비전 쇼 출연, 음반 녹음 등 다양한 비즈니스에 참여하고 있다.
경제적 성공에는 명성도 따르게 된다. 매니 파퀴아오와 박지성은 모두 각자의 고국에서 상당한 유명인사이다. 박지성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축구 클럽(Manchester United Football Club) 내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아닐지라도 가장 많은 팬레터를 받는 선수로 알려져 있다. 바로 고국인 한국에서 보내오는 수많은 팬레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는 매니 파퀴아오의 경기가 텔레비전으로 생중계될 때마다 학생들이 결석하거나 직장인들이 휴가를 내는 경우가 종종 일어난다. 또한 그가 해외에서 우승을 하고 돌아올 때는 수도 마닐라의 주요 거리를 행진하는 카퍼레이드를 보게 된다.
특히 파퀴아오의 높은 사회적 명성은 필리핀에서 그가 정치인의 길로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가령 그에 대한 높은 인기와 국민적 사랑 때문에 그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표시하는 것만으로도 당선자가 좌우될 만큼 그의 정치적 영향력이 상당했다. 이로 인해 그는 정치 참여를 위한 공식적인 경로를 밟기 시작하여 2007년에 고향을 대표하는 하원의원직에 도전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첫 정치적 도전은 정치적 경험이 풍부했던 다른 후보자에게 밀려 실패하게 된다. 이후 2010년에는 선거구를 바꾸는 전략으로 재도전하게 되는데 그의 부인 고향에서 다시 하원의원직에 도전하여 전체 투표자의 66%라는 높은 지지를 얻어 당선된다. “국민의 챔피언(people's champ)”이라는 정치적 슬로건과 투명한 선거자금의 운용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끈 그는 사람들로 하여금 기존의 부패한 정치인과 다를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고, 다수의 빈민계층을 구원해줄 수 있는 새로운 ‘영웅’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러한 정치 활동 와중에 <타임Time>지는 파퀴아오를 그의 본업인 권투에서의 업적은 물론 필리핀인들에게 영감을 주는 인물이라는 이유로 2009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하나로 선정하였다.

 
가난한 소년에서 “팩맨”으로
매니 파퀴아오는 어린 나이에 권투라는 ‘잔인한’ 스포츠를 통해 가난을 문자 그대로 ‘때려 눕혔다’. 아버지는 그가 초등학생일 때 가족을 떠났다. 남은 어머니도 자신은 물론 가족 전체를 부양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그는 아버지가 떠난 지 2년 후에 학교를 그만두고 집을 떠난다. 마닐라로 간 그는 한동안 거리의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러나 곧 권투 실력으로 그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훈련에 참여할 기회를 갖는다. 필리핀 아마추어 권투대표팀에 소속되어 기숙사에 살게 되면서 그는 겨우 거리 생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국가대표팀에 참가한 후 곧 좋은 성적을 거두고 연이어 프로무대에 데뷔하게 된다. 16세라는 어린 나이에 프로무대에 데뷔한 그는 곧 전국에 방영되는 텔레비전 권투쇼에서 주목 받는다.
화려한 데뷔 이후 그의 모든 경기는 주목을 받게 되었고 매회 경기를 치르며 얻은 승리는 인생 성공의 발판이 된다. 59전 54승이라는 경이로운 성적으로 그는 곧 권투라는 스포츠계에서 정상을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성공으로 그는 “팩맨(Pacman)”이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이는 그의 성인 매니와 컴퓨터게임 캐릭터 이름인 팩맨의 유사성에서 비롯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이름의 유사성만이 아닌 그 캐릭터의 성격과 매니 파퀴아오의 삶의 유사성이 결합된 것이다. 팩맨이라는 캐릭터는 그의 앞길을 막는 모든 걸 먹어 치워야 살아남는 캐릭터인데 이러한 모습이 매니 파퀴아오가 경기마다 상대방 선수를 이기며 오늘날 권투의 전설이 된 삶의 경로와 매우 유사하게 받아들여졌다.

