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고의 해수욕장이 있는 해운대에서 동쪽 와우산 허리를 넘어가는 달맞이언덕에 서면 발아래 탁 트인 망망대해와 오른쪽으로는 해운대해수욕장과 동백섬 너머 광안대교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신라시대 문장가였던 해운 최치원(崔致遠, 857~?)이 아니어도 달맞이언덕에 서면 시 한수는 저절로 나올 것 같은 풍광이다. 그 달맞이언덕에 작은 문학관이 하나 있으니 바로 추리소설가 김성종이 설립한 추리문학관이다. 추리문학관은 국내는 물론 외국에서도 보기 힘든 추리도서와 자료를 모아놓은 전문문학관이다.(추리소설 1만 7천여 권을 포함해 도서 4만 7천 6백여 권을 소장하고 있다.) 5층 건물의 1층은 북카페이고, 2층에는 세계 유명 추리작가들의 사진과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3층은 시, 소설, 아동문학, 역사, 철학, 미학, 개발서 등 장르를 망라한 신간 위주의 책들이 책장에 빼곡하다. 물론 일이 층도 국내외 추리도서와 각종 문예지와 월간지 등이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바다가 보이는 이삼 층 창가에 앉아 독서삼매경에 빠져도 좋겠고 공책이나 노트북을 펼쳐놓으면 저절로 글이 써질 것 같다. 각 층마다 책상이나 의자, 테이블과 소파, 책장 등이 달라 분위기도 다르다. 이 층에서는 강연이나 시 낭송, 작가와의 만남 등 크고 작은 행사들이 자주 열리고 삼 층에서는 문학스터디도 매주 열리고 있다. 특히 1층 북카페는 창가와 테이블에 갖은 풀꽃과 나무를 심은 작은 화분이 놓여 있어 마치 잘 가꾸어진 온실 속에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저마다 고유한 색과 형태를 지닌 화초를 감상하며 차를 마시다보면 추리문학에 대한 조금은 딱딱하고 거친 선입견도 부드럽게 순화될 것 같다. 1980년대 우리나라 각 일간지마다 소설을 연재하며 이름을 날리던 김성종 소설가는 홀연히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내려왔다.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들이 서울로 모여드는데 역으로 서울을 떠나 아무런 연고도 없는 부산으로 내려온 까닭이 궁금했다.

 “거대한 대도시 서울은 인간성이 함몰된 도시지. 난 서울이 싫었어. 고향인 구례로 갈까 생각도 했지만 그때(32년 전)만 해도 교통이 불편했지. 지금처럼 통신수단이 발달해 원고 같은 걸 이메일로 보낼 수 있었던 때도 아니었고. 팩스가 있긴 했지만 매일 보내야 하는 신문연재 원고를 팩스로 보내면 글자가 선명하지 않아 어려움이 많았어. 또 젊은 나이에 너무 외진 곳으로 가기엔 좀 그렇더라고. 그때 <부산일보>에 연재를 하고 있었는데 그 때문에 몇 번 부산을 오고 갔지. 부산은 우리나라의 끝이잖아 항구도시고. 항구, 역동성, 국제부두, 어딘지 모르게 느껴지는 퇴폐적인 분위기와 범죄의 냄새 등. 작가라면 군침을 흘릴 만한 소재가 많은 도시였지. 그때 남천동에 남천비치아파트를 건설 중이었는데 보니까 맘에 들더라고. 당장 계약하고 부산으로 내려왔지. 지금은 여기도 건물 같은 게 많이 들어서고 했지만 처음엔 아무것도 없었어. 이곳에서 바라보이는 망망대해가 그럴 수 없이 적막하고 좋더라고. 그래서 여기다 문학관을 지었지.”

 그 추리문학관이 지난 3월 28일로 개관 20주년을 맞이했다. 20년! 한 생명이 세상에 태어나 스무 살 청년이 되는 세월이다. 하루가 다르게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고 다리가 놓이고 강줄기가 바뀌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 산전벽해가 이루어지는 세상에 이십 년이라는 세월을 묵묵히 지켜오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동안 추리문학관을 운영하면서 가장 기뻤던 일과 가장 어려웠던 점을 물어봤다.
   

 “기뻤던 일은 별로 없었던 것 같아. 개인적으로 이 사회에 문화적인 공헌을 하고 있다는 보람이랄까.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정말 좋다고 인사를 할 때 느끼는 소소한 기쁨은 있지. 하지만 이렇다 할, 내놓을 만한 기쁨은 없었어. 처음 시작부터 지금까지 힘들고 고달픈 나날이었지. 건물을 세놔서 갈빗집이나 술집을 하게 했으면 돈은 벌었겠지. 하지만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어. 외국 여행할 때 그 나라 작가들의 문학관을 볼 때마다 우리나라에 그런 곳이 없는 게 늘 마음 아팠어. 우리나라도 지자체 이후 우후죽순 격으로 문학관이 생겨났지. 그런 문학관은 외형은 얼마나 크고 화려해?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면 자료가 빈약하고 형식적인 곳이 너무 많아. 추리문학관은 책상이나 의자 하나, 책 한 권 한 권에 내 정성과 손길이 닿지 않은 게 없어. 내 땀과 노력이 고스란히 스며있는 문학관이지. 어려운 점은 경제적인 어려움이지 뭐. 문학관이라는 건 수익성이 없는 곳이잖아. 이 건물을 유지하고 운영하려면 지속적인 투자를 해야 하는데 그게 뒷받침 되지 않으니 힘들지. 좋은 아이디어는 무궁무진한데 실천하려면 결국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되니 그게 어렵지.”

 3월 31일과 4월 1일 이틀에 걸쳐 열린 추리문학관 20주년 기념행사는 추리문학관을 사랑하는 부산시민과 전국에서 모인 추리작가들, 그리고 각계 인사들이 모여 조촐하면서도 격조 있게 치러졌다. 헤밍웨이(Ernest Hemingway,1899~1961)의 『노인과 바다The Old Man and the Sea』가 처음 연재되었던 잡지 <라이프(Life)> 1952년 9월호를 포함해 추리문학관이 보유하고 있는 귀중본이 전시되었으며 이틀 동안 4차례의 강연과 2차례의 연극 공연, 4월 7일~8일 문학기행까지 어우러진 뜻 깊은 행사였다. 첫날 김성종 소설가는 인사말에서 빈곤의 즐거움을 이야기했다.

 “좀 더 싼 가구를 찾기 위해 헌 가구점에서 책상과 의자를 고르고, 사야할 책을 좀 더 싸게 구입하기 위해 다리품 파는 걸 즐거움으로 여기지 않았으면 20년이라는 세월을 이어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동안 많은 분들의 도움이 있었기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며 고마운 마음도 전하며 달맞이언덕에 영국의 헤이온와이(Hay-on-Wye) 헌책방마을처럼 책의 거리를 만들자는 제안도 내놓았다. 성악가의 축하노래와 바이올린과 피아노 연주가 기념식장의 분위기를 돋워주었고 “추리소설과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이상우 추리작가의 강연과 양석일 재일교포작가의 <종군위안부와 문학> 강연이 이어졌다. 이상우 추리작가는 한국추리소설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짚어줬으며 그 추리소설의 역사 가운데 김성종이라는 걸출한 인물과 역할에 대해 이야기했다. 일본에서 온 양석일 작가는 종군위안부의 이야기를 담은 자신의 소설 『다시 오는 봄(めぐりくる春)』(2012)을 쓰게 된 계기를 설명하면서 근대화를 위해 일본이 바라본 아시아적 신체(남자는 전쟁군인으로 여자는 종군위안부라는 도구로 사용한 점)에 대해 설명했다.

 “종군위안부는 전쟁범죄다. 그 문제는 지금도 해결된 것이 하나도 없다. 세상에는 문 밖의 아름다운 세계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작가는 문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어두운 세계를 보고 그려 내야할 책임이 있다. 내 소설이 엽기적일 정도로 잔혹하고 외설적인 것은 그렇게 표현해야 어둠의 세계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여성의 성을 매매하게 하고 장기를 적출해 매매하게 한 일본이 저지른 만행을 기록으로 남겨놓지 않으면 잊혀지고 사라져 버린다.”

 그의 강연은 사라져가는 역사적 진실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작가정신을 마주하는 기회이기도 했다.

 강연이 끝나고 추리문학관 지하에서 개관 20주년 특별공연으로 <도스토예프스키와 톨스토이>라는 연극 공연이 있었다. 팸플릿에 적힌 문구가 재미있어 옮겨 본다.

 “세계문학의 두 거인이 펼치는 고뇌의 문학인생, 그들의 심오한 문학 세계와 역사의 격랑을 헤쳐 가는 인생 역정, 애증의 인간관계를 부산의 현역 작가들이 리얼하게 보여준다. 작가가 아니면 보여줄 수 없는 감동의 문인극.”

 신파조의 리듬을 넣어 읊조려보면 부산적인 감성이 물씬 묻어나는 것 같다. 극본, 연출은 김성종. 관객은 부산의 작가와 추리문학관을 사랑하는 시민들이고 배우는 부산의 작가들이다. 평소 작품을 통해 만나던 작가와 독자들이 연극을 통해 한 자리에 모여 교감을 나누는 자리였다. 소설가들의 서툰 연기가 오히려 극의 재미를 배가 시키고 이어지는 실수에 객석에서는 폭소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거창하고 고상한 문화도 있지만 이렇게 소박하고 이물 없이 어울리는 작은 문화도 있다. 이런 공간이 있어 문화가 일상처럼 삶 속에 어우러지는 동네. 그런 차원에서 추리문학관은 부산문화의 든든한 토양 역할을 하고 있음에 분명하다. 그날 관람객 중 한 분과 이야기를 나눴는데 참 인상적이었다.

 “집이 달맞이언덕에 있는데 가끔 산책하다 보면 김성종 작가를 만나게 된다. 중절모를 쓰고 골똘히 생각에 잠겨 천천히 걷는 그를 먼발치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그득해져. 추리문학관은 우리 동네를 떠나 부산의 자랑이지.”

 항구도시, 해운대해수욕장, 광안대교, 동백섬, 오륙도(五六島). 부산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단어들이다. 모두 부산의 지명을 가리키는 단어들로 부산문화의 향기를 느끼게 하는 이름들은 아니다. 최근 들어 부산국제영화제나 불꽃축제 같은 관 중심의 행사가 화려하게 치러져 부산의 문화적 위상을 높이기는 하지만 그것도 일 년에 한 번 그 기간에만 반짝하고 이내 잠잠해지는 행사일 뿐이다. 하지만 부산의 달맞이언덕에는 추리문학관이 있다. 20년 동안 묵묵히 부산문화의 자산을 키워온 추리문학관이 있다는 건 부산시민의 긍지가 아닐 수 없다.

 부산 달맞이언덕에는 추리문학관이 있고 추리문학관에는 김성종 작가가 있다. 그래서 부산이 좋고 부산시민이라는 것이 자랑스러운 사람들이 어디 이야기를 나눴던 그분 한 분뿐일까.