글로벌 장벽을 넘어서
매우 오랫동안 아시아인들은 서구 스포츠의 열렬한 관객이자 소비자였다. 한국과 필리핀을 비롯한 많은 아시아 국가들의 스포츠 팬들은 미국프로농구(National Basketball Association, 이하 NBA)에 열광하고, 유럽의 축구 클럽들을 열렬히 응원하며, 프랑스와 호주에서 열리는 테니스 경기 뉴스를 꼼꼼히 체크한다. 스포츠 문화는 서구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으며 오랜 기간 동안 아시아인들은 단순한 관람자로 그리고 그 서구의 스포츠 산업계가 생산하는 각종 문화상품의 소비자로 존재해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세계 경제의 중심이 아시아로 이동한 이후, 1990년대부터 모든 분야에서 글로벌화가 가속화되면서 제조업을 비롯한 많은 산업의 중심이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하고 있다. 이러한 경제적 변동은 아시아인들이 글로벌 경제, 정치, 문화계에서 활동할 기회를 제공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변화는 선수들이 국가의 경계를 넘어 다른 나라에서 활약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 중 가장 주목받게 된 이동은 바로 아시아 선수가 북미나 유럽으로 진출하게 된 경우이다. 일본의 야구 선수인 노모 히데오(野茂英雄)가 처음 미국 메이저 리그(Major League Baseball, 미국프로야구)의 엘에이 다저스(Los Angeles Dodgers)에 스카우트되면서 아시아 선수들의 서구 진출이 시작되었다. 곧 중국의 야오밍(姚明)이 2001년 NBA에 진출하면서 아시아 출신의 슈퍼스타가 된다. 바로 2년 후 박지성이 네덜란드를 거쳐 영국에 진출하면서 역시 성공적인 경로를 걷게 된다. 매니 파퀴아오가 라스베가스에서의 경기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에서 열린 주요 경기에서 우승하며 전성기를 누리게 된 것도 이 시기와 맞물린다.
그러나 아시아 선수들의 북미와 유럽 국가들로의 진출은 양날의 칼과 같다. 한편으로는 아시아라는 지역적 한계에 놓여 있던 뛰어난 선수들이 세계적 선수들과 경쟁을 하게 되고 그 재능에 대해 세계적인 인정을 받게 된다는 상징적 의미가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의 특정 팀이나 스포츠 산업계가 아시아 출신 선수를 ‘고용’함으로써 매력적인 아시아 시장으로의 진출을 용이하게 하려는 단순한 전략에 불과할 수도 있다. 심지어 초기에 아시아 선수들의 스카우트는 그 팀의 기념 티셔츠를 아시아 팬들에게 팔기 위한 도구라고 인식되기도 했다. 한국 축구팀의 한 관계자가 한국 선수들이 유럽 리그에서 실제 경기에 나가기보다 벤치에서 대기하는 것을 보며 “축구 제국주의”라고 비판한 일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니 파퀴아오와 박지성 같은 선수들은 자신들이 단지 마케팅 도구가 아닌 실력 있는 선수들임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활약은 이후 다른 아시아 선수들이 서구 스포츠 세계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비록 전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으며 막대한 수입을 창출하는 스포츠들이 서구에서 시작되어 발전했지만, 이것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될 수 없는 것은 바로 이러한 아시아 출신의 글로벌 스포츠 스타들의 활약에 기반하고 있다.
흔히 자국 출신의 글로벌 스포츠 스타에 열광하는 아시아의 팬들은 애국주의자 혹은 국수주의자로 이해되기도 한다. 이는 매니 파퀴아오와 박지성 같은 성공적인 선수들이 인종 차별과 같은 사회문화적 장벽을 극복하면서 실력도 인정받으며 ‘조국의 우수성을 증명’한 상징적 존재로 쉽게 여겨지기 때문이다. 필리핀에서 매니 파퀴아오도 이러한 이미지와의 강한 연관성을 분명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 이면을 본다면 그의 개인적인 성공 스토리가 가난을 극복하고자 하는 많은 필리핀인들에게 그들도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는 희망을 주고 있다는 점이다. 글로벌 세계 경제에서, 빈부격차가 크고 높은 실업률을 보이는 필리핀은 국가가 자국민을 보호하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다수의 국민을 이주노동자로 해외에 수출해 온 소위 제3세계에 속하는 국가이다. 디아스포라가 되어 불안정한 이주의 삶을 사는 이들과 고국에 남아 이들을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저소득층의 필리핀인들에게 매니 파퀴아오의 삶은 그를 응원하는 소외된 사람들의 삶의 투쟁과 상징적으로 연계된다. 따라서 그에 대한 애정과 응원은 단순히 특정 스포츠 팀이나 선수에 대한 응원이 아닌 자기 자신에 대한 응원, 정작 그 화려한 글로벌 스포츠 세계의 바깥에 위치하고 있는 스스로에 대한 응원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